< 222. 음식으로 관념을 바꾼다. >
“책이요? 저야 좋긴한데... 책을 만드는 일을 여인이 맡아도 되겠습니까? 이제까지 여인이 쓴 문집은 있다고 들었지만, 그 책 자체는 남자들이 만들었지 않습니까?”
“마누라는 책을 보고 이 책을 누가 만든 것인지 알아보겠소? 북촌의 김가가 만들었는지 남골의 이가가 만들었는지 알아보겠소?”
“그건 알 수가 없지요.”
“맞소. 책에 쓰인 글씨의 특징으로 옮겨 쓴 이의 성향을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활자로 인쇄해 만드는 책에서는 그런 것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오. 고로 책을 남자가 만들었는지 아니면 여자가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자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오. 그리고, 여인이 책을 만들었다고 해서 흠이 될 것이 또 뭐가 있겠소?”
“하오나, 같은 책이 있더라도 여인이 만든 책과 남자가 만든 책이 있다면 다들 남자가 만든 책을 가져가지 않겠습니까?”
“그걸 알 수 없게 ‘춘봉문고’ 라는 이름으로 만들게 되면 우리 상단에서 만든 것이라고 알고 그냥 사가지 않겠소? 그리고, 여인의 신분으로 조선 최초로 책을 만들었다는 건 나름 의미 있는 일이 기도 하니 규방의 아낙들은 오히려 여인이 만든 책을 사 갈 것이오.”
“그, 그렇군요. 규방에서 보는 책이라면...”
“그리고, 항해일기를 만들기 전에 내가 수정한 새 언문을 읽고 쓰는 방법을 담은 책도 만들어야 하오. 기존의 세로쓰기에 비해 내가 수정한 가로쓰기가 확연히 읽기 편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띄어쓰기’라는 것이 있어 글을 이해하기가 정말 쉬웠습니다. 그런 가로쓰기 언문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면 저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럼 맡아 주겠소?”
“네. 제가 조선 최초로 책을 만드는 여인이 되어 보겠습니다.”
다행히 종희는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책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인쇄 쪽 일과 책 판매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상단 일을 배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마누라는 미끼를 물어분것이여. 후후후.’
***
“마나님이 책을 만든다는 말에 종이를 묶은 권책을 보았는데, 이번에 절에서 만들었다는 그 종이로 만든 것입니까?”
“맞습니다. 글을 많이 쓰는 기준에서 흔하지 종이를 써보니 어떻던가요?”
이번 혼례식 참여로 아버지가 올라올 때 문경의 일을 맡아 주고 있던 김재원도 올라왔다.
직분으로는 춘봉 상단의 행수로 아랫사람이지만, 큰형인 원길과 동문수학했던 친구였기에 서로 말을 높여 주었다.
“처음 써보고는 그렇게 특징이 없는 종이이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격을 듣고는 아주 괜찮은 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드는 공정이 듣고는 아주 좋은 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드는 것이 단순하고 일주일이면 몇백 장을 만들어 낸다는 소리에 그 가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하하하. 알아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이 흔하지 종이를 만드는 것을 문경에서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농사가 힘든 땅에 닥나무를 심어 꾸준한 재료의 공급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흔하지 종이에 닥나무가 작게 들어간다곤 하지만, 그 원재료의 수급이 안정적이면 좋을 터였다.
“네. 왕산사 성도암에 들러 작업하는 것을 보고, 한양의 기술자를 데리고 문경으로 가겠습니다. 인삼 밭 인근에 자갈 많은 땅이 많으니 닥나무 밭도 그 인근에 만들어 보겠습니다.”
“참, 인삼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이제 1년이 조금 넘었기에 얼마만큼 자라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싹을 틔우고 줄기가 올라와 꽃이 피긴 했습니다. 올해에는 그 꽃을 수정시켜 씨앗도 한번 받아 볼까 합니다.”
“5년입니다. 5년 동안 제대로 커서 수확할 수만 있다면 인삼으로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힘내 보겠습니다.”
