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뒷주머니를 차다.
즐거운 연회 분위기가 싸해졌다는 게 원길도 느껴졌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소인이 듣기 싫은 말을 눈치 없이 한 이유가 있사옵니다. 여길 봐주십시오.”
원길은 오리를 손질하고 있는 숙수에게 다가갔다.
“북경의 오리구이는 이렇게 껍질만 먹고 살을 먹지 않습니다. 오리 껍질의 식감을 위해 조리한 요리이기에 그 속살은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길은 껍질이 벗겨진 오리를 높이 들었는데,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껍질이 없어진 오리는 회색 흙탕물을 뒤집어쓴 고기 뭉치처럼 보였다.
“이렇게 맛있는 껍질만 먹고 살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민초들이 알게 된다면, 관리들이 민초들의 껍질을 벗겨 먹는 것과 같다며 이 요리를 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요리에 미사여구를 붙이신 귀비마마께도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맛없는 오리 살도 평판을 위해 꾸역꾸역 먹으란 것이냐?”
“먹기는 먹되, 맛있게 만들어 먹으면 되는 것이옵니다. 오리고기를 잘게 썰어 장명면 국수에 고명으로 올리는 것은 어떠십니까?”
원길은 껍질이 벗겨진 오리의 살을 칼로 저며내었고, 저며진 살을 식어가는 장명면 국수 위에 올렸다.
그러곤, 참깨를 듬뿍 집어 맨손으로 비벼 위에 뿌렸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뜻만 가지고 있던 장명면 국수가 그럴듯해 보이는 오리고기 국수가 되었다.
“이렇게 국수 위에 오리고기를 올리게 되면, 고기의 낭비가 없어지니 앞으로는 오리요리를 할 때 면 요리도 같이하여 여럿이 나눠 먹는다는 이야기를 붙이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그것이 소인이 아뢴 ‘합일의 음식’이라는 이름에 알맞은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요?”
만귀비는 민초의 껍질을 벗겨 먹는다는 말에 화를 내려 했지만, 이야길 듣고 보니 후대까지 이어질 음식과 미사여구에 가장 알맞은 내용 같았다.
거기에 더해서 자연스레 남경 상인들이 올린 장명면과 북경 상인들이 올린 오리구이가 서로의 약점을 채워준다는 교훈까지 내포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알맞았다.
“남경에서 만든 면과 북경의 오리구이가 합쳐져 하나의 음식이 되었으니 네 말처럼 합일의 음식이 맞겠구나.”
만귀비가 이리 말을 하니 장명면을 올려 체면을 구긴 남경 상인들의 얼굴도 펴지기 시작했다.
“장명면을 다시 해오거라. 합일의 음식이라는 말에 맞게 두 음식을 같이 먹겠다!”
음식을 다시 만들어오는 시간 동안 원길은 오리고기를 저며서 달걀 물과 간장을 발라 제대로 고기를 구워 고명으로 만들어 내었다.
양념이 제대로 배여 올라간 오리고기 고명은 만귀비도 마음에 들었는지 남기지 않고 먹었다.
“이 둘을 같이 먹으니 진정 합이 좋구나. 밀 전병에 싼 오리 껍질만 먹었을 때와 달리 국물이 있으니 더 맛이 풍요로웠다. 거기에 내 장수(長壽)까지 빌게 되는 음식이니 이제는 빠지는 것이 없는 음식들이 되었구나.”
만귀비의 만족스러운 말에 다들 마음을 놓았다.
“오늘 요리를 만든 숙수들에게 상을 내려라. 그리고, 남경과 북경의 상인들을 아우를 수 있게 음식의 조화를 만들어 낸 조선의 전원길에게는 전선(典膳)의 직(職)을 내린다. 궐에 남아 오늘처럼 네 재주를 발휘해 보거라.”
“네에?”
전선(典膳)의 벼슬은 황제의 선부(膳部 식재료)를 맡아보던 관직(官職)으로 정 8품의 벼슬이었는데, 궐에 들어오는 식재료를 책임지는 관직이었기에 어선방의 실세 직으로 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은 조선의 관리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하옵니다. 그리고, 외국인이 황제 폐하께 올라가는 음식 재료를 맡아본다는 것은 전례가 없을 것이옵니다.”
“전례는 있사옵니다. 예전 빈공과(賓貢科)가 있었을 때 그 나라의 음식은 그 나라 출신이 가장 잘 만든다고 하여 외국인을 어선방의 직에 두었던 전례가 있사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전조(前朝) 중 하나인 신라 때에도 빈공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많이 살았으니 조선인이 관직에 오르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지도 않사옵니다.”
태감들이 나름대로 원길을 위해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전례를 이야기했지만, 원길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조선에서 받은 벼슬이 더 높기도 했고, 양반으로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조선이 훨씬 더 좋았다.
더구나, 어선방에서 일하다가 독살 관련 일이 터진다면 그대로 형장의 이슬이 돼버릴지도 몰랐다.
