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그의 한양 체류기. (3)
“하하하. 자신감 하나는 최고구만. 우리가 경기는 물론이고 경상도, 전라도는 물론, 함경도에서 온 사람도 있는데,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길고 짧은 건 대어봐야 아는 거지요. 이보게 절편(도장 떡)과 참기름을 좀 더 가지고 오게. 그리고, 도마와 칼도 좀 부탁하네.”
원길은 상에 흰색 절편과 참기름이 올라와 있음에도 더 가져오라고 시켰다.
“호조 사람들이 면신례하는 곳에서 절편과 참기름, 도마, 칼을 가져달라는데, 어찌해야하우?”
“절편이나 참기름은 알겠는데, 도마와 칼은 왜 가져달라고 하더냐?”
“무슨 생전 처음 먹어보는 요리를 방에서 한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요.”.
“그럼, 가져다드려야지. 아니다. 내가 직접 가져가마.”
부엌을 책임지고 있는 도락 어멈은 다른 이를 보내어도 되었지만, 본인이 직접 참기름병과 절편을 들었고, 자신을 이어 부엌살림을 맡고 있는 송성네에게 도마와 칼을 들게 했다.
“응? 도락 어멈이 여기에 있었는가?”
원길은 자신이 요리를 가르쳤던 도락 어멈을 여기서 보게 되자 반가웠다.
“여기서 만난 김에 날 좀 도와주게나. 그렇지 않아도 보조가 필요했네.”
“네. 늦게나마 벼슬을 제수받으신 걸 감축드리옵니다.”
“하하하. 고맙네.”
“이거, 이거. 원길이 이 친구 취향이 아주 독특하구만. 기생집에 아는 기생은 없고, 주방 찬모와 안면이 있는 선비라니. 아주 재미있구만. 하하하.”
“나도 그래. 기생집을 오래 다니면서 주방 찬모와 아는 선비는 처음 보는군. 생전 듣도 못했어.”
원길은 훼방 놓듯이 떠들어 대는 자들을 애써 무시하며 도마를 내밀었다.
“도마 한쪽에 참기름 칠을 해서 절편이 들러붙지 않게 해주게. 그리고 그 위에 절편을 놔두고...이 술병의 둥근 부분으로 눌러 절편을 얇게 펴주게나.”
원길의 말에 도락 어멈은 사기로 된 술병의 겉면에도 참기름을 발라 절편을 밀기 시작했다.
이미 절편이 만들어질 때 모양이 굳어진 상태였지만, 도락 어멈이 힘을 줘 밀어대자 두툼한 절편이 얇아져 도마 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도락 어멈이 절편 떡을 펴는 동안 원길은 상에 올라와 있는 과일과 나물을 조금씩 챙겨 잘게 썰기 시작했다.
그러곤, 널찍하게 펼쳐진 절편 위로 과일과 나물을 올리곤 절편을 돌돌 말았다.
‘원종이가 닭튀김을 상추와 깻잎으로 돌돌 말아 먹던 것을 변형했는데, 맛은 있으려나 모르겠다.’
원길은 돌돌 말린 떡말이를 도마에 두고 칼로 썰었는데, 둥근 모양의 중심에 과일과 나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맛있어 보였다.
둥근 떡말이를 접시에 쌓으며 배치하자 마치 둥근 꽃이 군락을 이뤄 피어난 것 같았다.
“이보게 꿀을 찍어 바르게.”
젓가락으로 꿀을 찍어 두세 방울씩 떡말이에 올리니 피어난 꽃에서 꿀 냄새가 나는 듯하였다.
“드셔보시지요. 아니 그전에 이런 음식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먹으라고 내밀던 접시를 원길이 뒤로 빼버리자, 다들 처음 보는 음식이라 소릴 높였다.
“처음 보네. 처음 봐! 어서 주게나! 참기름의 향긋한 냄새와 꿀의 달콤한 냄새가 어우러지니 어서 먹어 보고 싶구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화떡요리로구만. 어서 주게나!”
그제야 원길이 접시를 내밀었고, 관원들은 둥근 떡말이를 집어먹으며 맛을 보았다.
