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한민족. (2)
“이봐! 등에 짊어지고 내릴 때 뭔가 달라진 느낌이 나면 내게 꼭 말해야 해.”
“나도 알고 있다니깐. 우리도 식겁해서 확인하고 있다고.”
태극 1호 배의 화물 관리자인 털보 만철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배에 실리는 콩을 확인하고 있었다.
동래 내상의 좁쌀 사건으로 큰 곤욕을 한번 겪어보았기에 배에 실리는 화물의 바꿔치기나 상태에 대해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선원들도 겪은 일이 있다 보니 다들 가마니를 옮길 때 일일이 확인하며 옮겼다.
“고 사형. 짐을 옮기는 선원들도 다들 정예 같습니다. 일을 서투르게 하거나 대충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다들 훈련을 받은 병사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역시. 무언가를 획책하는 자인 것 같군요.”
대영일과 고주태는 싣는 곡식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태극호에 올라 배를 이리저리 살폈는데, 배를 살피면 살필수록 이 태극호란 배가 단순한 무역선이 아니라 군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군선인 것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손을 써 무역선으로 가려둔 것 같은 그런 느낌에 대영일과 고주태는 이 춘봉상단의 배후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털보 만철은 곡식이 모두 배에 실리자 원종에게 보고하고 왔고, 그런 만철의 손에는 주머니가 들려있었다.
“도련님이 내일 아침 일찍 출항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살 수 있게 용돈을 주셨다. 다들 줄을 서라.”
“어이쿠, 가족들의 선물까지 챙기게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빗이 특이하기에 하나 사 가고 싶었는데.”
선원들은 생각지도 않은 돈에 기뻐하며 줄을 섰고, 그런 선원들을 보며 대영일은 허실을 파악하기 위해 선원들에게 끼어들었다.
“여인네들에게 줄 선물을 산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바가지 쓰지 않는 집을 알려주고 흥정도 대신 해주겠소.”
“오! 발해방에서 보았던 청년이구만. 이보게들 선물 산다면 어서 이리로 오게!”
대영일은 20여 명의 선원을 이끌고 대련 항에 몇 개 없는 방물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선원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덕분에 저녁이 되자 선원들과 친근한 친구들처럼 어울리게 되었다.
“그럼,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다들 경상우수사라는 해군 진(陣)의 수군이었다는 말이오?”
“그렇소, 우리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늘도 노를 저으며 힘들게 지냈을 거요.”
“도련님이 우리를 수군에서 빼서 선원으로 삼아주신 덕분에 이리 배불리 먹고 가족들을 살필 수 있게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거요.”
고주태나 대영일이 보기에는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선원들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수군을 아니, 병사를 빼서 사적으로 쓰는 것이 수월한 거요?”
“뭐, 대 형제가 있는 이곳 중국은 모르겠지만, 조선은 사실 군역을 지고 있는 자들을 빼는 게 아주 어렵네. 헌데, 우리 도련님이 당상관의 관리이기도 하고, 전하의 총애를 받으시다 보니 우리를 선원으로 쓸 수 있게 빼주신 거네.”
“우리의 은인이시지.”
“암, 그렇고 말고, 정말 그 풀을 엮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그 사자성어처럼 우리가 받들어야 해.”
“맞아.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 가족들 선물을 사라고 용돈까지 주는 어르신이 어디 있나. 우리가 정말 대운을 맛난 것이야.”
별것도 아닌 수군에서 선원이 된 것이 아주 큰 은혜를 입은 것이라며 결초보은(結草報恩)해야 한다고 선원들이 입을 모으자, 대영일과 고주태는 선원들의 이런 충성심이 의아할 뿐이었다.
“대 공자님. 저들은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라, 마치 사병(私兵)과 같은 느낌입니다. 더구나 제조라는 당상관의 벼슬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춘봉상단이라는 자체가 조선 조정에서 요동 땅을 수복하기 위해 만든 그런 조직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의 친형이 의주를 벗어나 동항이란 곳에 상관을 만들리라는 것까지 생각하니 딱 맞아떨어져. 그러면서 치즈란 것을 만들어 여진인들까지 포섭하려는 것 같은데 그림이 아주 큰 것 같아.”
“네. 조선이 요동 땅을 가지기 위해 아주 체계적으로 밑바닥부터 다져 올리려는 것 같습니다.”
“흠. 그래서 내일 배가 떠날 때 나도 배에 올라 조선으로 가볼 생각이네.”
“네? 조선으로요? 그건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하십니다.”
