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요동의 옛 주인.
초원의 야인들은 농경이 아니라, 목축이 생업이었다.
양과 염소가 더 이상 먹을 풀이 없다면 풀을 찾아 떠돌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사료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동하게 되면 그만큼 환경이 달라져 균등한 품질의 치즈를 만들어 내는 것이 힘들 터였다.
그리고, 치즈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소금과 맑은 물을 구하는 것만 해도 강을 끼고 있지 않은 한은 힘든 조건이었다.
결국, 한곳에 정착해 우유를 생산하고, 치즈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소가 먹을 건초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형님. 그럼,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요동이 밭농사하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힘들 것이다. 우선은 여기가 우리 땅이 아니다. 명의 영토이면서 여진인들의 땅이다. 뭐, 어떻게 보면 우리 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땅이다. 동항의 경우처럼 상관을 지어 장사를 하는 것과 땅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흠. 그럼, 정주하겠다는 여진인들이 농사를 짓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가 생각하기에 여진인들이 농사를 짓겠느냐?”
“아마도, 하지 않겠지요. 여진인들의 한계는 이런 낙농업을 하며 정주하는 것이 한계일 겁니다.”
“잘 아는구나. 세종대왕께서도 국경의 여진인들을 받아들였을 때, 여진인들에게 성을 주고 농사를 시키려고 하셨다. 하지만, 다들 농사를 짓지 않았지. 저기 김고도개처럼 광산이나 다른 일은 해도 농사는 짓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느냐?”
“농사를 짓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까?”
“그래. 여진인들은 물론이고, 다른 평원의 민족들은 농사를 짓는 자를 자신의 아래로 여긴다. 자신들이 말을 타고 언제든 약탈할 수 있는 먹잇감 비슷한 하층 민족으로 보는 것이지.”
“그렇다면, 자신들이 아래로 여기고 늘 약탈했던 사람들처럼 농사를 짓게 되면 자신의 계층이 아래로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군요.”
“그렇다. 그래서 야인들을 정주시키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치즈라는 것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정주하더라도 목축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여진인들을 땅에 정착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흠. 그렇다면 이걸 조정에 상신하면 되겠군요. 치즈로 여진인들을 정주시켜 국경을 안정화할 방법을 알아냈으니 북방을 개척할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유민들에게는 집과 땅을 준다고 해서 개척민을 받으면, 농사로 나오는 건초로 소와 양을 먹일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이미 예전에 다 해보았던 정책이다. 하지만, 북방에 정상적으로 정착한 이들이 몇이나 되더냐?”
형의 말을 듣고 보니, 한양에서 내가 거두었던 함덕일가가 떠올랐다.
그들도 북방 개척민으로 북방으로 갔었지만, 정착에 실패하고 결국 유랑민이 되어 거지처럼 떠도는 이들이 되었었다.
“후. 뭐가 될 듯하면서도 되는 것이 없군요. 이 넓고 평평한 땅을 쟁기로 파 뒤집어 물이 부족해도 잘 자라는 콩이나 녹두 같은 것을 심으면 될 것 같은데. 그걸 할 사람이 없다니.”
콩이나 녹두를 심고 그 사이로 상품작물처럼 소와 말들이 좋아하는 풀을 따로 심는다면, 농사하며 건초를 같이 생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작물들 사이로 가축에게 먹일 풀을 따로 재배할 수 있게 북방 이주민을 요청한다고 글을 올리면, 미물을 위해 사람이 곡식을 재배하는 것은 역천(逆天)이라고 여길 터였다.
나를 삭탈관직해야 한다고 대신들이 들고일어날지도 몰랐다. 짐승에게 먹이고자 사람이 먹지 못하는 작물을 인간이 재배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터였다.
“우선은 여진인들이 겨울을 넘길 수 있게 식량을 조달하고, 북방의 땅에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을 찾아보겠습니다. 형님은 의주를 벗어나 동항 쪽에 자리를 잡으십시오. 이제 동항이 교역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흠. 네가 확실하다고 하니 그렇게 하긴 하겠지만, 과연 배를 타고 교역하는 것이 풀리겠느냐?”
“네. 조만간에 풀릴 것입니다.”
원길은 원종의 확신에 찬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틀린 적이 없는 동생이었으니깐.
