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약속하기로 해요. (1)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종놈이 안타까워 가수저라를 더 만들 여력이 있는지 주방을 살펴봤지만, 주방도 난리가 나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가수저라를 팔 수가 없구나.”
“안 됩니다요! 오늘 가수저라를 사 가지 못하면 멍석말이를 당해서 죽을지도 모릅니다요. 제발 팔아주십시오. 흐으윽. 제발요!”
“휴... 네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팥빵을 줄 터이니 가서 살려달라고 빌 거라. 그리고, 내일 새벽 일찍 와서 줄을 서거라. 지금은 그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하오나 지금... 아, 아닙니다요.”
종은 계속 매달리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원종의 뒤에서 인상을 쓰는 금산을 보고는 날름 팥빵을 받아 들곤 물러났다.
“금산아. 가수저라를 못산 자들에게 내일 아침 진시(辰 아침 7시에서 9시)에 선착순으로 가수저라를 판매한다고 알리거라. 행패를 부리는 자들은 내게 데리고 오고.”
금산이 나서 계산대 점원에게 상소리 하는 자들을 끌어내었는데, 내게 데려오기도 전에 겁을 먹고 다들 도망쳐 버렸다.
“덕수 화공이 글씨가 좋으니 내일 아침 진시부터 선착순 100명에게 가수저라를 판매한다고 크게 써서 붙여주게.”
춘봉 가패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나와 있던 장덕수가 한자와 언문으로 쓴 안내문을 벽에 붙이자 그제야 사람들이 돌아가며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가수저라 다섯 조각에 1냥. 쉽게 계산하면 닭 10마리에 해당하는 비싼 가격의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매진되더라도 오후 늦게나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 판단미스였다.
그리고, 구하기 힘든 설탕과 꿀을 쓰지 않고, 조청만으로 생산하기에 재료의 수급은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난로 오븐에 한계가 있었다.
오픈 일에 맞추어 다른 빵도 구워야 했기에 추가 생산이 불가능했다.
난로를 늘려 생산을 증산하기보다는 최대한 쓸 수 있는 방법을 다 도입해봐야 했다.
정신없던 첫날 영업이 끝나자 다시 순서를 정리했다.
주문을 받는 계산대 3곳 외에 포장 주문만 받는 곳 1곳과 가수저라만 주문받는 곳 1곳을 늘렸고 오승포나 저화를 확인하는 보조원과 주문 후 물건을 받는 과정을 설명하는 인원을 추가 배치했다.
현대였다면 인건비 살살 녹는다고 욕을 했을 터였지만, 제대로 된 화폐가 없다 보니 일일이 포와 저화를 확인해야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계산 창구를 늘린 것이 맞아떨어졌는지, 혼잡이 줄어들었고, 사흘이 지나자 줄은 서더라도 첫날과 같은 혼란은 없어졌다.
값을 치른 후 번호표를 받아 가는 시스템에 사람들이 적응한 것이었다.
그제야 매장에서 비파 연주 소리를 들으며 어매일가노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이 찾아왔다.
***
“이것이 그 번호판이라는 것인가? 번호판을 들고 있으면 물건을 가져다주는 이런 방도는 어떻게 생각한 것인가?”
멋들어진 장포를 입은 두 사람이 아는 척하며 탁자에 앉았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곤 벌떡 일어났다.
“영상... 아니, 군마마께서 어인 일이오십니까?”
“쉿. 조용히 이야기하게나.”
짓궂은 웃음을 짓는 자는 영의정인 한명회와 이미 한번 와본 적 있는 잘산군이었다.
두 사람 딴에는 신분을 숨긴다고 한 것 같았지만, 고급 비단 장포에 두루마기까지 걸친 모습은 어디에 있던 눈에 띄는 고급 차림새였다.
“어인 일이긴? 가패에 가면 비파 소리와 어매일가노를 즐기는 신선놀음이 가능하다고 해서 왔지.”
“신선놀음이라면 대감의 별장만 하겠습니까?”
