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공인(工人)의 삶. (2)
평민들도 쉽게 재료를 구해 달여 먹을 수 있는 약 중에서 기력을 북돋아 주는 약을 생각해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으로 간의 기운을 북돋아 피로를 풀게 하는 쌍화탕(雙和湯)만 해도 조선 시대 평민들이 달여 먹기엔 들어가는 약재가 많았다.
현대였다면 그냥 약국에서 쌍화탕 하나 주세요! 하면서 사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약이었지만, 여기서는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아니지. 생각을 바꿔보자.’
이제는 공인산(工人散)이 된 용각산을 만들기 위해 찾아간 의방을 생각해보고 김순의 영감에게 배우며 보았던 것들을 떠올랐다.
환(丸)으로 나온 게 아니라면 아무리 간단한 약이라도 일일이 달여야 했다.
‘약을 달여서 판다면 분명히 사 먹을 사람이 있을거다. 사람은 편한 것을 찾기 마련이니깐.’
약은 정성이니, 정성 들여 약을 달여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이 달이든 기계로 달이든 그 효과는 사실 거의 같았다.
‘현대의 약국처럼, 쌍화탕 같은것을 미리 달여 파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삼도의 물산이 모이는 안성이라면 약재를 대량으로 구매하기도 쉬웠고, 미리 달여 둔 보약을 파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특히나, 유기 방짜를 만드는 이들만 해도 수십 명의 단골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아니면, 약을 파는 약국이 아닌 쌍화차처럼 변형한 약탕을 파는 찻집 같은 형태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조선에도 찻집이 있었나?’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길에서 차를 파는 다루(茶樓)가 있었고, 일본도 에도시대에는 길에서 차와 다과를 파는 찻집이 즐비했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에는 차를 파는 찻집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했다.
물론, 일제 강점기인 1900년대 초반에는 끽다점(喫茶店 다과를 만끽하는 가게라는 뜻으로 다방을 가리키는 일본식 한자)이라는 다방이 있었고,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 같은 조선인이 운영하던 다방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런 찻집이 없었다.
‘차를 마시는 문화가 불교의 문화라서 차를 마시는 문화도 조선이 들어서며 배척당한 건가?’
차를 마시는 음다풍습(飮茶風習)은 불교가 한반도로 들어오며 같이 들어온 문화인데, 고려 시대 불교의 타락으로 인해 불교와 함께 들어온 음다풍습(飮茶風習)도 배척된 것인가 싶었다.
‘아니, 배척당한 건 아닌가? 주자학의 공문가례(公文家禮)에 의한 관혼상제 의식에는 차 문화가 남아 있잖아.’
혼례식 전에 사돈집에 차를 봉해서 보내는 봉차(封茶)라던지, 설날이나 추석에 제사차례(祭祀茶禮)로 올리는 차 문화가 남은 것으로 봐서는 차를 마시는 음다풍습 자체가 조선 시대에 배척당하거나 억압을 받은 것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전의감(典醫監) 내에 다방(茶房)이 있었으니 무턱대고 배척한 건 아닌 거 같은데.’
현대 한국에서 찻집을 뜻하는 다방의 어원이 바로 이 전의감 내에 있던 다방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 다방에서는 주로 왕이 마시는 차를 준비하고, 국가 행사나 외국의 사신이 왔을 때 다과상을 준비하는 일을 했으니 의도적인 배척은 아니었다.
‘조선이 되면서 특별히 차를 마시는 걸 배척한 게 아닌데... 왜 차 문화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거지. 중국과 일본에는 찻집이 번성했는데, 왜 조선만 없는 걸까? 임진왜란 때 차 나무가 다 타버려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의외로 쉽게 답이 나왔다.
바로, 한반도의 물이 너무 좋아서였고, 특유의 식문화가 있어서였다.
중국에서 차 문화가 발달 된 이유는 흐르는 물을 바로 마시지 못했기에 차를 끓여 그 물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선은 흐르는 물을 그냥 마셔도 배앓이를 그리 심하게 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식후에 마시는 숭늉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사 후 텁텁한 입을 씻어내기 위해 차를 마셨는데, 조선에는 누룽지를 끓인 숭늉을 마시다 보니 비싼 차를 따로 마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민들에게 차 문화가 유행하지 못했고, 양반들만 알음알음 즐기던 차 문화는 조선 후기 양반이 몰락하면서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추론의 결과가 나오자, 쌍화탕을 파는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쌍화탕이 아닌 쌍화차로 간다. 그리고, 숭늉도 팔고, 녹차나 인삼차도 팔면서 건번 같은 과자도 파는 다방으로 가자.’
한국인들이 가장 흔한 보약으로 쌍화탕을 꼽는 이유는 약국에서 언제든지 구매해서 마실 수 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쌍화탕을 마셨을 때 몸에 좋은 보약을 제대로 마셨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 그 맛도 큰 역할을 했다.
