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고향 음식. (3)
“귀비마마. 조선의 본자기를 판매할 수 있는 상관을 북경에 설치하고자 하온데, 북경 상인들의 알력으로 상관 만들 곳을 구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 장소를 구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서거정은 북경으로 올 때 신숙주와 상의하며 고정적으로 조선의 물건을 팔 수 있는 상관을 설치하기로 했었다.
조정의 실세인 만귀비가 그런 장소를 정해준다면,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상관 자리? 그냥 건물을 사거나 빌리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양방 안 그런가?”
“그것이 마마. 쉽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사오나, 저 조선 관리의 말처럼 상인들은 서로 간의 알력이 있사옵니다. 남경에서 북경으로 조정이 옮겨 오며 남경 사람들이 북경으로 많이 따라왔지 않사옵니까? 그때 올라온 남경 사람들과 원래 북경에 살던 이들은 지금도 서로 견제하고 있사옵니다.”
“마치 동창과 서창처럼 말이더냐?”
“네. 마마 맞사옵니다. 특히나 상업은 상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그 상권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알력 싸움이 치열하옵니다.”
“그런가. 그럼, 내가 명을 내린다고 해도 그 알력이 쉽게 없어지진 않겠군.”
“네. 명을 내려 강제한다고 하더라도, 그 상관을 이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알력을 부릴 것입니다. 그런 알력이 있기에 아예 산서 사람은 산서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 산동 사람은 산동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 하는 식으로 상업지도 지역에 따라 구분이 되어 있사옵니다.”
“북경에 작은 천하가 구획 별로 있는 것이로군. 그렇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군. 호인(胡人)들이 많이 사는 거리에 조선인들의 상관을 만들 수 있게 해주마. 조선인들이 따로 모여 사는 곳이 없으니 호인들이 많은 곳에 상관을 지을 수 있게 해주겠다. 양방 네가 신경을 써주거라.”
“네. 마마. 명을 따르겠습니다.”
***
“전 목사, 내 생각이 짧았네. 만귀비에게 이야길 하면 번화가의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감 중에 상업에 밝은 이가 있었었어. 괜히 소원권을 날렸어.”
서거정은 북경의 노른자위 땅이나 건물을 받아 상관을 차리고 싶었으나 북경의 외곽 지역에 상관을 차릴 수 있는 허락을 받았으니 절반의 실패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따로 뭘 해달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서창 태감들이 우렁이 국수를 더 해달라고 해서 태감들과 어울리며 최대한 좋은 자리로 해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래 한번 이야기 잘해보게나.”
다시 눈이 가려져 어선방을 오니, 이야길 들었는지 태감들이 5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설마 했는데, 동이족이 요족의 입맛을 알아맞히다니 놀랍구만. 어서 만들어 주게. 나도 먹어 보고 싶네.”
임정덕이 이미 화덕을 만들고 재료를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50명이 먹을 분량이라 태감들과 함께 논 장어와 우렁이로 국물을 우려내 조리에 들어갔다.
우렁이 국수를 먹게 된 자들은 이 신 냄새와 국물이 맞다며 다들 어떻게 이 맛을 만들어 냈는지 놀라워했고, 추억에 빠져들었다.
태감들은 분명 몸에는 비단옷을 걸치고 있고, 벼슬까지 받아 떵떵거리지만, 가족들과 둘러앉아 함께 먹었던 시큼한 맛의 이 국수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맛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아무런 걱정이 없었을 때 가족들과 먹었던 음식이기에 태감이 되어 눈치를 보는 삶을 사는 지금의 처지와 대비가 되어 더 우렁이 국수가 먹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이 삭힌 냄새가 나는 두부와 논 장어 살을 섞어 만든 이것이 딱이구만. 삭힌 냄새가 심하게 나는 취두부에서 향을 줄이니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하군. 어떻게 이렇게 할 생각을 한 건지 물어도 되겠소?”
