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명분이 없네. 명분이...
【...자네에게 재물 욕심이 많다는 걸 알지만, 안타까워하지 말고, 아까워하지 말게. 본래 분원에서 만들어진 본자기만 해도 나라의 백토와 나라의 역을 하는 도공을 통해 만든 것이니 그것 또한 나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네. 하지만, 그것은 자네가 공을 세운 것이라 넘어가 주었네. 항시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명심하게... 자네가 더는 석탄 광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 믿겠네. 물론, 석탄은 소금과 철처럼 나라에서 전매할 것이기에 자네의 상단에서 거래할 수는 있을 것이네...】
편지를 끝까지 읽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좋게 말하면 타이르는 것이지만, 경고나 다름없었다.
본자기는 넘어 가줄 테니 석탄 광산은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손 떼라는 말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화가 났지만, 그 화를 내, 자신에게 내었다.
내가 멍청하게 석탄 광산을 곱게 포장해서 받아먹으라고 조정에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발로 찾아가 내 입으로 철간을 요청하고, 거기서 일할 일꾼들을 죄인으로 보내 달라고 처리를 했었다.
조정의 자산을 광산에 쓰면서도 그게 조정에 알려져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개인이 개발한 것을 날름 빼앗아 가는 조정의 야비함에 기가 찼지만, 그렇게 날름 먹으라고 가져다 바친 것이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생각에 누굴 탓할 수가 없어 화가 치솟다가도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안일했다.
미래를 좀 안다고, 그 미래가 내 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 이 편지를 양성지 대감이 직접 주었나? 그러고 보니 양필 자네 성씨가 양씨구만. 혹시 양성지 대감과 인척인가?”
“네. 촌수가 꽤 먼 인척이옵니다. 그리고, 직접 제게 편지를 주시며, 석탄 광산에 대해서 제조 어른이 뭔가 욕심을 부리거나 참견하려고 할 때 편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욕심을 부릴 때나 참견을 할때라...”
아마도,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석탄 광산을 이리저리 내 마음대로 움직일 때 편지를 건네주라고 한 것 같았다.
광산에 정을 빨리 떼라고 양성지 대감이 나름의 배려를 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 다음에 아프냐? 하고 물어보는 격이었지만.
내 나름대로 조선이 잘살 수 있게 노력하고 많이 베풀고 한 건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니 내가 조정을 위해 계속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잘해줄 필요 없어. 본자기는 그냥 넘어가 주겠다고? 시바...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분원이나 본자기를 손대지 않고 넘어가 주는 것이 왠지 신숙주의 뒷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신숙주가 죽고 나면 뒷배가 없어진 분원이나 상단은 언제든지 뒤흔들어 뽑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계유정난이나 중종반정 같은 쿠데타가 땡겼다. 레볼루숑의 프랑스 혁명의 맛이 막 먹고 싶어졌다.
자신의 것을 조정에서 빼앗으려 하자 억울해서 난을 일으킨 이시애나 홍경래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편지를 읽고 마음이 심란하여 한참을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 지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이익을 보더라도 왕의 신하로 있는 이상 계속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최무선이 아들에게 남겼다는 화약수련법이란 책이 떠올랐다.
유산처럼 아들에게 전한 책이 아무리 전쟁에 중요한 화약 관련 책이라고 해도 그냥 압수해서는 후손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런 개인적인 책 한 권도 왕명으로 뺏어갈 수 있는 시대가 조선 시대였고, 그런 시대에 내가 살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했다.
머리 한쪽에선 계속 혁명, 쿠데타란 단어가 아른거렸다.
뒤엎는 게 가장 빠를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모 영화의 대사처럼 명분이 없었다. 명분이...
그저 개인의 물건을(광산이 좀 크긴 하지만) 빼앗아 간 것이 억울해서 난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 어떤 이들도 동참해 주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지. 명분은 만들면 되는 거지.
머릿속으로 최고의 명분이자 금세 세력을 모을 수 있는 명분이 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명분은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의명분이 완벽하다고 해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나이가 차길 기다리며, 해외무역으로 자본을 쌓고, 사람을 모으며 힘을 길러야 했다.
탄탄한 바탕이 있고, 성공 확률이 90%가 넘어야 이시애나 홍경래처럼 실패하지 않을 터였다.
난을 일으켜 실패했던 이들과 성공해서 역사의 승자가 되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가득 메워왔다.
***
고민하며 움직이다 보니, 그 넘기 힘들다는 문경새재도 언제 넘었는지 모르게 넘었고, 석탄 광산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얼굴이 왜 그리 삭은 것이냐? 한양에서 고생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면 문경새재를 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냐?”
석탄 광산에는 둘째 형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제법 관리다운 태가 났다.
“오랜만에 넘어오다 보니 힘들었습니다. 이쪽은 한양에서 보내온 철간과 나졸인데, 공조의 사람들이니 이제 광산의 운영은 이쪽에 넘겨주면 될 겁니다.”
“오, 범죄자들이 많아져 형조에서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공조에서 왔구나. 그럼 인수인계하지. 이 석탄이라는 돌 숯이 주변에 제법 알려져서 석탄을 사러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 제법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요.”
둘째 형이 석탄 광산 관련 일을 넘겨주는 것을 보고 양필이 인수 받는 것을 보니 조선 조정은 노역 형태의 철간으로 광산을 계속 운영해 갈 것 같았다.
설점수세제를 실시하여 광산을 민간에게 넘겨 산업화시키는 것은 지금 조선의 상황에서는 시기상조인 것 같았다.
물론, 민간에게 사업을 넘기는 민영화가 만능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노역으로 일을 시키는 것은 사회주의 노동 방식과 유사하여 민영화보다도 더 못한 운영방식이었다.
