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춘봉전장. (1) >
“저건 뭐라고 읽는 겐가? 글이 옆으로 누워있다니. 별일일세.”
“위에서 아래로 읽는 게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고 하더구만.”
“어디 보자, 그럼 춘봉전장? 전장(錢莊)이면 동전 집이라는 것인가?”
“장원(莊園)에 쓰이는 장자 이지만, 이럴 때는 엄하다는 뜻이네. 동전을 관리한다는 그런 뜻이라고 봐야지.”
“어렵구만. 그래서 저기서 동전을 관리해 준다면 조선통보 같은 동전을 취급하는 곳이라는 거군. 헌데, 요즘도 조선통보를 쓰지 않으면 경을 치나?”
“세종대왕 시절 유정현 대감이 서슬 퍼렜을 때는 경을 쳤지만, 이젠 안 그렇네.”
“그럼, 저런 전장이 있어봤자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닌가? 예전에는 통보를 쓰지 않았다고 강제로 수군으로 내려보내고 했지만, 그런 경을 치지 않는데 누가 쓰겠나.”
“그렇지. 옆으로 쓴 특이한 현판은 재미있지만 별거 없을 것 같네. 자 가패에 가서 뜨끈한 숭늉이나 한잔하세나.”
처음 춘봉전장을 열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 반응은 딱 이랬다.
가로쓰기와 언문이 먼저 쓰여있는 현판이 특이하지만, 동전을 취급하는 상점이라는 소리에 다들 신경을 껐다.
하지만, 전장 안에서는 새로운 것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자, 여기 왼쪽에 보면 입금(入金)이라고 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출금(出金) 이라고 되어 있는 게 보이는가? 그리고 왼쪽에는 은 10냥이 들어와 있다고 쓰여있고, 혹은 백미 20석이라고 쓰여 있는가?”
“네. 글 뒤에 도장도 있습니다.”
원종의 말에 선원들은 닥종이로 만들어지고, 비단으로 겉이 둘러 진 통장을 살펴보며 답을 했다.
“단주님. 그러면 이 통장이라는 것만 들고 전장이나 춘봉 상단에 가면 언제든지 은 10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요?”
“그렇지. 은을 출금하게 되면 오른쪽의 출금 쪽에 내역이 쓰이고 도장이 찍히게 될 것이네.”
“그럼, 이 통장을 들고, 벽란도나 동래 지점에 가면 곡식도 살 수 있는 것입니까요?”
“그렇치! 제대로 이해 했네. 은의 가치에 맞는 곡식을 상단에서 바로 살 수 있네. 다만, 이 통장의 주인이 맞는지를 우리가 만들어 준 선원 호패로 확인할것이네. 그러니 반드시 본인이 가야 하고 호패도 꼭 들고 가야 하네.”
“허면, 백미 20섬 가격인 은 10냥을 넣어 두었는데, 쌀 값이 오르게 되면 어찌 됩니까? 그래도 20섬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니네. 그래서 은으로 받을지 백미로 받을지 결정하라고 한 것이네. 계절에 따라 쌀값이나 은 값이 오르내리기에 그 변동을 다 책임지지 못하네. 은과 쌀을 출금할 때 그날 시세로 다 거래가 되네.”
다들 계절에 따라 곡식의 가격이 오르내린다는 것을 알기에 다들 쉽게 이해를 했다.
“그리고, 절대 통장과 호패는 다른 이에게 맡기면 안되고, 통장을 만들 때 약속한 규칙을 어기게 되면 입금한 은과 쌀을 보장해 주지 않을 거네. 저기 약관을 반드시 읽어보게나.”
다들 배에서 언문을 배웠기에 약관을 못 읽는 이가 없었다.
쉬운 한글이 주는 가치를 금융교육을 하며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통장 만든 기념으로 가패와 국수집에서 쓸 수 있는 교환권을 주고 있으니 다들 맛들 보게나.”
***
“다행이야. 사실 우리 품삯으로 쌀 20가마씩 준다고 했을 때 이걸 어떻게 집에 들고 가지 하며 걱정했거든.”
“그러게. 거제와 가까운 동래 지점에서 쌀을 사 오면 되니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한양에서 거제까지 들고 가는데 고생했을 거야.”
“통장이라는 게 참으로 편하구만. 그럼 이 공짜로 받은 교환권으로 가패에가서 가수저라나 한번 먹어볼까. 그렇게 달다고 하던데.”
“난 국수! 배에서 먹던 국수 말고 진짜 제대로 끓여서 찬물에 씻어낸 게 먹고 싶어.”
선원들은 통장을 발급받으며 받은 교환권을 들고 가게로 가자 춘봉 교환권 전담 가판대에서 빠르게 주문처리를 해주었다.
“아니 우리는 포와 베로 길이를 재면서 가수저라를 주문 하는데, 저치들은 무엇을 냈기에 저리 빠른가? 저화(楮貨)로 계산을 한 것인가?”
