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76화 (176/327)

< 176. 면식의 시대. (1) >

“우리가 송상에게 다녀온 것을 어찌 알고 있는 것이오?”

고주원은 자신들이 감시당하는 건가 싶어 표정을 굳혔다.

“아, 미행을 하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오전 송상 총대방 김만춘이 제게 왔었습니다. 두 분 덕에 이번 사행사가 뱃길로 가게 되는 걸 알았다고, 어떤 걸 싣고 가도 될지 물어보더군요.”

“어찌 보면 송상과 춘봉 상단은 경쟁하는 상단인데, 그런 품목을 물어보고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뭐, 상단의 경쟁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송상과는 그리 나쁜 관계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서로 돕고 돕는 사이이지요. 먹을 것이 없다면야 송상과 경쟁하고 싸워야 하겠지만, 먹을 것이 너무나도 커서 혼자 다 못 먹을 것 같으니 나눠 먹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원종의 이야길 들은 대영일은 너무 커서 다 먹지도 못한다는 것이 중국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보았던 송상의 총대방 김만춘과 춘봉 상단의 전원종을 보고 있으니 그릇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김만춘은 상행이 배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래된 형제와 같은 이들보다 교역 일에 더 신경을 쓰며 오래된 거래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있는 원종이란 자는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발설한 것에 대해서 탓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눠 먹으면 된다고 자신의 이득을 나누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역사가 오래된 송상이 조선 제일의 상단이라 생각되었지만, 조만간에 춘봉 상단이 조선 제일의 상단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전 제조께선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송상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곤 하지만, 송상을 배제하고 사행단에 춘봉 상단만 가게 되면 더 많은 이익을 거두게 될 터인데요.”

“가까이 본다면야 대영일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을 송상이 얻어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송상과 만상, 경상, 내상 등등 조선의 상인들이 다 참여를 한다면 조선 전체가 부유해지지 않겠습니까?”

대영일은 개인의 이득보다 조선 전체의 이득을 따져 욕심을 부리지 않는 원종의 배포에 감탄했다.

요동에 새로운 발해를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다.

원종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면 좋겠지만, 이미 조선의 왕과 대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기에 자신의 마음을 내 비춘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분은 잘 모르겠지만. 이 골목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이 길 끝에 처음 가패를 차렸을 때는 주위에 가게가 별로 없었습니다. 다들 물건을 파는 공랑점포만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가패가 4곳이나 생겨 이제는 가패거리라고 사람들이 부를 정도입니다.”

“그럼, 4곳 모두 춘봉 상단이 하는 가패인 것이요?”

“아닙니다. 우리를 따라 송상도 가패를 만들었고, 왕십리의 최부자도 가패를 열었습니다. 4곳 모두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원종의 말에 대영일은 물론이고 고주원도 놀랐다.

“아니, 그럼 그냥 똑같은 가게를 차릴 수 있게 놔둔 것이오? 똑같은 가패를 못차리게 해야 되지 않소? 그냥 놔두면 손해 아니오?”

“손해로 볼 수 있지만, 손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송상의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상권을 키워 그 상권을 나눠 먹자는 것이지요. 지금도 유명하지만, 가패가 두세 개 더 생긴다면 이 거리가 한양의 명물 거리가 될 것입니다. 명물이라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과연 어떻길래 명물이라고 불리는지 구경을 하러 올 것입니다.”

“그렇게 구경 오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레 장사가 더 잘될 수 있다는 말이로군.”

“하하하. 맞습니다. 벌써 한양에 올라온 자는 육조거리 끝의 가패 골목을 꼭 가봐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패 뿐만 아니라, 밥을 파는 사람이나 짚신을 파는 자들도 이득을 볼 것이고, 이 지역 전체가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라로까지 크게 생각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작은 이득에 연연하지 않고 큰 이득을 만들어 나라 전체의 이득이 될 것이라 크게 생각하는 원종의 배포에 고주원도 감복했다.

“그대는 상도의 이치를 깨달은 것 같소이다.”