이후 김재원과 닭똥을 발효시켜 인삼 밭에 물과 함께 뿌려주는 것과 5년 동안 인삼을 경작한 후에는 2년 동안은 콩을 심어 지기를 다시 살려줘야 한다는 것까지 이야길 해주었다.
“한데, 문경 가마에서 만들라고 하신 검은색의 평평한 도자기 판은 언제까지 만들어야 할는지요? 이미 5천 개가 넘어가고 있어 놔둘 공간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아, 그건 계속 더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번 쓰일 때 1만 개씩 쓰이게 될 것이니 앞으로 2만 개는 더 만들어야 합니다.”
김재원이 말한 검은색 도자기 판은 염전을 만들 때 쓰기 위한 타일이었다.
염전 바닥에 검은색의 타일을 깔아 소금을 만드는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인데, 꾸준하게 생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조만간에 쓸 것이니 깨진 것도 버리지 말고 모아두시면 됩니다. 깨진 것도 다 쓸 곳이 있습니다.”
김재원은 깨진 판도 쓴다는 말에 그 사용 용도가 궁금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2만 개나 필요하다면 그만큼의 수량을 만들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더 생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경에서도 종이를 만들게 되면 천자문 책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연습으로 만드신 책의 글씨가 뚜렷하여 대량으로 천자문을 찍어 서당에 들여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재원의 말처럼 전국의 서당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천자문 책이었다.
둘째 형처럼 아이를 위해 천명의 사람에게 천자문을 받아 만들기도 했지만, 보통의 집안에서는 책 한 권으로 형제들이 다 돌려볼 정도로 귀하기도 했다.
흔하지 종이의 이름처럼 흔하게 볼 수 있게 천자문을 대량으로 찍어 보급하면 될 것 같았다.
거기다 일반적인 천자문 외에도 언문으로 설명이 들어간 현대 한국의 천자문 책 스타일로 만든다면, 지금의 어려운 천자문을 더 빨리 익힐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가로쓰기와 언문의 보급도 자연스러울 터였다.
그래서 마누라에게 부탁한 것과는 별도로 김재원에게는 쉬운 천자문 책을 만들 수 있게 설명을 해주었다.
***
“도련님...이 아니고 주인마님 웬 양반 나리께서 찾아오셨는데 뭔가 묘합니다요.”
“묘하다고?”
“네 복장은 사대부의 복장인데, 그것이... 하여튼 뭔가 이상합니다요. 이것을 보이면 알 것이라고 하시던데요.”
마당쇠가 내민 호패를 보곤 왜 마당쇠가 묘하다고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내수사의 어르신이니 얼른 모시고 오거라. 아니다. 내가 나가마, 사랑채를 정갈하게 정리하거라.”
마당쇠가 내민 호패는 내수사의 전수(典需 정5품)를 상징하는 관인이었다.
내수사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였기에 내수사의 우두머리인 전수나 별좌 등 모든 이들이 다 내시인 내관으로 임명되었었다.
나이가 많음에도 수염이 없고, 목소리가 가늘고 하다 보니 마당쇠가 묘하다고 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내수사 전수인 내관 이치현은 마흔 줄에 접어든 내관으로 세조 시절 셈이 빨라 내수사 전곡(典穀 정8품)으로 있다 줄을 잘 서 지금은 내수사의 우두머리인 전수가 된 자였다.
벼슬의 품도 다르고 양반과 내시였기에 그 신분도 달랐지만, 내수사라는 특별한 보직의 사람이었기에 사랑채에 들어가서도 상석을 비워두고 둘이 마주 앉았다.
“지나가는 길에 이 집이 전 제조의 집이라는 소리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전수 이치현은 우연히 들렀다고 이야길 하며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했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못하는 듯하여 원종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번에 전 제조께서 말라카에서 가져온 설탕과 후추로 인해 내수사의 재정이 아주 많이 불어났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다음에는 또 언제 말라카에 가실 것입니까?”
이거였다.