“위험하더라도 가야겠어. 나중에 우리가 일어설 때 내가 현장을 모르면 쓰겠나? 직접 조선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이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적으로 삼아야 할지를 결정하고 싶네. 밑 작업하는 것 같은 저자들에게 접근하기에는 지금이 최고의 기회라 생각하네.”
고주태는 이미 결심한 것 같은 대영일을 보며 그의 마음을 돌리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추진하는 그의 성정을 알기에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소인도 같이 가겠습니다. 조선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몇 개월에 한 번씩 보았을 뿐이었는데, 저도 살아 있는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춘봉상단이 있으니 송악의 상인들과 맺은 계약을 손 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 일도 살펴봐야 하겠구만. 그럼 내일 배를 태워달라고 이야길 하러 가세.”
***
“산동의 위해 항에는 아직도 신라방이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발해방보다 신라방 사람들이 더 많네. 항주나 다른 곳의 신라방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위해 항은 상대적으로 크게 번성하지 않아 지금까지 신라인들이 뭉쳐 있네.”
원종은 무역 루트를 만들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거래처를 만드는 것이 짧은 시간에는 안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민족인 신라 사람들의 후예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중국인들과 거래하기보단 신라의 후예들과 거래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몇백 년을 내려온 이들이니 신용과 신뢰는 있겠군요.”
“그렇지. 그쪽도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조선과 교역을 하고 싶어 할 거야. 내가 가서 신라방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네. 다만, 춘봉 상단이 태풍을 피해 대련으로 왔다가 다시 태풍을 피해 위해 항으로 가는 것은 좀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고주태의 말에 이미 꼼수가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물었다.
“대련을 출발한 이후로는 태극 선단이 조선의 배가 아닌 대련 발해 방의 배가 되면 되는 것이네. 그러면 위해 항에 입항할 때도 외국의 배가 아니라 중국의 배로 인식되어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네.”
고주태는 중국 항에 입항할 때 쓸 수 있는 표기와 문서를 우리에게 내주었는데, 아마도 현위로 있는 고주원처럼 발해인 관리가 이런 증서를 만들어 준 것 같았다.
대련에는 항구를 맡은 고주원이 있으니 대련에 오는 것은 아마도 문제가 없을 것이고, 이렇게 대련에서 만들어 준 정식 서류와 표기를 내세운다면 위해 항에서도 아무 문제 없이 교역이 가능할 것 같았다.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이겠지만, 자주 교역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겠지요.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내 사제가 위해의 신라방을 소개해주고 같이 조선으로 가볼까 하는데, 배에나 좀 태워주시게나.”
“그런 것이야 언제든지 됩니다. 아예 정기적으로 무역선이 왕복하게 되면 발해 방의 사람들이나 신라방의 사람들을 태워 조선을 둘러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출항할 때 수행원들과 함께 오겠네.”
***
다음 날, 고주태와 대영일이 4명의 동행인을 데리고 왔다. 원종이 보기에도 이 4명은 금산이 처럼 몸이 탄탄한 것이 호위 무사의 느낌이 들었다.
고 씨와 대 씨는 고구려와 발해의 왕족들 성씨이니 이런 호위 무사들이 당연히 붙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토 달지 않고 배에 태웠다.
대련을 떠나 바다 위에서 배의 표기를 바꾸어 달고 산동반도의 위해 항으로 들어가니 고주태의 말처럼 중국의 배로 알고 쉽게 접안이 가능했다.
이후 고주태의 소개로 신라방 사람들을 만났는데, 신라방 사람들은 발해 방 사람들보다 더 한국말을 까먹은 상태였다.
외부의 변화가 작던 요동에 비해 산동은 그 변화가 심했고, 원래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본 집단이라 명나라 이후 해금령으로 인한 불황으로 신라방을 떠나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마도 원 역사대로라면 이렇게 천천히 해체되어 사라졌을 신라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국 사회에 스며들어있는 한민족이 있으면, 교역을 하기가 수월해질 수 있었기에 신라방의 유지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거래처를 만들기 위해 신뢰 가는 상인을 만나 이리저리 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고, 판로를 따로 개척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었다.
물론, 신라방 신라의 후예들도 본토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와 교역할 기회가 생겼기에 서로가 이득이니 쉽게 배신은 하지 않을 터였다.
위해가 대련에 비해 밀과 쌀이 저렴했기에 100석씩 사서 배에 실었고, 다시 대련으로 돌아간다고 알리고는 황해를 가로질러 강화도로 향했다.
수군이었던 이들이 별자리로 방향을 잡았지만, 고주태가 육분의(六分儀)를 사용해 강화도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잡아 주었다.
“관흥창 포구로 배를 대어라.”