백성들을 부역으로 부려 철을 싸게 얻으려는 이런 방식을 바꿔야 했다.
부역이 아닌 산업으로 삯을 제대로 주며 일을 시켜야 생산량도 늘어나고, 전문가도 생겨날 것이었다.
이런 산업화의 방식을 석탄 광산에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이젠 내가 주도적으로 광산에서 뭘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천에서 일했다는 철간들은 탐이 났다.
“철간 김고도개를 내가 데리고 가겠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요? 설마, 석탄 광산이 또 있는 것입니까요?”
양필은 또 다른 석탄 광산이 있는 건가 싶어 물었다.
“아직은 없지. 하지만, 내가 부산으로 전라도로 돌아다니다 보면 이 석탄 광산처럼 또 발견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않겠나? 그렇게 찾은 석탄 광산이 채굴할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하니 철간이 필요하네.”
양필은 편지를 읽고 화를 내긴 했지만, 금방 수긍한 원종이 혹시나 숨겨둔 광산이 또 있는가 싶었지만, 광산이라는 게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다 보니 의심을 접었다.
“그렇다면 김지하리를 데리고 가십시오. 여러곳을 돌아다닌다면 가장 젊은 철간이 좋지 않겠습니까요?”
“그 말도 맞지만, 나이 든 노장이 봐야 이게 광산으로 개발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거 아닌가? 안 그런가?”
양필은 광산을 확인하는 데는 경험이 많은 철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납득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김고도개를 데리고 가십시오.”
네 명의 여진 출신 철간들이 혈연관계였다면, 한 명만 데리고 가겠다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이야길 해 보니 넷이 서로 피가 이어진 자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고도개도 따로 떨어져 나를 따라간다는 말에 그리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요?”
“잠시 내 본가에 들러 쉬었다 부산으로 갈 것이네. 특별히 힘든 일은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사실 김고도개를 따로 빼낸 것은 광산의 확인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문경으로 오며 이야길 해보니 귀화한 여진인이 김책에만 수백 명이나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왠지 연산군 시절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을 알아내었다는 김감불과 김검동도 귀화한 여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철간은 일이 힘들어 조선인들도 도망을 치는 판국인데, 나름 양반과 양인의 성씨인 김씨 성을 가진 이들이 철간으로 일했다고 하는 게 역사책을 보면서도 뭔가 이질적이긴 했었다.
그러다, 김고도개나 김지하리 같은 귀화 여진인들을 보고 나니 연은법을 알아낸 김감불이나 김검동도 왠지 귀화한 여진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누전선을 받아 함경도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단천과 김책까지 가서 귀화한 여진인들 중에서 연은법을 아는 자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연산군 시절에 연은법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분명 그전에도 그 방법이나 원리를 아는 자들이 있었을 터였다.
단천연은법을 내가 독점한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오롯길에 만든 여관은 둘러본 것이냐?”
“새재를 넘어올 때 광산으로 먼저 가다 보니 그 길로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당패를 거두어들여 벽돌로 집을 짓고 여관을 만들게 했던 것이 기억났다.
작년의 일이었으니 지금쯤이면 근방에 소문 난 명소가 되었을 터였다.
“형님이 그 여관까지 관리를 해주셨습니까?”
“그래, 사당패 출신 놈들이 죽는다고 앓는 소리를 해대니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석탄을 알음알음 팔면서 남는 돈으로 지원을 좀 해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원을 해주다니요?”
“장사가 영 신통찮다 보니 제 먹을 것도 못 챙기는 상황이었다. 이제 네가 왔으니 네가 직접 챙기도록 하거라.”
작은형의 이야길 듣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문경새재의 명소가 되지 못한 듯했다.
“그럼 가마는 어떻습니까?”
“가마는 벽돌도 굽고, 옹기를 잘 구워내기에 나름의 호구지책은 마련하여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다. 다만, 이제는 석탄 광산을 공조에서 관리하게 되었으니 석탄을 거저 쓰지 못해 어느 정도 영향이 있겠지.”
다행히 도공들은 밥값은 하는 것 같았다.
집으로 향하며 금산이와 희재를 여관으로 보내 상황을 제대로 알아 오라 시켰다.
***
오랜만에 본가에 도착하니 사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작은형의 아들을 보며 즐거워하셨다.
“경일아, 네게 맛있는 것을 잔뜩 해줄 숙부가 오셨다. 인사하거라.”
아직 옹알이나 겨우 하는 아이를 안고 인사를 하라며 밝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큰형과 내가 한양에 있는 동안 어린 젖먹이 조카가 효도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나도 즐거웠다.
“아버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신숙주 대감에게 편지를 자주 받고 있다. 너도 얼른 혼례를 올리고, 후사를 잇도록 하거라. 우선은 피곤할 테니 가서 쉬어라.”
사랑을 물러 나오는데, 내가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다른 동생 진기가 보였다.
이제 10살이 되어 말귀를 알아듣게 되자 데리고 다니며 챙겨줄 요량으로 데리고 왔는데, 사랑에 들지 못하고 마당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입맛이 썼다.
언년이는 본가로 돌아왔기에 남장을 풀고 어미에게 갔지만, 아는 이가 없는 김고도개와 첩의 자식이기에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진기를 보니 어디서부터 바꿔 나가야 할지 갑갑했다.
서얼은 조선인이지만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계층이었고, 귀화한 여진인 또한 조선인이라고 하지만, 험한 일에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처지였기에 이 둘의 모습이 같아 보였다.
분명 둘 다 노비보다 나아 보였지만, 노비보다 못한 삶을 사는 계층이 서얼이고, 귀화조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