“음. 쫄깃쫄깃한 절편의 식감에 사과와 말린 감이 씹히는군. 이건 우엉인가? 연근? 죽순인가?”
“토란이네. 토란. 그리고 이 식감은 마 로구만.”
상위에 있던 과일과 나물들이 들어가다 보니 씹는 떡말이에 따라 맛이 다 달라졌고, 정해지지 않는 맛에 다들 재미있어 했다.
“그럼 제가 이긴 것입니까?”
“흠.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구만.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새로운 것을 먹게 해준 것으로 인정하,...”
“잠시만, 기다려보게.”
일이 마무리되려는데, 권일이 나섰다.
“뭐, 분명 맛이 있고, 처음 먹어보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먹어본 맛이란 말이지. 그렇지! 만두! 이거 만두 같지 않나?”
권일의 말에 몇몇은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또 몇몇은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밀가루떡으로 고기 속을 감싼 것이 만두이니 이것과 대동소이하네. 이건 고기 속 대신 과일과 나물을 속으로 넣고 쌀가루 떡으로 감싼 것이니 새로운 것이 아니네. 그저 만두를 변형시킨 것일 뿐이야. 맛도 만두보다 없지 않나. 안 그런가?”
‘무슨 개소리야? 이 새끼가!’
원길은 권일의 말을 듣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음식이 다 같은 음식이 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원길은 분노의 일갈을 쏟아내려 했지만, 직장(直長)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눈치를 주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시발. 내가 따지고 들어, 내 말이 맞다고 한들. 저 권일이란 놈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구나. 이것이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로구나.’
원길은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유진의 충고하는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네네. 맞습니다. 권 좌랑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천우정에서 한턱내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거네 그거야. 이런 모습을 우리는 원하는 것이었다네. 이제야 사람 말귀를 좀 알아듣는 제대로 된 호조의 관리가 된 것이구만. 캬하하하. 그럼 다들 잔을 들게나! 전원길이 이 친구가 우리의 동료로서 호조의 봉사가 된 것을 축하해 주세나!”
“그렇지. 원길이 자네는 오늘 잘 배웠을 테니, 다음에 호조로 오는 신출내기들을 어찌가르쳐야 할지 알겠지? 이런 게 바로 내리사랑이라는 것일세. 똑똑히 기억하게나. 하하하.”
다들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지만, 원길은 그저 쓴 미소를 띠며 웃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송상의 석태가 온 날은 그런 호조의 관원들에게 두 번째로 한턱을 낸 날이었다.
***
“흠흠. 내가 오늘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분을 참지 못해 못 볼 것을 보여주었구먼. 그래, 송상이 작년에 가지고 간 나이기온으로 꽤 재미를 보았다고 하던데. 올해도 나이기온 옷을 사기 위해 온 것인가?”
“아니.그게 아니오라...”
“그래. 여기는 안이지. 밖이 아니지. 아차!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말 꼬기를 써버렸구만.”
원길은 호조에서 사수들에게 당했던 그 말투를 자신도 모르게 석태에게 쓰고 있었다.
“그게 아. 니. 오. 라... 저희 송상도 이번 겨울에 나이기온을 팔아보고자 옷을 만들었사옵니다. 그래서 한양에 옷을 팔러 왔는데, 이미 공랑(公廊) 점포를 얻어 옷을 팔고 계시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러 왔사옵니다.”
“그래? 사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런데, 같은 옷을 팔러 왔다고? 왜? 내 기억으로는 우리가 자네, 아니 송상에게 나이기온 옷을 만들어 팔아도 된다고 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아. 저, 그게...”
석태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나이기온을 먼저 팔고 있다고 따지듯이 찾아왔다는 것을 후회했다.
“우리가 작년에 옷을 팔았을 때는 그냥 나이기온 옷에 대한 매매만 했지, 같은 옷을 만들어 팔아도 된다는 계약이나 허락을 해준 것은 없었네. 안 그런가?”
‘실수다. 내게 생길 수 있는 이득이 내 눈을 가렸구나. 내게 모든 권리가 있다고 여겼어.’