“아, 저치들은 춘봉전장에서 교환권을 들고왔습니다요. 춘봉전장에서 미리 교환권으로 교환해 오면 계산을 위해 이렇게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요.”
“춘봉전장? 거기서 그런 교환권을 주는가 보군.”
“네. 저화나 조선통보, 곡식, 비단, 포, 베 등등을 들고 가시면 가치에 맞는 교환권을 주는데, 그 교환권으로 우리 가패는 물론, 국수집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요.”
“오, 그래?”
200여 명의 선원들이 한양의 가패와 국수 가게에서 교환권으로 돈을 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저들이 쓰는 교환권의 편리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반응이 바로 왔다.
“그러니깐. 자네들 가게에서도 이 교환권을 쓰는 선원들을 받고 싶다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선원들이 춘봉 국수에만 가다 보니 줄을 서서 먹는 게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요. 줄을 서지 않게 저희 가게에서도 교환권을 받아 주고 그걸 춘봉전장에서 곡식이나 다른 것으로 교환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한양에서 부자로 소문난 최권영과 송상의 행수였다.
둘다 내 가패와 국수가게를 카피해서 영업하고 있는 이들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선원들이 쓰고 있는 교환권이 탐이 난 듯했다.
입으로는 줄을 서서 먹는 선원들이 안타깝다고 했지만, 공짜로 받은 교환권과 봉급으로 받은 은이 있다 보니 선원들의 큰 씀씀이에서 뽑아 먹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송상도 마찬가지인가?”
“네. 총대방 어른께서 지금 안 계시지만, 춘봉 상단과는 경쟁하지 말고 서로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게나. 교환권을 받아서 온다면 그걸 은이나 곡식으로 바꾸어 주겠네. 바꾸어 주는 시세는 매달 첫째 날에 곡식과 은 가격에 따라 공시할 것이네. 물론, 우리가 운영하는 공랑점포에서 다른 물건으로도 교환이 가능하네.”
최권영과 송상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처럼, 사람들은 흥정 없이 빠르게 가패와 국수 가게를 이용하는 것을 보곤 호기심에 춘봉전장으로 와서 교환권을 바꾸어 갔다.
그리고, 교환권으로 빠르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편해지고자 미리 교환권을 바꾸어 모으려는 이도 생길 터였다.
그렇게 교환권으로 한양은 물론 벽란도와 동래의 춘봉 상단에서도 교환이 가능하다고 하면 마치 화폐처럼 가치를 가질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불법 사용이었다.
교환권의 가치가 알려지게 되면 위폐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중국에서 사 온 비단을 열로 깔끔하게 재단해 글씨를 쓰고 도장을 찍어 사용하는 쿠폰과 같았기에 이런 위폐를 만들려는 이들이 없지만, 그 가치를 다들 알게 되고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위폐가 나올 수도 있었다.
위폐가 따라 하기 힘든 교환권을 만들려면 인쇄술이 필요했다.
주물로 틀을 뜨고, 압착해서 찍어낼 수 있는 금속 인쇄술이 있어야 했다.
이런 인쇄기술자를 구하기 위해서 한명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교서(典校署)의 사람을 데려가 쓰고 싶다고?”
전교서란 태종때 만들어진 인쇄를 담당하는 주자소(鑄字所)의 후신인데,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거나 교서를 만드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네. 이러한 교환권을 만들려고 하는데, 전교서의 인쇄 기술을 빌리고자 합니다.”
한명회는 춘봉 상단의 표식이 들어간 교환권을 받아 들고는 신기한 듯이 보았다.
“이것이 저화와는 다른 건가?”
“네. 오직 저희 상단과 관련된 가게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이옵니다. 저화처럼 어디서나 쓸 수 있는 화폐가 아니옵니다.”
“흠. 가치를 가지고 재화의 교환이 된다면 그게 돈이지 무엇이겠는가. 확실히 자네는 재미있구만.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 혹시 이것도 그 말라카인가 하는 거기서 배워 온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중국을 벗어나 대월과 그 아래로 향하니, 그곳에는 이런 은을 사용했습니다.”
원종은 말라카에서 받아온 은을 꺼내었는데, 척 보기에도 중국이나 왜에서 쓰이는 은이 아니었다.
“특이하군. 중앙에 구멍도 뚫려있지 않고, 여기 이 표식은 뭔가? 언문으로 ‘춘’ 인가?”
“네. 저희 상단에서 직접 새겼습니다.”
원종이 말라카에서 받아온 은(銀)은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쓰이는 중앙에 구멍이 나 있는 동전 모양이 아니었다.
둥글기는 했으나 은화와 은 조각의 중간쯤 되는 형태와 모양이었다.
그런 은에 강철로 만든 틀 정으로 ‘춘’자 한글을 때려 새긴 것이었다.
이러한 화폐를 ‘각인 화폐’라고 하는데, 금 또는 은에 귀금속의 가치를 보증하는 이의 이름을 새긴 화폐였다.
