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선봉장이 되어주시오. (3)
“어서 오시오. 내 전 제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이리 연소(年少)할 줄은 몰랐소.”
송상이 왜인들에게 본자기를 모두 팔고 나자 잔치를 열었기에 참석했는데, 동래 부사 김상국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었는데, 송상에게 받은 세금이나 뒷돈이 많은지 아주 기분 좋아 보였다.
“전 통사랑(通仕郎)의 아우라고 미리 이야기했으면 좋지 않았소.”
“동생이 아직 술을 못 마셔 그런 것이니 부사께선 저와 한잔하시지요.”
“허허. 술을 못 먹으면 아직 사내가 아니지. 그럼 전 통사랑과 한잔 마셔볼까. 꺼억~.”
다행히 작은형이 술 상대로 나서 주었는데, 이미 천자문을 받으러 다니며 안면이 있다 보니 나를 대신해 많은 관리들과 어울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희재에게 받은 정보대로 송상에게서 본자기를 산 왜인들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물텀벙이 탕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게 숙취에는 아주 좋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술에 취해 겨우 일어난 관리들은 뽀얀 아귀 국물을 맛보았다. 은은하게 식초 향이 들어간 국물에 속이 풀리고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자, 아주 기분 좋아하며 국물을 들이켰다.
“이런 술국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내 속이 쓰려 고생했던 과거가 없어졌을 거네. 아주 속이 편해졌어. 여봐라! 청주 한잔 내어오거라! 이런 시원한 국물에 술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느냐.”
분명 일과가 있을 터였지만, 동래부사 김상국과 관리들은 아귀탕에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헌데 왜인들은 다 간 것이냐?”
“네이. 내일 바로 왜로 돌아간다며 오늘 짐을 꾸려야 한다고 돌아갔습니다요.”
“하긴, 왜국이 지금 한창 세력다툼을 한다고 하니 어서 가서 물건을 팔고 싶겠지.”
“부사께선 들은 것이 있습니까? 그래, 어느 가문이 가장 강하다고 하더이까?”
동래 부사 김상국과 관리들은 술을 마시며 왜가 돌아가는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원종은 쇼군의 후계문제로 10여 년간 이어지는 오닌의 난이 작년부터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오닌의 난이 대충 10년간의 전쟁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고, 하극상의 시대인 전국시대로 접어드는 이정표와 같은 전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충 어느 가문이 득세하고 했다는 것은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노부나가니 이에야스니 하는 알려진 애들은 아직 나오려면 한참 남았고, 조총이 전래하기까지도 70~80년이나 남았으니 혼란한 왜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렇게 잔치가 파하자, 동래의 관인들과 어울리며 통교를 넓히던 형은 아들을 위한 천인 천자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잔치에 책을 올리기 위해 문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도련님. 배들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요.”
태종대 전망대가 들어서 있던 곳에 평상을 설치하고 누워 있으니 여러 이름이 쓰인 깃발을 휘날리는 배들이 태종대 아래에 정박하기 시작했다.
배에선 왜인들이 내렸는데, 우릴 보고 위로 올라왔다.
“희재 공만 보다 드디어 상단주님을 뵙는 홍복(洪福)을 누리게 되었군요.”
“대내가(大內家)에 적을 두고 있는 요로치라고 합니다.”
“대마도 종가(宗家)의 무라야마입니다.”
“나라의 법이 지엄하다 보니 이렇게 조선을 떠나는 날에나 제대로 보게 되는구랴. 다들 앉으시오.”
왜인들은 송상에게 본자기를 산 후 왜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송상의 잔칫날 전달한 쪽지를 받고 왜인들이 온 것이었다.
왜인들을 따로 만나거나 하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색리들의 눈을 피해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저는 송상 최한 공에게 본자기 한 조를 천은 42냥에 구매를 하였는데, 춘봉상단에선 송상에 25냥에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 조에 35냥까지도 쳐줄 수 있으니 다음에 들여오는 본자기는 개시를 거치지 말고 바로 우리와 거래를 하심이 어떠하오이까?”