“아직 배울 것이 더 많아 도를 깨우쳤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참, 그리고 발해방의 도움을 받았기에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새로운 먹거리가 무엇입니까?”

“발해방에서 사 온 밀이 몇백 가마가 쌓여 있으니 그걸로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고주원과 대영일은 새로운 먹거리라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원종을 따라나섰다.

곡식을 보관했던 관흥창 인근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한강 하류로 내려가는데, 파주의 문발 근처에 배가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한강 물로 돌아가는 큰 물레방아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밀을 빻을 수 있는 방앗간을 만든 것 같았다.

“대련에서 구해온 밀이 180석이나 있기에 이것을 갈아 국수를 만들려고 합니다.”

원종은 방앗간에서 밀가루가 빻아지는 것을 보여주곤, 장독 10여 개가 쭉 늘어서 있는 곳을 보여주었다.

“장을 담은 장독처럼 보이지만, 물을 담은 항아리입니다.”

“물을 큰 항아리에 이렇게 담아둘 필요가 있습니까?”

“소금 때문에 그렇습니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데에는 물과 소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짠 바닷물이나 소금물로 반죽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소금물 농도를 맞추기 위해서 이렇게 물을 받아 둔 것이군요.”

“네.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물에 소금을 타는 것이 아니라, 소금물을 퍼내어서 담는 용도입니다. 바다와 인접한 강에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닷물이 올라오고 내려가고 하면서 강 인근 땅에 염분기가 남게 됩니다. 그 염분기가 밀가루 반죽에 쓰기 좋은 간수의 염도와 같습니다.”

원종의 안내로 조금 움직이니 한강 바로 옆에 움푹 들어간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고, 거기서 일꾼들이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소금물을 길어 사흘간 항아리에 담아두어 흙이 가라앉으면 그때 그 물로 반죽을 합니다.”

반죽용이라는 커다란 가마솥에 빻아진 밀가루가 들어갔고, 간수를 넣은 후 가마솥의 뚜껑을 덮였다.

한데, 덮은 가마솥의 뚜껑이 특이했다. 가마솥 아래로는 나무 주걱이 여러 개 달려 있었고, 뚜껑 손잡이가 있어야 할 곳에는 손으로 돌리는 나무 손잡이가 있었다.

“일꾼이 손잡이를 돌리면 간수와 밀가루가 섞이며 반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마솥이 5개나 있었기에 이미 반죽이 끝난 밀가루를 보았는데, 물기가 있어 하나로 뭉쳐진 반죽이 아니라 동글동글하게 점성으로 가루처럼 뭉쳐진 밀가루 반죽이었다.

뭉친 가루 같은 반죽을 덜어 작업대로 올렸는데, 한척(30cm) 폭으로 홈이 파인 작업대 나무판 위에 골고루 올려져 두꺼운 나무 밀대로 밀기 시작했다.

현대의 컨베어 벨트처럼 자동을 돌아가는 것을 만들지 못했기에 밀가루 반죽을 홈에 올리고 그 위에 홈에 들어맞는 롤러 밀대를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방식으로 반죽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척 홈에 맞게 밀가루 반죽이 얇게 눌려 붙으면 롤러 밀대 대신 요철 칼이 만들어져 있는 황동 롤러가 그 홈에 끼워져 쭉 움직였다.

그러자 평평하던 반죽이 얇은 칼질이 된 국수가 되어 버렸다.

“이 황동 밀대의 칼날 선에 따라 국수가 만들어지는 것이구려. 이렇게 국수를 뽑는 것은 내 처음 보오.”

고주원은 밀가루를 반죽하고,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드는 게 금방 되자 신기해했다.

현대에는 국수가 가격이 저렴하고 한 끼 때우는데 편한 간편 음식이었지만, 자동 기계가 없는 이 시대에는 손이 여간 많이 가는 음식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장수를 축하는 환갑잔치나 결혼 잔치에 국수를 먹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들어가야 뽑을 수 있는 것이 국수였기에 일생에 한 번 있는 환갑이나 잔칫상에 정성이 들어간 국수를 올렸던 것이었다.