원길은 몇 번을 더 사양하며 이야길 했으나, 태감들은 작은 조선의 관리보다는 명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겼는지 끝까지 권유했다.
원길은 본자기를 가져와 파는 것도 중요했고,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사는 것도 중요했기에 어떻게든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마마 그렇다면 조선에 다녀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몸이 약한 처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고, 데려올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변해 다른 이를 중용할 수 있으니 우선은 장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일 듯했다.
“허허. 아이를 낳으면 사람을 시켜 처자를 데리고 오면 될 일이지 그것 때문에 귀비마마의 명을...”
태감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급히 다물었다.
지금 만귀비가 임신을 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만귀비는 성화제와 18살 차이가 나는 연상이었는데, 이제 20대 초반의 한창때인 성화제와의 사이에서 어떻게든 후사를 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 만귀비의 앞에서 아이를 낳는 일을 하찮게 이야기했으니 태감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를 숙였다.
귀비의 후사 문제를 다들 알기에 원길에게 벼슬을 당장 내리는 것은 흐지부지되었고, 우선은 조선에 다녀온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마무리되었다.
***
“고맙네. 그쪽이 있어서 오늘 창피를 당할 뻔한 걸 면했어. 우리 남경 상인들의 체면을 지켜주었네.”
궐을 나오는데, 남경 상인들이 감사를 표하며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태감 양방은 상인들과 알고 지내면 좋을 것이라며 자리를 피해주었고, 원길도 원종에게 들은 것이 있다 보니 남경 상인을 따라 그들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남경 상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체면을 지켜줘 고맙다고 공치사를 했지만, 이야기가 어느 정도 돌자 본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본자기는 만들기가 어려워 조선에서도 한곳에서만 만들고 있다는데,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 있소?”
“우리가 귀비마마께 본자기 10조를 구해왔으나 이미 그 주인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북경 상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해서 따로 본자기를 구하고 싶은데 다른 방도는 따로 없는지요?”
“공식적인 사신단이나 상행단으로 들고 오기가 힘들다면 우리 사람을 압록강 변으로 보내 운송을 대신해 드릴 수도 있소이다. 압록강 변으로 가지고만 와도 한 조당 천은(天銀) 오십 냥을 드릴 수 있소이다.”
양 사방에서 쏟아지는 이야기에 원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본자기가 지금 북경에서 가지게 된 가치를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본자기를 가지고 오기만 하면 무조건 돈이 된다!’
더불어 상행단이 가져오는 정식 교역 물량만으로는 절대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 뒷주머니 한번 차버려...?’
원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자기는 동생인 원종이가 소유한 것과 마찬가지인 사옹원에서 만들어지고, 집안의 가복이었던 삼식이의 상단을 통해 하품(下品)인 본자기는 한양의 공랑점포에서도 팔았다.
그리고, 삼식이는 한양의 물건을 들고 의주까지 와서 교역을 했는데, 그런 삼식이의 상단을 통해 본자기 상품(上品)을 의주로 가져오기만 한다면, 본자기를 북경으로 들고 와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정에서는 은의 유출을 염려해 중국과의 사무역을 막았지만, 변경의 안정을 위해 여진족 족장들과의 거래는 막지 않았는데, 친분이 있는 무찰라타에게 본자기를 넘기는 거래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이후 맨몸으로 삼식이의 상단이 국경을 넘고 이후 다시 본자기를 받아 북경으로 와 판매한다면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북경까지 오는 길도 무찰라타의 여진족들이 호위로 나선다면 안전 문제도 해결될 터이니 괜찮은 방법 같았다.
원길 자신이 의주의 관리이기에 쓸 수 있는 꼼수 무역이었다.
그리고, 만약 사무역이 들통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분명 합법인 여진족들과의 거래에만 나선 것이니 큰 벌을 받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래, 여차하면 어선방의 전선(典膳) 벼슬을 핑계로 조선에 안 들어가면 되는 것이지.’
원길은 최악의 상황까지 계산을 했음에도 자신에게 별 피해가 없을 것 같자 뒷주머니를 차기로 했다.
“제가 본자기를 북경까지 가지고 오게 되면 조선의 상행단보다 더 비싼 가격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한 조에 은자 70냥은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오. 천은 100냥 이상도 받을 수 있을게요.”
원길은 70냥도 너무 세게 부른 건가 싶었는데 지금 가격이 천은 100냥이라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행단이 본자기 한 조에 은자 50냥을 가격으로 잡았는데, 이는 은자 1냥에 백미 2섬 가격으로 계산하면 쌀 100석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시기에 따라 은자 1냥에 쌀이 1~2섬이 왔다 갔다 한다곤 하지만, 문경 본가의 1년 소출이 200섬에서 300섬 사이였기에 본자기가 가진 큰 가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종이 이놈은 도대체 뭘 만들어 낸 거야.’
“몇 개까지 가져올 수 있겠소? 이렇게 그릇과 접시, 잔이 하나의 조로 만들어진 것을 가져와야 그 가격을 줄 수 있소.”