“이렇듯 바다에서 만나 세금 없이 거래하는 것에는 나도 찬성하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물건이 부서질 수도 있고, 배가 가라앉아 큰일이 날 수도 있지 않겠소?”
원종의 말이 은근한 거부의 말로 들리자 왜인들은 난감해했다.
“그럼, 상단주님은 다른 좋은 복안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원하는 거래 방식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시지요.”
“내가 대마도로 직접 가겠소.”
“오오! 그 말이 정말이시옵니까?”
왜인들은 조선의 상인이자 조정의 관리이기도 한 춘봉상단의 상단주가 직접 대마도로 오겠다고 하니 놀라는 눈치였다.
조선의 관리가 통신사의 일로 대마도를 거쳐 가는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사적인 일로 찾아오겠다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마도만 가는 것이 아니오. 저기 대내가(大內家) 소속의 상인도 있듯이 대마도만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소. 오늘 이곳에 온 상인들이 소속된 가문에는 될 수 있으면 내가 직접 찾아가도록 하겠소이다.”
“오! 그렇다면 통신사로 오시는 것이옵니까?”
“아니오. 내 개인적인 사무역을 위해 갈 것이오.”
“저... 그러면 그것은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문제가 있을 터인데...”
“그대의 말처럼 지금은 불법이 맞소. 하지만, 조만간에 합법이 될 것이오.”
왜인들은 조만간 사무역이 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냥 저잣거리의 시정잡배가 하는 소리였다면 그런가 하고 듣고 흘렸겠지만, 당상관이라는 높은 관직을 가진 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기에 쉽게 듣고 흘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조정실권자의 사위이기도 했으니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물론, 내가 합법이 된다는 소리였지, 너희들까지 합법이 된다는 소리는 아니니 헛물켜진 말아라.’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갔을 때 그대들의 소개로 왔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주고 가시오. 상인이라는 직업상 늘 가문 영지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음. 그렇지요. 저는 제 표식을 드리겠습니다.”
나무로 만든 호패 비슷한 것에 실을 감고 그 위에 이름이 쓰인 통행패를 한 명이 내밀자 다른 이들도 통행패나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물건들을 꺼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춘봉상단을 초대한다는 서찰까지 급히 써서 내밀었는데, 다른 상인들도 그런 초대장을 써 주었다.
본자기의 무역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조선의 관리와 상인들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수완을 보여줄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고맙소이다. 본자기가 다시 들어오면 내 직접 찾아가겠소이다.”
방문해서 본자기를 팔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삼식이가 가지고 온 명나라의 비단실도 저렴하게 팔아주자, 왜인들은 기뻐하며 배를 타고 떠나갔다.
그런 배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희재야. 이 태종대가 왜 태종대인 줄 아느냐?”
“무슨 신라의 왕이 와서 뭘 했다고 해서 태종대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요.”
“맞다.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여기서 활도 쏘고 연회를 베풀었기에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이야기도 있다. 태종 무열왕 때 수군을 풀어 왜구들을 박멸하고, 왜구의 땅까지 쳐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태종 무열왕이 수군을 치하하며 머물렀기에 태종대라고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오, 세종대왕님처럼 왜구들을 혼꾸멍내주신 좋은 분이셨군요. 어쩐지 저 멀리 대마도가 딱 보이는 것이 여기서 수군을 치하하기는 딱 좋은 것 같습니다요.”
희재에게 태종대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사실 태종 무열왕의 일본 원정은 조선 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란 책에만 나오는 검증되지 않은 야사와 같은 이야기였다.
다만, 신라 말기 먹고살기 힘든 신라인들이 신라구(寇)가 되어 2,500명이 100여 척의 배를 타고 규슈지역을 휩쓸며 약탈을 벌였던 것은 일본 역사서에도 남아 있는데, 그 이야기와 섞은 것이었다.
그 신라 해적 중에서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는 이가 있었는데, ‘현춘’이라는 자였다.