***
무찰라타 일족의 여진인들과 서남쪽으로 움직여 동항으로 돌아가는데, 말을 타고 가면서도 중국과 조선의 교역을 육지로만 할 수 있게 해금령(海禁令)을 내린 명나라의 홍무제와 영락제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영락제는 두 배로 욕을 했다. 그가 명의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북원을 견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는데, 식량 생산량이나 경제 규모를 따졌다면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을 천도였다.
중국도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화북 지방의 경제 규모와 인구가 강남보다 월등하게 컸었다.
하지만, 원나라를 거치고 원명 교체기 전란으로 화북은 초토화가 되었는데, 덕분에 모든 재화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강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총생산량이나 인구, 경제 규모가 커진 강남의 세력들을 등에 업고 홍무제가 명을 건국했고, 영락제는 북경지역을 자신의 봉토로 받았다.
이후 정난의변(靖難之變)을 거치며 황제가 된 영락제는 남경을 기반으로 한 건문제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옮겨 버렸다.
여기에는 남경에서 개봉까지 이어진 운하로 강남의 곡식을 화북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생각하면 남경이 그대로 수도였다면 운하가 필요 없었을 것이고, 남경은 성 근처까지 배가 들어갈 수 있었기에 육로가 아닌 배로 명나라와 교역을 했을지도 몰랐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더라도 배로 남경으로 갔다면 자연스레 배를 통한 무역도 이루어졌을 터였다. 그렇게 자연스레 배로 교류를 했다면 해상 관련 기술도 같이 발전하여 어쩌면 아시아에서 먼저 대항해시대가 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운하를 믿고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를 했고, 그에 따라 모든 군병력이나 행정력이 화북으로 옮겨가게 되니 왜구들과 해적들이 설칠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 왜구와 해적들을 억압하고자 해금령을 내려 아예 원양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 버렸는데, 이 해금령이 아시아가 확장될 기회를 가로막아 날려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조선도 배를 이용하지 못하고, 매번 의주를 통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 육로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교역의 규모가 커지려야 커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자기들은 운하로 물건을 옮기며 꿀을 빠는데, 우리는 산 넘고 물 건너가다 보니 물류가 막혀 동맥경화가 조선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막힌 물류의 흐름을 어떻게든 뚫어내야 했다.
동항에서 무찰라타의 일족과 그 근방의 여진인들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배 위에서 흥정해서 판매했다.
여진인들에게는 좁쌀을 넘기고, 새털이 들어간 나이기온 때문에 팔리지 않은 털가죽과 그들이 중국에서 얻은 은을 대신 받아 챙겼다.
배 위에서 상행위하는 편법에 대해 명나라의 상인이나 관리가 와서 따지면, 배는 조선의 배이니 배 위도 조선의 땅이라고 말싸움을 하려고 했는데, 그런 명분을 따질 만큼 애국심이 넘치는 명나라 사람도 없었고 관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조선의 곡식 시세가 싼 편이 아니었기에 여진인들과는 크게 남는 교역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저 동항 인근의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물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알리고 자주 보자는 약속을 하며 대련으로 움직였다.
***
“응? 저기 배가 들어오는데, 저건 어디의 배지?”
“두 척이고 깃발이 제대로 달려 있으니 왜구 잡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깃발이니 현위(縣尉 현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 어르신께 알리도록 해!”
요동 반도의 끝부분에 있는 대련 항에 처음 보는 깃발을 단 큰 배 두 척이 들어오자 항구의 작업자들이 급하게 현청에 알리기 위해 뛰어갔고, 머지않아 20여 명의 병사가 항구로 달려왔다.
“조... 선국 춘봉상단? 깃발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맞나?”
“맞는 것 같습니다요.”
“조선의 배라고? 조선의 배가 무슨 일로 온 것이지? 해금령으로 인해 조선의 배는 올 수가 없을 것인데.”
대련 항의 관리들은 이 두 배를 항구에 접안시키기 위해 작은 배를 띄워 보냈고, 안내를 받은 배는 무사히 대련 항에 정박을 했다.
“태풍을 피해 움직이다 보니 대련항으로 오게 된 춘봉 상단입니다.”