이치현이 우연히 들렸다고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역일에 끼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현재 일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말라카의 왕이 원하던 물건을 다 모으지를 못했습니다. 그것들을 다 모으게 된다면 그때 출발할 생각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누전선 3척으로 갔으나 배를 늘려 10척이 되었고, 거기에 실어 온 물건들로 은자 3천 냥을 넘는 이득을 보았다고 하던데, 배를 늘리게 되면 그만큼 수익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배를 늘려 실어 오는 물건이 많으면 수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물건 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었지 두 번, 세 번의 교역을 하게 되면 가격이 좀 낮아질 것입니다. 이번에 설탕과 후추를 판매하면서 느껴보셨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지요. 부족하고 귀해야 가격이 오르고, 흔하면 가격이 낮아지는 것이다 보니 설탕이나 후추의 가격이 이렇게 떨어질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전하의 밀명이옵니까?”
“어이쿠, 어찌 제가 그런 중한 임무를 맡겠습니까? 제가 오늘 온 것은 전하의 명이 아닙니다. 정말 순수하게, 내수사의 재산을 늘릴 방도를 알아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원종은 혹시나 성종의 밀명 같은 것을 받고 온 것인가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말라카의 국왕에게 팔 물건이 쌓이게 되면 우리 내수사에서도 그 교역에 낄 수 있을까 싶어 물어보고자 온 것입니다.”
“아하. 교역으로 내수사의 재산을 늘리시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이군요. 저야 함께 가는 교역 선단이 늘어난다면야 이득도 늘어나는 것이기에 좋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대신들이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소관이 이렇게 따로 찾아온 것이랍니다. 겉으로는 내수사의 배가 아니라 춘봉 상단의 배가 두 척이 늘어난 것으로 해서 하면 안 될까 하는 의향을 묻고 싶습니다.”
은근하게 이야길 하는 이치현의 말을 들어 보니, 성종의 허락을 얻은 것도 아니었고, 대신들의 눈 때문에 내수사가 대놓고 할 수 있는 사업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 그 의도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내수사의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본인 재산을 늘리고자 교역에 끼고 싶다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런 팩트를 가지고 이치현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선은 이 이치현이라는 내수사 전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정말 충정이 있는 인물이라 내수사의 재산을 불리고자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가능성을 흘려주고 시간을 끌어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다만, 배를 한 대도 아니고 두 대나 넣고 싶다고 할 정도로 교역을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치현이 벌써 우리 상단에 대한 것을 다 파악하고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수사의 배 두 척을 선단에 끼우는 것은 가능하나, 각 배에 실어 가고 싣고 오는 물건에 대해서는 상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중복이 되어 가격이 떨어지거나 하는 부분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런 부분이야 합의를 할 수 있지요. 그럼 언제 그 물품에 대한 상의를 하는지요.”
“그것이 미정이라... 그리고 제가 지금 육조 거리에 만들고 있는 장터거리에 신경을 더 쓰고 있다 보니 다음 교역선을 띄우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장터라면 그 경회루에서 했던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네. 맞습니다. 궐에서 했던 것을 시중에서 하려고 하니 신경을 쓸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선은 그 일이 끝이 나면 교역선에 대한 일을 진행할 것이라 그때나 다시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그렇게 하지요. 헌데,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편하게 교역선을 띄우면 큰 이득이 오는데, 장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팔려고 하시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군요.”
“그것은 전수께서 직접 장터에 오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특유의 재미가 있답니다.”
“그런가요. 그럼 장터가 열리는 그때 한번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교역선 문제를 장터를 핑계로 뒤로 미루었고, 이치현을 배웅해서 돌려보내었다.
나름의 선방은 한 것 같은데, 내수사가 이리 나서서 배를 같이 보내겠다고 할 정도라면 송상이나 경상 또한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았다.
“마당쇠야 넌 공랑점포의 오추 행수에게 가서 동래로 간 삼식 행수의 상선이 언제 오는지 확인하고 오거라.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알아보고 장터가 어찌 되고 있는지도 봐야겠구나. 말을 내오거라.”
< 222. 음식으로 관념을 바꾼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