“지금은 공급이 중요하니 최대한 빨리 30조를 들고 오겠소이다.”
1조에 100냥 쌀 200석, 30조면 3천 냥으로 쌀로 육천 석이었다.
두 번의 상행으로 만석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원길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호위를 하는 무찰라타에게 떼어주는 것과 중간에 드는 비용을 제하더라도 절반 이상이 남는 장사라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오! 정녕 30조를 들고 올 수 있는 것이요?”
“그렇게나 많이 들고 올 수 있다면 본자기를 만드는 곳과 연(緣)이 있는 것이오?”
조선의 공식 상행단도 50조만 들고 오는데, 30조를 들고 오겠다는 말에 남경 상인들의 눈에 탐욕의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눈길은 거부(巨富)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가던 원길을 바로 잡아 주었다.
남경 상인들의 눈빛은 본자기를 차지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기에 원길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중국 놈들의 이 탐욕 어린 눈빛은 아무리 여진족이 호위를 서준다고 해도 위험하겠구나.’
“나도 조선으로 돌아가 봐야 알 수 있소이다. 조선에서도 경쟁이 붙을 경우에는 5조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소이다.”
“하긴. 지금 북경에서 상황을 다들 보았으니 관리들도 서로 구하려고 할 테지.”
“그래도 최대한 구해서 가지고 온다면 내 후하게 값을 쳐주겠소.”
“나도 최고 가격으로 쳐줄 터이니 내게 꼭 연락을 주시오.”
같은 남경 상인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붙을 정도였기에 원길은 더 이야길 하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해 저택을 나섰다.
“아차! 오늘 우리의 체면을 구기지 않게 도와주신 것에 대한 성의를 표해야 하는데, 은자로 드리면 되겠소이까?”
“은자보다는 소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소요? 그 소를 데리고 조선으로 갈 방도는 있소이까?”
“초피를 팔러온 여진인들과 친분이 있어 소를 주신다면 조선으로 충분히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 발이 넓으시구랴. 그럼 우리가 십시일반 해서 소를 드리리다.”
상인들의 말에 원길은 끽해야 소 5마리나 주려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흘 후 원길과 여진인들에게 인도된 소는 62마리였다.
“남경의 전노해 어르신이 50마리를 내었소이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자기를 들고 온다면 전노해 어르신께 먼저 파는 것을 충고드리겠소.”
“과한 선물을 주셨으니 그렇게 하겠소이다.”
무찰라타의 아들 무철호가 여진인들을 움직여 소를 이끌었는데, 이제까지 멀리 움직인 적이 없던 집에서 키우던 소들이라 그런지 그 움직임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목사 나리. 인삼이라도 판 것입니까? 소를 62마리나 받은 것을 보면 인삼도 한두 뿌리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
*
[작가의 말]
은 1냥에 따른 가치는 소설 홍루몽에서 만력제 시절 은자 1냥으로 보통 품질의 쌀 2석을 살 수 있다고 나와 있기에 그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추가로, 다들 ‘고명’이라는 말을 한자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은데, 음식의 위에 올려 꾸미는 음식이란 뜻의 ‘고명’은 순 한글 단어입니다.
고명이란 뜻의 단어는 1800년대 ‘시의전서’란 책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이 고명을 ‘교태(交胎)’라고 했다고 합니다.
생각하시는 그 교태(嬌態)와는 한자가 다릅니다요.
1600년대에 나온 ‘음식지미방’에 교태(交胎)라고 사용이 되었는데, 사귈 교(交)와 처음 태(胎)란 의미 그대로 ‘처음 마주해서 사귄다’는 그런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가장 위에 있는 고명을 마주하게 되니 이 교태(交胎)라는 말이 어쩌면 고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시의전서’에서 고명이라는 단어가 나오며 음식 위에 올려 꾸미는 음식을 고명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양을 떤다는 교태(嬌態)와 같은 음이다 보니 바꾼 것일 수도 있다고 추론하는데, 그 근거는 없습니다. ^^;;
그리고, 중국어로는 음식 위에 올리는 고명이란 단어가 없다고 하는데, 보통화 말고 다른 지방어에는 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토핑(topping)이나 가니쉬(Garnish)를 고명과 같은 뜻으로 요즘 자주 쓰는데, 이 가니쉬를 일본말로 알고 계신 분도 많습니다.
발음이 일본 뉘앙스다 보니 그렇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가니쉬의 어원은 gar(가두다)의미와 ~ish(동사를 만드는 접미사)가 결합하여 ‘새롭게 둘러싸다’, ‘위에 장식하다’라는 단어가 된 거랍니다.
정원을 뜻하는 garden이나 의복, 옷을 뜻하는 garment도 단어에 초목으로 가리거나 옷으로 몸을 둘러싸고 꾸민다는 그런 뉘앙스적 의미도 가집니다.
조선 관련 글인데, 영어의 어원까지 설명하게 될 줄이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