약재로 인해 입에 쓰면서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그 맛은 황기와 숙지황, 감초, 계피, 대추, 생강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사물탕(四物湯)과 황기건중탕(黃耆建中湯)을 조합해서 나온 맛이었다.
여기에 연하게 물을 섞고, 날달걀 한 알과 말린 대추, 잣, 호두를 올리면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쌍화차가 되는 것이었다.
고명처럼 올려지는 달걀과 고급 견과류가 주는 영양소도 있으니 말 그대로 보약이라고 쌍화차를 팔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한양에서 시작해야겠지만, 조선 시대 사람에게 찻집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테스트 샵을 안성에서 먼저 열어 보자.’
***
“도련님. 그냥 이걸 푹 끓여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옵니까요?”
안성에서 머무는 집은 일반 초가집을 빌려서 묵고 있었는데, 덕분에 집을 빌려준 본댁의 아낙들에게 오승포를 주고 일손을 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테스트 샵에서는 점원이 있어야 했기에 문경에 편지를 보내 관기였던 채월이를 비롯한 4명을 불러들였다.
예쁘게 나이기온을 차려입고 온 여인네들을 보자 찻집은 무조건 성공할 것 같았다.
‘암. 다방이든 카페든 예쁜 여자가 있어야 매출이 좋지.’
하지만, 한겨울 1m가 넘게 폭설이 내리자 테스트를 위한 가게를 개점할 수가 없었다.
“개점해도 사람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달인 약은 무료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졸지에 무료 시음회가 되어 버렸고, 겨울이라 비싼 달걀은 빼고 유기 공방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대접 그릇으로 쌍화차를 먹였다.
“도련님. 호, 혹시 이 약도 이것도 공짜로 주시는 겁니까요?”
“그래. 공짜네. 쌍화탕이라는 탕약으로 몸에 기가 부족한 이들에게 좋은 약이니 하루에 3번 먹어도 되네.”
“아이고, 이 귀한 걸 또 공짜로 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디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요.”
“그저 내 물건들이나 잘 만들어 주게나.”
감초를 더 넣어 달콤하게 해서 그런지 사람들은 입맛을 다시며 쌍화탕을 마셨다.
추운 겨울 쌍화탕을 먹다 보니 몸에서 열이 났고, 공인산을 먹지 않아도 기관지에 끼어 있던 가래들이 솟아 나왔다.
약을 먹고 다들 시원하게 가래를 뱉어내서 그런지 유기 공방 장인들의 혈색이 좋아진 것 같았다.
“이거 속이 든든한 것이 힘이 솟는 것 같구만. 보약은 보약인가 봐.”
“몸이 무겁고 고뿔에 걸린 것 같더니 이걸 먹고 싹 나은 것 같아.”
“도련님이 공짜로 주셨으니 다들 도련님이 주문한 것이나 다시 한번 살펴봐. 최고로 신경을 써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덕수 놈은 아예 국수틀을 하나 더 만들고 있습니다요.”
그리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장노인이 쌍화탕을 마시고 기적처럼 일어났고, 난로와 국수틀이 만들어졌다.
***
“고운 밀가루가 있으면 좋지만, 밀가루가 없으면 메밀가루나 다른 잡곡의 가루를 써서 반죽을 해도 된다. 반죽에 근기가 없어 뚝뚝 끊어질 때는 도토리나 칡의 전분을 넣어 근기를 만들어 내면 된다.”
국수틀 앞에서 반죽하는 참렬이와 관기들에게 일일이 반죽하는 법을 가르쳤다.
원래 4개의 국수틀을 주문했는데, 공인들이 알아서 하나를 더 만들어주어 5개가 되었기에 참렬이까지 개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반죽이 다 되었으면 반죽이 숙성될 수 있게 이 각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이후 이 국수틀에 넣어 뚜껑이 내려올 수 있게 왼쪽으로 돌리면 된다. 다들 틀을 돌려라.”
유기 장인들이 제대로 만들었는지 국수틀 손잡이가 돌아가며 눌러진 반죽은 바닥 구멍을 통해 얇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보관을 하려면 밀가루를 뿌려 엉겨 붙지 않게 뽑은 모양 그대로 놔두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국수틀을 솥에 올리고 바로 끓는 물에 국수가 들어가게 하면 된다. 참렬이부터 틀을 솥에 걸고 한번 국수를 삶아내어 보거라.”
남자라 그런지 국수틀이 힘차게 돌았고, 스크루로 밀려 내려오며 압력이 가해지자 끓는 물로 국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국수는 끓는 물에 금세 익어버렸다.
“익은 면은 그대로 건져 그릇에 담고, 따로 끓인 국물과 고명을 올리면 제대로 된 국수 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어때 쉽지?”
참렬이와 관기들에게 국수를 내리게 만들고 조개를 우린 국물과 파를 고명으로 올려주자 한끼 식사로 충분한 국수가 만들어졌다.