그는 해적질하다 포로로 잡혀 심문을 받을 때 자신들이 신라 왕이 파견한 부대 중에서 일부라고 증언을 했는데, 이런 사실이 일본기략, 부상략기라는 일본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현춘이란 신라구가 진짜 신라 왕의 왕명에 따라 왜를 공격한 것인지 아니면, 왕명을 사칭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 4차례나 대규모의 신라구에 구마모토현까지 약탈당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이걸 시대가 좀 다르지만, 무열왕과 엮는다면 그럴듯한 역사가 될 터였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예전부터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우기기에 쓸 수 있는 소스가 될 것이었다.
내게 그런 일을 하라고 무사히 규슈에 들어갈 수 있게 통행패나 초대장까지 상인들이 챙겨주었으니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는 상인들의 배가 내게는 선봉에 선 선봉장의 배들로 보였다.
***
“호주가 좀 더 남쪽에 있었나. 흐음.”
따로 두껍게 만든 종이에 지도를 그렸는데, 전문적인 지도에 비하면 조잡했지만, 이 시대의 지도들에 비하면 그 정확도가 독보적일 듯했다.
특히나 조선을 중심으로 일본, 중국, 아시아의 모습을 그렸고, 아프리카와 북미, 남미까지 그려 넣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언년이나 진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옵니까? 만국도를 얼핏 한양에서 보았는데,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습니다.”
“허허. 진기야.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사는 곳이 지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배를 타고 아주 멀리 나가게 되면 중국보다 땅이 더 큰 나라도 있다는 걸 명심하거라.”
진기는 땅이 여러 개로 흩어져 뿌려지듯이 가로로 긴 지도가 엉터리 같으면서도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고, 그런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이 좋았다.
“그 선은 무엇입니까요?”
“지도에도 위치를 나타내는 숫자가 필요한 법 아니겠느냐? 가로 세로로 숫자를 매겨 가로로 88, 세로로 55의 위치에 있다고 하면 지도로 바로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오. 맞습니다. 단순히 중국 남부라고 하기보다는 숫자로 가로 세로를 부르면 대충 어디쯤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런 숫자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각 지역을 직접 탐사해서 기준이 될만한 곳을 그려 넣고 하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이렇게 그린 지도를 나무로 파서 목판화 시켜 찍어내는 기술도 중요하고.”
“아아! 나무로 지도의 목판을 만들어 찍는다면 그 목판에서 찍어낸 지도는 모두 다 같으니 오차가 없겠군요. 대단합니다. 지도를 목판으로 찍어낼 생각을 하시다니.”
“하지만, 이런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만의 비밀이다. 지도란 물건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편리하지만, 지도가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침략의 길을 알려주는 정보가 되니 보관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나, 그런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경을 칠 수 있으니 이런 지도가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
“네. 형님.”
“이런 지도가 있어야 나중에 배를 타고 왜로 가고 중국도 가고 할 수 있으니 그림을 잘 그리는 화원과 목판을 잘 만드는 목장이 있거든 내게 이야길 하거라. 그 사람들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비밀스럽게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네. 형님.”
진기와 언년이에게 지도를 그리고 위도와 경도를 보는 법을 알려주며 비밀로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이 대두되며 현감으로 부임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지도를 만드는 것이 될 만큼 지배계층의 지배를 위해 지도가 사용되게 되지만, 조선 초기인 지금은 개인이 지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도 있었다.
“나으리! 거제도에서 군선이 왔습니다요. 동래에 두 달마다 오는 정기선이 도착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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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조선 통신사는 공식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선조 때 간 것을 1대로 여기고 이후 1811년 12대까지가 공식적인 조선 통신사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 태종 때부터 통신사가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세종 시절 대마도와의 무역 협정을 나타내는 계해약조(癸亥約條)는 왜에 통신사로 다녀오던 첨지중추부사 변효문이 대마도 도주 소 시게모토(宗成職)와 맺은 협정인데, 임진왜란 이전에도 통신사가 자주 왕래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선조 이전의 소규모 통신사들도 정리해서 나와 있으면 좋은데, 조선 통신사에 대해서는 다들 임진왜란 이후의 통신사로만 규정해서 정리되다 보니 참으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