배에서 내린 원종은 역관에게 배운 중국말로 태풍을 피해 왔다고 이야기하며 싱긋이 웃었다. 12월 겨울에 태풍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멋쩍어서 웃은 것이었다.
“태풍을 피해 왔다라. 그럼 언제 떠날 것이오?”
관복을 입은 이가 나서서 말을 하였는데, 가타부타 인사말도 없이 언제 떠날 것인지를 물어보았는데, 일이 잘 풀리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자만 보급하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허락하지. 대신 항구에서 사고를 치게 되면 치도곤을 당할 것이니 조심하게.”
뇌물이라도 바쳐야 하나 고민했는데, 항구의 관리는 경고만 하고 물러났다. 쫓겨나지도 않고 교역까지 허락받은 것이라 잘 풀린 것 같았다.
관리가 물러나자 항구의 상인 두세 명이 다가왔다.
“조선에서 왔으면 고려 인삼이 있소?”
“그 상앗빛이 난다는 도자기 본자기라는 것이 혹시 있소?”
“가지고 있는 물품이 뭐가 있는지 알려주시오!”
상인들과 흥정하기 시작하는 조선의 상인을 보곤 현위 고주원은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그가 생각하기에 태풍을 피해 왔다는 말은 그저 핑계로 보였다.
설령 먼바다에 태풍이 있어 피해 왔다고 치더라도 배들이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상인들과 기다렸다는 듯이 흥정을 하는 모습에 해금령을 어겨가며 교역하러 온 덕없는 장사꾼이라 여겼다.
“아니, 주태 형님은 또 무슨 일입니까?”
“조선에서 상단이 왔다고 하기에 온 것이지. 저기 있구나. 나중에 보자.”
자신의 형인 고주태도 뛰어온 것을 보면 상인들에게는 조선의 배가 온 것이 꽤 화제인 것 같았다.
***
“아니,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어찌 여진인들이 파는 가죽을 들고 온 것이오? 조선의 특산품인 인삼이나 붓, 종이는 없소?”
“하하하. 조선의 영토인 의주에서 여진인들과 교역을 하고 태풍을 피해 온 것이다 보니 여진인들에게 구매한 것들밖에 없소이다. 다음에 올 수 있다면 다음에는 조선의 특산품을 가져오겠소이다.”
대련의 상인들은 조선의 특산품은 없고, 여진인들의 물품만 있자 실망을 했지만, 여진인들의 가죽을 사서 북경으로 가 팔면 나름의 이득은 나왔기에 거래를 이어 나갔다.
“태풍을 피해 이곳에 온 김에 곡식을 구매해 가고 싶은데, 올해 이 지역의 곡물 가격은 어느 정도입니까?”
중국말로 흥정을 하다 보니 더듬더듬하며 이야길 했는데, 어디선가 조선말이 들려왔다.
“콩과 밀, 호박은 꽤 작황이 좋소이다. 어느 정도 구매할 거요?”
한눈에 봐도 조선사람이라는 느낌이 나는 한복을 입고 조선 말로 이야길 했는데, 대련에서 한민족 상인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발해 사람 고주태요. 곡식은 얼마 정도나 필요하오?”
발해 사람이라는 말에 같은 동포라는 생각이 들어 친근감이 들었다.
“저 두 척의 배에 가득 실을 정도가 필요합니다.”
“오, 그렇다면 대략 800석 이상이 필요하다는 건데, 지급은 뭘로 할거요?”
“북경에서 화제라는 본자기가 있는데, 그거면 되겠습니까?”
고주태와 한국말로 이야기를 했지만, 중국 상인들도 본자기라는 말은 알아들었기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본자기? 본자기가 있다고?”
“내가 사지 그 본자기!”
“어허, 여기선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은데 우리 집으로 가겠소?”
“여진인들에게 산 가죽을 다 팔게 되면 가겠습니다.”
“그거 내가 다 곡식값으로 사 주겠소. 갑시다.”
다른 상인들과 경쟁을 피하고자 집으로 부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원시원하게 가죽을 다 사고 800석 넘는 곡식을 팔아줄 수 있다고 하는 그의 배포 큰 말투에 호감이 생겼다.
중국 상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삼식이와 함께 고주태란 발해인의 뒤를 따랐다.
외국 나가면 같은 한국인을 믿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도 왠지 발해 사람이라고 해서 믿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