석태는 전씨 집안에서 같은 옷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복제한 나이기온 옷을 몰래 팔든지 아니면 한양을 피해 경기도에서 팔던지 해야 했다고 후회를 했다.
하지만, 이미 범의 아가리에 머리가 들어와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석태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했다. 최선의 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석태는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식으로 판매를 위한 협의를 하자. 그게 가장 안전하고 도의적으로 문제가 없는 방법이다. 수익이 줄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수익이 줄게 되면 올해 대행수가 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고, 전국을 계산했을 때 올해 놓친 대행수의 자리는 몇 년 안에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
“정식으로 송상에서 나이기온 옷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그 권리를 팔아주십시오.”
“나이기온을 팔 수 있는 권리라...자네에게 이런 일을 처리할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네. 이 나이기온 옷에 대해서는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흠. 그렇다면, 판매대금의 1할을 주게. 그러면 송상이 나이기온 옷을 만들어 파는 것을 허락하겠네.”
“순이익의 1할이 아니라 총 매출의 1할입니까?”
석태의 머리는 어느 정도 수익이 날아가는지 계산하기 바빴다. 그리고, 이게 그렇게 심하게 이익을 취하는 수치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한양에서는 총 매출의 1할을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지방은 다릅니다. 지방에 대해서는 순이익의 1할로 해주십시오.”
원길은 석태가 바로 총 매출의 1할을 주겠다고 하자,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그냥 한번 던져 본 것인데 더 불렀어도 되었으려나. 아니다 소탐과실이다. 준다고 할 때 넘어가자.’
면신례를 치루며 들어간 돈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러다 보니, 조건으로 싸우기가 싫어졌다.
“흠. 움직이고 하는 부분에서 지방은 힘들겠지. 좋아 그렇게 하지.”
“그리고, 지금 나이기온을 팔고 있는 공랑 점포에서 우리 송상도 옷을 팔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한양에는 송상의 공랑 점포가 있었지만, 그 위치가 육조거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송상이기에 조정에서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위치에 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치가 좋지 못했다.
“흠. 좋아. 그렇게 하지.”
원길은 오히려 같은 공랑 점포에서 판매하게 되면 자신이 받을 1할의 매출을 누락시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동의했다.
그리고, 전가의 공랑 점포에서 나이기온을 판다면 결국 우리 가문이 파는 것처럼 되어 원조에 대해 이야기도 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지방에서 팔 때는 나이기온을 만든 원조가 우리 문경 전씨라는 것을 명시해서 팔아주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조건이 없다면 계약서를 쓰겠습니다.”
그렇게, 송상의 나이기온도 같은 가격으로 전가의 공랑점포에서 팔리기 시작하자 물건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원길은 생각지도 않게 송상의 소매 붙이기 제조법을 배울 수 있었다.
‘만들어진 옷을 팔면서 치수를 재어 만든 옷처럼 파는 방법이 저거였구나.’
몸통 부분을 따로 만들어두고, 소매는 추후에 붙이는 방법에 원길은 감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겨울을 알리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아니, 자네는 왜 내가 보내준 나이기온을 안 입는 건가? 안 춥나?”
“아놔! 입고 싶어도 못 입는다네. 우리 참의 어르신이 못 입게 하시네.”
“아니 왜?”
“당상관 어르신들도 안 입는데, 어딜 젊은 놈들이 춥다고 두꺼운 옷을 입냐고 난리를 치시네. 그 소릴 듣고 어찌 나이기온 옷을 입겠는가. 그냥 추위에 떨어야지. 어휴.”
원길은 말을 듣고 이리저리 궁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니 당상관이라는 고위 관리들이 나이기온을 입지 않으면 아랫사람들도 따뜻한 옷을 입지 못했다.
그저, 추위를 막기 위해 안에 여러 겹으로 옷을 껴입는 것이 전부였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그런 나이기온 옷이라...안에 껴입을 수 있는 옷?’
원길의 머릿속으로 소매가 붙어있지 않은 채 쌓여있던 송상의 나이기온 옷들이 떠올랐다.
‘그래! 배자(褙子)에도 털을 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