관흥창 인근에 있는 신숙주의 창고에 싣고 온 곡식을 우선 놔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배에서 내리자, 일전 관흥창 조운 운송일로 안면이 있는 관리가 나왔는데, 관흥창에서 나온 관리들의 옷이 모두가 흰색인 관복을 입고 있었다.
한양을 떠나 의주로 향할 때 양력으로 1469년 12월 15일이었는데, 20여 일이 흘렀으니 양력으로는 1470년이었다.
그리고 예종은 양력으로 1469년 12월 31일 승하했고 바로 그날 잘산군이 조선의 성종으로 즉위했을 터였다.
이제까지 유례없던 왕이 승하한 바로 그날 즉위한 왕이 나온 것이었다.
***
“근래 분추경리(奔趨競利) 하는 소인배가 많아져 권문세가의 집 문턱이 닿을 정도라는 말이 들리고 있네. 공과 사는 엄연히 분리해야 하는 법이니 앞으로 세력에 기대어 청탁으로 관직을 외람되게 주고받게 된다면, 종친이나 공신, 재추(고위 관리)라 할지라도 즉시 잡아들여 수사하고 죄를 물어 족주(族誅 멸문의 다른 말)할 것이네.”
분추경리란 급히 뛰어다니며 서로 겨룬다는 뜻인데, 이는 관직을 사냥하듯 한다는 엽관(獵官) 짓 하는 이들을 놀리는 말이었다.
즉, 예종은 한명회와 신숙주 같은 노신들에게 아첨해 관직을 얻으려는 자들이 많으니 이제 그런 관직을 사고파는 일을 잡아내 멸문까지 시키겠다고 경고를 날린 것이었다.
하나, 멸족까지 시키겠다는 형벌은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구성군)과 우의정인 김질이 나서 멸족의 벌을 본인만 극형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주청 드려 겨우 멸족은 막아 내었다.
이 분추경리를 금하라는 예종의 명은 즉위한 지 석 달 만에 나온 것으로 대 놓고 대신들이 가지고 있던 관직 임명권을 빼앗겠다고 경고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흘 후 예종은 대신들에게 경저인(京邸人 혹은 경주인)을 거느리지 말라고 다시 명을 내렸는데, 경저인이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관리하거나 공물이 올라오지 못할 때는 한양에서 대신 구해서 납부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공납으로 장난질 쳐서 이득을 보는 자가 경저인이었다.
그들이 얻는 공납의 이익이 원 공납 물품의 몇 배에 이를 정도로 공납과 경저인의 폐해가 심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대신들이 자신의 고향이나 자신이 근무했던 근무지와 연계하여 집안의 종을 경저인으로 두었기에 이런 경저인을 두지 말라는 소리는 부가 수입을 얻을 방법을 잘라버리겠다는 경고였다.
그리고 왕명을 어겨 경저인을 두는 이는 능지처참하겠다고 명을 내렸으니, 예종은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훈구대신들의 관직에 대한 영향력과 경제권을 빼앗아 힘을 약화시키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주상이. 옛 진나라의 악법을 설법한 법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듯하여 참으로 근심 걱정이 쌓이고 있소이다. 어찌하면 좋소이까?”
“장인인 청주 부원군 한 대감이 나서 주셔야 하오.”
청주 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은 한명회와 같은 청주 한씨였지만, 예종의 정비였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가 죽고 이후 청주 한씨 집안에서 맞는 딸이 있다고 하여 한명회가 추천하여 장인이 된 자였다.
그러다 보니 관가에서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관인들 사이에서도 기를 펴지 못하는데, 사위인 예종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 담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허허허. 다들 순리대로 일이 돌아갈 수 있게, 주상전하의 명을 따르도록 하시오. 그러면 순리대로 될 것이오.”
보다 못한 한명회가 나서자 경저인을 없애라는 명에 항의하고자 모인 관리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일어섰다.
하지만, 좀 더 유한 신숙주에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방을 나섰다.
“주상전하가 피 끓는 나이이기에 제왕으로서 위엄을 떨치시고 싶으신 게지.”
“그럼, 그냥 이대로 우리 팔, 다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것입니까?”
신숙주가 다른 대신들을 대변하듯이 물었다.
“누가 보고 있겠다고 했나? 젊은 혈기로 실수하기를 기다릴 뿐일세.”
한명회는 자신들 훈구파의 팔다리를 잘라내며, 젊은 혈기로 자신의 팔다리도 잘라내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의 팔다리였던 남이와 구성군 이준이 역모로 죽고 귀양을 가자, 그제야 예종의 팔다리가 떨어졌다는 듯이 한명회가 나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