옆에서 나를 도와 우렁이 국수를 만들었던 임정덕은 그대로 쓰라고 준 취두부의 냄새를 줄이는 방법으로 조리를 하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논 장어로 국물을 만들어 낸 것에 감탄했다.
“아마도, 요족들은 논 장어의 살을 떠서 삭히는 법이 따로 있었을 겁니다. 그 삭힌 것을 국수에 올렸을 터인데 아직 어렸던 태감들은 그걸 모르고 맛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단하구만. 그런 것을 다 고려하다니. 헌데... 사실 요족이 아닌 내가 먹어 보기엔 그저 그렇네.”
작은 소리로 몰래 이야기하는 임정덕의 말처럼, 만귀비가 별로라며 한입 먹고 밀어낸 이유가 있었다.
추억의 맛이 아니라면 그렇게 찾아 먹을 만큼 맛이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본자기라는 것은 여유분이 없는 거요? 직접 본 태감들을 통해 본자기라는 귀물이 있다고 소문이 도는데, 따로 챙겨둔 것은 없소?”
“귀비마마께서 모든 것을 다 달라고 하셨기에 저희도 남은 게 없습니다.”
“이런 아쉽구만. 귀비마마를 뵙고자 하루에 수십 명이 오지만, 그중에 실제로 만나는 이들은 몇 안 되오. 아마 그들을 통해 소문이 나면 본자기를 구하고자 사람들이 몰릴 것이니 어서 조선에서 더 가져와야 할거요.”
“맞소. 만통가(街)에 상관을 마련해 줄 테니 어서 조선에서 물건을 가져와야 할 것이오. 물론, 그전에 따로 좀 수량을 빼주시오. 서창이 요즘 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소.”
양방이란 태감이 나섰는데, 이야길 해보니 장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태감이었다.
이 양방 태감의 도움으로 호인들의 거리에 그럴듯한 이층 건물을 구하고 조선 상방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는데, 그날부터 북경 고관대작들의 대리인들이 들이닥쳤다.
물건이 없다고 했음에도 천은(天銀)을 선금으로 걸며 본자기가 들어오면 최우선으로 받기를 다들 원했다.
만귀비만이 본자기라는 귀물을 가지고 있다는 그 희소성이 더 인기를 끌게 만든 것이었다.
“하하하 다 전 목사 자네 덕분이야! 만귀비를 만난 것이 복이 되었어. 일일이 고관대작을 찾아 뇌물로 한 조씩 주었다면 이것보다 못했을 거네.”
서거정은 황제를 만나지 못한 것과 자신의 조정 인맥에게 본자기를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으나, 이렇듯 본자기가 인기를 끌게 되자 전화위복이라며 기뻐했다.
“한판서와 자네는 돌아가서 본자기의 인기를 본국에 전하고 얼른 물건을 가져오게나.”
***
“귀비마마께서 찾으시네. 어서 채비하게.”
내일 조선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데, 서창의 태감들이 들이닥쳤다.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채비를 해야 하는지...”
“본자기 문제로 인해 연회가 열렸는데, 자네를 불러오라 하셨네. 가서 요리를 할 수도 있으니 도구들을 챙기게. 시간이 없네.”
요리 도구를 챙겨 태감들을 따라가며 이야길 들었는데, 본자기를 본 고관대작들이 조선의 상행단에서 본자기를 못 구하자, 자기들과 연이 있는 중국 상인들에게 본자기를 구해달라고 한 것이 원길이 불려가는 이유였다.
“귀비마마께서 본자기를 수십 개 들고 있다는 말이 돌자 남경 출신 상인과 북경 토박이 상인들이 귀비마마님을 찾아온 것이네. 마마께선 상인들과 평소 안면이 있으시기도 하시고, 남경과 북경 상인들의 알력을 아시기에 서로 친하게 지내라는 명을 내리시며 각각 본자기 10조를 나누어 주셨네.”
“오, 다행이군요.”