“저희 고향에서는 국수를 뽑기 위해서 장정 둘이 들러붙어 위에서 힘껏 몸으로 눌러야 뚫은 구멍을 통해 국수가 나왔는데, 이건 여자인 제가 그냥 손으로 돌려도 국수가 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니 너무 신기해요. 맛도 으음, 전분이 들어가서 그런지 부드럽고 정말 맛있어요.”
“그럼 이것도 공방 장인들에게 한번 먹여보지. 국수도 한양에서 가게를 열 것인데, 안성에서 사람들에게 먹여보고 반응을 한번 보자고.”
백여 명의 공인들이 몰려있는 유기 공방 거리가 테스트 필드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유기 공방이 몰려있는 덕적동 골목에 간이 화덕을 만들고 유기장들이 먹을 수 있게 국수를 수십 그릇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니, 어디서 이런 선녀같은 처자들이 나타난 것이야? 어느 기루라고?”
“어허. 이보게 말조심하게. 김황네 유기 공방에 일을 맡기러 오신 양반네 사람이네.”
“쳇! 양반네면 뭐 어쩌라고. 내게 와 닿는 거 없으면 그냥 모르는 남인 거지. 퉤!”
“허허. 이 사람. 공인산이 필요 없는 겐가? 공인산을 만들어서 공짜로 나눠주신 분이 저 양반네네. 문경 전씨 가문.”
“뭣?! 그럼 그 쌍화탕도 공짜로 주셨다는 그분이야?”
“그렇다니깐 그러니 말조심하게. 우리네 공인들에게 저렇게 베푸시는 분에게는 예의를 차리게나. 어어! 어디 가나?”
“이놈아 너는 입으로만 예의 차리냐? 난 장내기 유기라도 몇 개 챙겨드려야겠다. 공인산을 먹고 갤갤 거리며 나오던 기침이 멎어서 내가 얼마나 고마웠다고.”
“아차! 그렇네. 나도 귀한 약을 공짜로 받아먹고 또 국수까지 공짜로 받아먹으면 안 되지. 나도 뭘 좀 가져와야겠어.”
원종은 그저 단순히 한양에서 열 찻집과 국숫집의 테스트 필드로 안성의 유기 장인들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했는데, 국수를 끓여 내는 화덕 앞에 유기그릇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도련님 쇤네들이 망치질하는 야장 놈들이지만, 은혜는 아는 놈들입니다요. 다른 의원들은 비전이다 뭐다 하며 손톱 빠진 데 바르는 약도 비싸게 팔아먹는데, 도련님은 다른 의원들이 손도 못 쓰는 기침이나 가래를 뱉어낼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것도 가르쳐 주셨지 않습니까요.”
“그거야. 자네들이 몸도 버려가며 맡은 일을 하니 그게 너무나 안쓰러워서 그런 것이지.”
“크흐흑. 감사합니다요. 천한 공인에게... 흡...”
유기 주물을 뜨다 와서 얼굴에 검은 칠이 되어 있는 수염투성이의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니 다른 이들도 감정이 끓어 올랐는지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려댔다.
“아니 이 사람들이 국수 맛이 좋은지 말해달라고 하니깐 울고 그러나. 이러면 국수가 맛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잖은가. 그만 울게나. 다들 눈물을 그치게.”
양반네들이 물건을 주문하면서도 이들을 대우해주거나 챙겨줬던 일이 없다 보니 양반이 약을 챙겨주고 국수까지 삶아주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언젠가 공인들이 대우받는 날이 올 것이네. 그때까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주겠네.”
“감사합니다요. 나리.”
“그런데, 대신에 내가 유기를 사면 좀 많이 싸게 할인해줘야 하네.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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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한국 최초의 근대적 다방은 1902년 정동에 있던 손탁호텔(Sontag Hotel)에 생긴 다방입니다.
외국에서 온 커피를 마시는 외국인을 위해 문을 열었던 다방이지요.
물론, 이 당시의 다방은 지금의 카페와는 달리 유럽의 살롱과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사교와 문화를 꽃피우는 종합 엔터 공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때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차 문화도 일본의 말차 스타일에 많이 잠식당해 어떤 것이 조선식인지 원형을 복원하기 힘든 지경입니다.
지금 한국의 차 문화는 그렇게 일제의 스타일과 절에서 내려오던 스님들의 차 문화가 섞인 것이라 조선의 선비들이 즐긴 차 문화와는 많이 달랐을 거라고 추정만 할 뿐입니다.
시인 이상이 문인들과 같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이 또 재미있는데, 한국에서 여자를 후려 돈 뜯는 남자를 ‘제비’라고 부르는 어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비다방에서 하는 일 없이 앉아있던 한량들을 제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들로 인해 여자 돈을 뜯는 멀쑥하게 생긴 한량을 제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