“하하하. 그건 그렇지만, 거긴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은 못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위와 함께 온 것이지. 창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은은한 재미가 있다고 하더군.”
한명회의 말처럼 잘산군의 눈은 이미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평상시 사람 구경하기 힘든 생활을 하는 신분이었으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이리 장사가 잘되니 내 마음이 다 흡족하구만. 그리고, 점원들의 행동이 빠릿빠릿하고 좋구만. 그런데, 점원들이 사용하는 이 숫자가 서역의 숫자라고 했나?”
“네. 서역에서 쓰는 숫자 이온데, 획수가 한 획이나 두 획 만에 숫자를 쓸 수 있어 사용하기가 편하옵니다.”
“그 숫자 내게도 좀 알려주겠나. 점원들이 더하고 합치는 계산을 하던데 엄청 빠르더군.”
한명회는 가패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직접 줄을 서서 계산했는데, 그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계산대의 점원이 조선통보와 저화, 오승포, 이승포의 계산을 이리저리 더 하여 합산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산술에 재능이 있는 점원인가 싶었지만, 그 옆의 창구에서 계산을 맡은 점원도 마찬가지로 숫자를 더하여 합산하는 것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리고, 산술에 사용되는 요상한 숫자가 주문하면 주는 번호판에도 쓰여 있는걸 보자 한명회는 이 특이한 숫자가 궁금했다.
“네.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대감께서는 금방 배우실수 있으실 겁니다.”
한명회는 자신을 따라온 청지기를 뒤에 세워서 같이 듣게 했고, 잘산군 또한 창밖을 보면서 아라비아 숫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흠. 생김새는 뱀이 누워 있는 사형(蛇形)의 모양인데, 숫자를 더하고 합칠 때 큰 이득이 있구만.”
한명회는 서역의 숫자를 배워보니, 더하여 합산하는 것이 한자에 비해 직관적이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세 자리 네 자리 숫자의 계산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렇게 이 층으로 숫자를 쌓아 합하고 빼는 것은 마치 도교의 방술 같군. 숫자를 이리 잘 다루는 저 점원들은 어디에서 구한 것인가?”
“구한 것이 아니오라. 주워왔사옵니다.”
“주웠다고? 저런 총기 있는 이들을 어떻게 주웠다는 말인가?”
“이게 이야기가 기온데. 세종대왕께서 육진을 개척하셨을 때, 하삼도의 땅 없는 양민들에게 땅을 주어 육진을 개척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때 육진으로 올라간 이들이나 그런 그들에 감화된 성저야인들이 육진에서 먹고 살기 힘들 때 남쪽으로 내려와 도성으로 유입되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청계천 다리 밑과 마포나루 근처이옵니다.”
“아하, 그런 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로군. 주운 것이 맞긴 맞구만.”
한명회는 도성에서 일손이 부족할 때 그렇게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알았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네. 그렇게 모인 이들 중에서 6명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걸 트집 잡는 거지 왕초가 있었습니다. 그 거지 놈이 위아래를 모르기에 가르침을 주고는 그의 아래에 있던 다른 이들도 제가 모두 거두었습니다.”
“응? 그렇다면, 저들이 다 거지들이었다는 말인가?”
잘산군은 단체복을 입고 정갈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거지였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네. 거지 왕초와 같이 교화가 힘들 것 같은 자들은 형조에 일러 돌 숯 광산에 노역을 보내었고, 교화가 가능했던 이들은 언문과 숫자를 가르치고 제대로 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훈육을 하였습니다.”
“허허. 세상사 가장 어려운 것이 야만스럽고 무식한 자를 교화 시키는 것이라고 종학에서 배웠는데, 제대로 행동하고 언문이나마 글도 읽을 수 있는 이들로 교화를 시켰으니 참으로 대단하이.”
잘산군은 사람을 교화시켰다며 감탄을 했다.