이렇게 국수가 잔치국수라는 의미로 쓰인 것은 중국 북제(남북조시대 400~600년)의 황제인 고양(高洋)이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고자 잔치를 열며 사람들에게 국수를 대접했는데, 이 잔치에 쓰인 국수가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잔치국수였다.

물론, 이때를 기록한 ‘북사’라는 책에 따르며 이 축하 잔치를 탕병연(湯餠宴)이라 불렀는데, 지금 우리가 먹는 긴 국수가 아니라, 손으로 밀어 만드는 칼국수나 수제비에 가까운 음식이었을 터였다.

이렇게 귀했던 국수가 언제 보편화 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송나라(11세기~12세기)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송나라 때부터 중국 전역에서 밀이 재배되기 시작하여 밀의 가치가 떨어졌기에 일반인들도 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밀이란 작물은 진나라 혹은 한나라 때 서역에서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인 재배는 중원이 안정된 당나라 때부터 밀이 퍼져나가 전역에서 재배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송나라 때에는 쌀, 보리, 조에 이어 4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작물이 되었고, 명나라 시절에는 물이 부족해도 잘 자라는 품종이 북방 전역에서 재배되며 비로소 평민 누구나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곡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밀이 퍼져나가며 국수와 함께 만두도 중원 전역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만든 국수를 팔려면 한양에 가까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걸 들고 다시 한양으로 가려면 힘들 것 같은데.”

대영일은 다섯 개의 가마솥과 홈이 파진 작업 탁자를 보며 계속 만들어지는 국수를 들고 가는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먹는 국수였다면, 여기까지 와서 국수를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이 홈에서 만들어진 국수를 이렇게 들어 말린 국수를 만듭니다.”

원종은 대나무 가지를 홈 아래로 넣어 국수의 중앙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흰 천막 안으로 움직였는데, 뒤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온 고주원과 대영일은 천막 안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큰 천막 안에 세워져 있는 나무 기둥 사이로 국수가 촘촘하게 가득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람에 국수를 말려 언제 어디서든 삶아 먹을 수 있게 말린 국수를 상품화시켰습니다. 보통 사흘이면 국수가 바짝 말라 한지에 포장할 수 있습니다.”

이미 다 말려진 국수들은 한쪽에 누여져 작두로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잘렸는데, 그 잘린 국수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 한지로 포장을 했다.

“이게 대련에서 가져온 밀로 만든 춘봉 국수입니다.”

고주원과 대영일은 한지로 고급스럽게 싸인 국수를 보곤 충격을 받았다.

이 국수 한 묶음만 있으면 집에서 국수를 먹을 때 반죽을 하거나 면을 뽑는다고 틀을 누르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맛은... 맛은 어떻소? 집에서 만든 것만큼 맛이 있소?”

“그럼 바로 이 국수로 한번 끓여 드리겠습니다. 저쪽입니다.”

원종은 두 사람을 데리고 부엌으로 움직였는데, 이미 부엌에는 일꾼 몇몇이 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런 일꾼들을 보던 두 사람은 일꾼들의 앞에 놓여있는 밑반찬도 처음 보는 것 같아 궁금했다.

“저 건 또 무엇이오?”

“아, 저건 단무지입니다. 식초에 절여둔 무이지요. 국수를 먹을 때 같이 먹으면 좋은 반찬입니다.”

< 176. 면식의 시대. (1) > 끝

작가의말

실제 소금이 비싸던 시기에는 강물 옆에 땅을 파두면 바닷물이 올라오며 소금물이 찼습니다.

바닷물 보다는 안짠 소금물이 고이는데, 이 물을 퍼서 항아리에 담아두고 간수로 사용했습니다.

천일염이 퍼진 이후로는 쓰지 않는 방법입니다.

ps:김치가 없을때는 단무지가 국수의 깐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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