주로 중동과 서아시아, 지중해 연안에서 사용하는 화폐 방식이었다.
그 새겨지는 각인의 글자는 당연하게 권력자의 이름을 따거나 나라의 이름을 새겼는데, 그 이름이 미치는 곳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중국을 위시한 동양의 동전들은 귀금속의 가치가 없는 동전에 황제의 권위를 담아 화폐를 주조했는데, 이를 ‘주조화폐’라 정의했다.
각인 화폐와는 다르게 가치가 없는 것에 통치자의 권력을 담아 만든 화폐였기에 주조화폐는 외국에서 가치를 가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원종은 말라카에서 가져온 은에 춘봉 상단의 춘을 새겨 각인 화폐로서 자신의 상단과 거래할 때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화폐를 만든 것이었다.
이런 가치의 개념과 통용의 개념을 아는 신숙주라면 이 ‘춘’이 새겨진 은화를 보고 크게 뭐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한명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흥미롭게 은화를 살펴볼 뿐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은화를 쓰는 것은 신기하군. 그럼, 교환권을 만들기 위해 전교서 사람을 쓸 수 있게 해주면 어떤 것에서 조정에 이득이 생기는가?”
“조정에는 크게 이익이 생기지 안 사 오나, 대감께서 하시는 일에는 꽤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일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게나.”
“대감께서 백성들을 위해 하시고 계신 대금(貸金) 일에 아주 크게 도움이 되실 겁니다.”
“으흐흠.”
대금 일이라고 하자 한명회는 헛기침을 크게 하며 주위 눈치를 보았는데, 의정부 내에서 다들 멀리 떨어져 있기에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대금 일에 도움이 된다고? 어떻게 말인가?”
“일전 제가 들려서 본 대감댁의 광은 아마도 조선에서 가장 큰 광일 것 같았습니다. 헌데, 제가 갈 때마다 보니 아랫것들이 창고에 자리가 없어 고민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지.”
광에 쌀을 넣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말에 한명회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쌓아둘 수 있는 공간을 줄일 수 있는 것이 이런 교환권이옵니다. 교환권 100개가 백미 1섬의 가치를 가진다면 그런 쌓아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허나, 그 교환권을 교환해 주는 춘봉 상단이 없어지거나 망하면 말짱 황 아닌가? 그리고, 저화처럼 가치가 곤두박질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런 대응책이 없으면 그냥 비단 조각일 뿐일세.”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제 춘봉 상단은 그렇게 없어지거나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발행하는 교환권에 상당하는 금과 은을 금고에 보관하여, 상단이 망하더라도 그 가치만큼 찾아 갈 수 있게끔 할 것입니다.”
“교환권의 발행되는 만큼의 금과 은을 들고 있겠다고?”
“네. 그렇게 한다면 저화처럼 교환권의 가치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상단이 망하더라도 그 보장된 금액을 금과 은으로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명회는 저화의 가치가 은 10냥에서 은 2냥으로 떨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 재정이 부족할 때 마음대로 저화를 찍어내어 사용했기에 그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발행되는 교환권의 총액을 금과 은으로 보장해 주고 있다면, 교환권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자네는 이 방법을 어디서 들은 것인가? 보한재(신숙주)가 알려준 것인가?”
“처조부께서는 제가 이런 전장을 만들고 교환권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모르실 겁니다.”
“흠. 확실히 교환권이 그 가치를 보장한다면 대금일이나 재물을 쌓아두는 일에 편하고 득이 많을 것 같군.”
한명회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니 제대로 밀어 줄 것 같았다.
“다만, 문제가 있네. 그 교환권의 가치를 보장하는 금과 은의 관리는 누가 하냐는 것이지. 몰래 금과 은을 꺼내 써 버리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내가 자네를 믿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 아닌가.”
“네. 그 말씀도 맞습니다. 그래서 소생이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전교서의 기술자들로 교환권을 찍어내게 되고 교환권을 유통할 때 제 전장의 소유권을 대감님이나 처조부님과 공동으로 나눠 가질 생각이옵니다.”
“나눠 가진다고? 어떻게 말인가?”
< 210. 춘봉전장. (1) > 끝
작가의말
세종대왕은 조선통보의 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당시 병조판서와 영의정까지 지냈던 유정현을 조선통보 유통 담당자로 세종대왕이 발탁했었습니다.
재무쪽에 밝은 유정현이었으나 사용이 늘지 않자, 물물교환으로 거래하는 이를 잡아 곤장을 치고 수군 역을 지는 벌을 내렸는데, 이러한 수군으로 신량역천시키는 벌을 받게 된 이가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가를 아예 몰락시켜버리는 강수를 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 8년 한양 대화재가 일어나 민심이 뒤숭숭해지자 결국 세종도 화폐유통을 어긴 벌을 내리지 않게 됩니다.
이후로는 흐지부지 되어 18세기까지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