“마마.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저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단지 그것만 했을 뿐 이온데, 저들이 알아서 체득하고 교화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종학에서 배웠던 사람의 교화는 왜 어렵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을 사람을 교화부터 하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종학에서 마마를 가르쳤던 스승이나 대신들은 양민을 교화하기 위해 언제나 먼저 꺼내는 말이 있습니다. 공맹의 도를 가르치고, 덕으로써 교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맞아. 덕으로서 정치를 행하고 위정자는 아비처럼 백성들은 자식처럼 덕으로서 키우고 포용하면 교화가 된다고 하지.”
“네. 하지만, 저는 그 교화의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보고 있사옵니다. 그 공맹의 도를 따르고 덕을 따르는 것이 맞는 말이오나 그 순서는 후에 와야 하옵니다.”
“그럼,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정말 쉽사옵니다. 제가 저 거지들에게 했듯이 그저 밥을 배불리 먹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선행되어야 하옵니다. 당장 배가 고파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인데, 그런 자의 귀에 공맹의 도가 들리겠사옵니까? 배가 고파 죽겠는데, 위정자의 덕이 와 닿겠사옵니까?”
“먼저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든 다음에야 공맹의 도가 들리고, 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저들이옵니다.”
한명회야 원래 닳고 닳은 사람이라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잘산군은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잊지 못했다.
사실, 영의정과 올겨울 국왕이 될 잘산군을 앞에 두고 유학에서 이야기하는 교화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덕치로서 교화시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뒷순위로 가야 한다고 포장을 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라는 그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리 가패라는 것을 연 것인가?”
“네 대감. 상업이라는 갈래에 속한 장사라는 것을 하여 돈을 벌고, 그 돈의 이익금으로 지방의 의관을 짓는 일이라던지, 저들처럼 교화가 필요한 이를 교화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런 일을 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옵니다.”
“그 지방 의관을 만드는 일이나 거지들을 교화시키는 일은 나라에서도 해줄 수 있는 법이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지방에 의관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세종대왕 때부터 나온 말이었으나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공맹의 도와 덕치로서 하는 일에는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천하다고 하는 상업을 하여 번 돈으로는 2~3년 안에 될 것이옵니다.”
“흠. 덕치로서 부족한 것을 상업으로 메꾸겠다라... 흑(黑)과 백(白) 양극단은 서로가 있어야 검은 것과 흰 것을 나타낼 수 있는 법. 그리고, 그 흑과 백이 양생할 때 태극(太極)이 되어 회통(會通)하니 덕치의 교화를 위해 상업을 한다는 전 도령의 말이 이치를 벗어나지는 않네.”
“맞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덕치로서 교화시키는 것이 밝은 볕이라면 상업을 하여 번 돈으로 교화하는 것은 그늘인것입니다.”
“밝은 볕이 있으면 당연히 그림자도 있는 법. 하지만, 반가의 자손으로서 장사를 한다는 오욕을 바로 걷을 수는 없을 걸세. 하지만, 덕치의 양(陽)과 상업의 음(陰)을 강조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상업을 천시하는 것이 줄어는 들 테지.”
한명회의 입에서 상업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도 있겠다고 하는 말이 나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영상대감의 말에 천군만마를 얻는 것 같사옵니다.”
원종은 한명회의 말처럼 상업이 천한 것이 아니며, 덕치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음(陰)으로 돕는 수단이라는 인식만 생겨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돈에 욕심이 있는 양반들이 상업에 알아서 뛰어들 것이고, 자연스레 상업자본이 커져 조선이 굳건하게 일어설 수 있는 방도가 생길 터였다.
“그렇다면, 조정에서 상업을 종용하지는 못하더라도 방해하지는 않아야 하는 법. 이 가게를 하면서 어떤 것이 가장 불편했는가?”
“대감께서 값을 치르는 것을 직접 해보셨으니 아실 것이옵니다. 중원은 물론이고 왜놈들도 은으로 화폐를 만들어 물건을 사고, 팔며 교역을 하고 있사옵니다. 중간에 끼인 우리 조선만 여전히 포와 쌀로 물건을 교환하고 있사옵니다. 거기에서 오는 물자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 시도하셨던 통보를 다시 찍자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