“다만, 상인들의 자존심이 있다 보니 상권 알력이 아니라 서로의 요리로 연회를 준비하여 귀비님께 어느 상인들이 준비한 음식이 맛있는지 판결을 내려주길 원하시네.”
“설마, 제가 그 판결을 내려야 합니까?”
“판결은 귀비님이 직접 내리실 거네. 자네는 그저 외어선방(外御膳房)에서 숙수들이 하는 요리 과정을 보고 그들이 만들어 바치는 음식에 대한 설명을 귀비님께 해드리면 되는 것이네.”
“아, 자문을 하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
외어선방으로 가니 남경 출신 상인들이 데리고 온 숙수들은 밀가루를 치대어 면을 만들고 있었고, 북경의 상인들이 데리고 온 숙수는 익혀진 오리를 기름에 튀겨내고 있었다.
면을 만드는 숙수는 면 한 가닥을 가늘고 길게 한 줄로 빼고 있었는데, 끊어지지 않게 반죽이 다 할 때까지 한 줄로 뽑아내고 있었다.
“장명면(長命麵)을 만드는 겁니다.”
태감 임정덕이 나타나 요리를 알려주었다.
“면장수장(面長壽長)의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얼굴이 길면 장수한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얼굴 면(面)과 면발의 면(麵)이 같은 발음이기에 ‘얼굴이 길면 장수한다’는 말이 ‘면이 길면 장수한다’는 말로 들려 긴 면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장난 놀이였다.
원길은 이런 해음(諧音)에 의한 말장난을 원종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연회에 장명면을 낸다는 것은 귀비님의 장수를 비는 것이기에 아마도 남경의 숙수가 이길 것이오.”
임정덕의 말에 원길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후장상을 떠나 그 누구든 자신의 장수를 빌어 주는 걸 싫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수가 있다면 오리요리인데, 저 숙수도 남경 출신이라는 거요. 남경에서 먹던 오리찜 요리를 북방식으로 훈제하는 것으로 바꾼 것인데, 근래 북경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음식이라오.”
삶아낸 오리를 훈제하고 다시 첨장을 발라 튀겨내고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갈색이 꽤 시선을 사로잡았다.
“음식에 담긴 뜻이 아니라면 저는 오리를 먹을 것 같군요.”
“그렇지. 하지만, 음식에 담긴 뜻이 있기에 상인의 언변으로 이야길 한다면, 장명면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걸세. 아니면 오리요리에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할걸세.”
마치 우리 둘의 이야길 들었다는 듯이 북경 숙수가 밀가루를 꺼내어 반죽을 시작했는데, 만두피처럼 얇게 전병을 만들어 내었고, 여러 야채를 볶은 요리들도 만들어 내었다.
“음식이 한가지가 아니니 이거 승부를 알 수가 없겠는데.”
임정덕의 말마따나 아무리 면에 장수의 뜻이 담겨있다고 해도 여러 음식이 함께 나오며 구색을 갖춘 오리요리가 훨씬 보기가 좋았기에 승부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
“자네는 이쪽에 서게.”
만귀비의 옆에 태감들과 함께 섰는데, 역시나 남경의 상인들이 먼저 장명면을 올리며 끊어지지 않게 한 줄로 만든 면으로 귀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만. 그만! 그래 동방삭과 관련된 한(漢) 무제의 이야기는 내 수십, 수백 번을 들었네. 하지만, 그렇게 기다란 국수를 먹으며 장수하길 빌었던 한 무제도 백 년을 살지 못했다.”
장수를 기원하며 국수를 바친 남경 출신 상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찌 보면 이것이 남경에서 따라 올라온 남경 상인들의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하나의 좋은 것을 보면 그것만을 보고 따르려고 하고, 왜 변하지를 않는 것이냐?”
“그... 그것이... 변화가 아니오라, 소인은 귀비마마의 장수를 기원하고자...”
“그래. 내 잘 알았다. 오리요리를 올리거라.”
남경 상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지만, 만귀비는 시큰둥하게 밀어내고는 북경 상인이 올리는 음식을 받았다.
“근자에 북경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구운 오리입니다. 본래는 온종일 불에 구워야 하오나, 숙수가 좀 더 색다른 맛을 귀비마마가 보실 수 있게 찌고, 구우며 다시 한번 튀겼사옵니다.”
북경 상인은 유행하고 있는 요리에 다시 변화를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요리를 올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숙수가 직접 오리의 껍질을 벗겼고, 식초에 담가 새콤하게 만든 오이를 채 썰어 밀 전병으로 감쌌다.
“그냥 드셔도 좋으나, 이렇게 전병으로 싸 먹으면 더 맛이 있사옵니다.”
태감이 먼저 기미를 하는데, 태감의 입에 씹히는 오리 껍질이 바삭거리는 소리가 옆에 선 원길에게까지 들려왔다.
만귀비도 바삭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드는지 바로 한입 베어 물었다.
오리 껍질의 바삭함과 오이의 상큼함이 밀 전병에 싸여 입안에서 어울려지자 만귀비는 아주 기분 좋게 음식을 먹었다.
“이것은 소고기와 마늘종을 볶은 것으로 새로운 맛을 줍니다.”
북경의 숙수는 밀 전병에 구운 오리와 여러 요리들을 섞어 싸서 계속 전병을 만들어 올렸는데, 하나하나 모두 맛이 달랐기에 만귀비는 아주 즐거워했다.
만귀비의 이런 모습을 다들 보았기에 요리에 대해 자문을 하거나 하는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허나, 이 구운 오리에는 저 면 음식처럼 미사여구를 붙이기가 참으로 힘들구나. 이 구운 오리에 이야기를 붙일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만귀비가 요리에 만족하여 뭔가 의미를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곤 여러 상인이 나섰으나, 다들 명의 치하에 사는 것이 은혜롭다는 것과 만귀비의 미모를 칭송하는 말만 하였기에 만귀비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조선에서 온 자네가 있었군. 이거 하나를 먹어 보고 자네도 한번 이 구운 오리요리에 의미를 부여해 보게.”
원길도 밀전병에 싼 오리의 껍질을 먹었는데, 시간이 흘러 아삭거리는 감은 잃었지만, 첨장의 장맛과 식초에 담근 오이의 상큼함이 산듯하게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떤 이야길 할까 고민하는데, 구운 오리를 만든 숙수의 손이 보였다.
칼질과 불질을 하며 자연스레 생기는 상처가 손등에 가득했는데, 저런 평민들의 삶을 음식에 붙여도 좋을지 고민을 했다.
식상한 표현이나 칭송을 싫어하는 만귀비의 취향에 의외로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지르기로 했다.
“소인이 생각하기로는 합일(合一)의 음식이라고 생각되옵니다.”
“합일? 무엇이 합해졌다는 건가?”
“여기 남경의 상인들과 북경의 상인들이 합쳐졌다는 의미이옵니다. 어선방의 임 태감에게 듣기로는 저 숙수도 남경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원래 남경의 오리찜 요리가 북경으로 와 구운 오리가 되었듯이 잘 변하지 않는 남경 사람들도 북경 사람들처럼 달라져 서로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요리가 아니겠습니까?”
“오호, 그럴듯하구나. 더 있느냐?”
“그리고... 민초(民草)의 껍질을 벗겨 먹는 관리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요리이옵니다.”
민초의 껍질을 벗겨 먹는다는 말이 나온 순간 만귀비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표정도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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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실, 아시아인의 주식이 쌀과 밀이 된 것은 송나라 때쯤입니다.
그전에는 기장과 조가 주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량미라고 하면 미(米) 한자 때문에 대부분 쌀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조와 기장이 군량미였다고 합니다.
이후 강남이 개발되는 남송 시절부터 곡식 생산량이 늘어 우리가 아는 밀과 쌀이 기장과 조를 밀어내었으며, 분식이 체계화되었습니다.
밀가루로 반죽해 만드는 만두도 그때쯤 만들어져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