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그의 한양 체류기. (1)
“오! 이게 그 나이기온이란 옷인가?”
원길은 나이기온 옷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피는 신숙주를 보니 그리 총명하다거나 특이해 보이지 않았다.
‘한명회는 칠삭둥이로 귀도 이상하게 생겼고, 팔도 길고 수염도 특이하다고 하던데, 신숙주 이 양반은 별거 없구만.’
원길은 신숙주가 외모적으로 튀지 않자 그저 단순히 때를 잘 만난 관리로 보였다. 하지만, 진기주는 제갈량을 받드는 유선처럼 신숙주에게 굽신거렸다.
“개경의 양반들 사이에서 겨울옷으로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런 푹신푹신한 촉감의 옷일 줄은 몰랐군. 옷 안에 든 것은 무엇인가?”
신숙주는 검은색으로 된 패딩을 이리저리 만져보며 궁금해했다.
“목화솜과 닭의 털, 오리의 털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붉은색은 주상전하께 진상하기 위한 것이옵니다.”
“음. 금실로 새긴 것이 가히 진상할 만하군. 한데, 왜 나에게 주는 것은 검은색인가? 명계의 저승사자가 검은색 옷을 입는데, 이걸 입고 얼른 저승사자를 만나라는 말인가?”
“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원길은 동생이 분명 검은색으로 시비 거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 했을 때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었었다.
하지만, 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숙주가 그렇게 이야길 하니 동생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처음 옷을 만들 때는 흰색만을 만들었었습니다. 허나, 먹물이 흰색 옷에 튀게 되자 그 색이 지워지지 않아 검은색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먹물이 튀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 검은색이기에 따로 묵향(墨香) 나이기온이라고 부르고 있사옵니다.”
원종이가 이 이야길 해줄 때 검은색이 일진(一陣 첫 번째 진, 집단, 군사들의 한 무리)을 위한 색이라는 이상한 말도 했으나, 다른 이에게 이야기할 때는 꼭 먹물이 튀는 문제 때문이라고 이야길 해라고 했다.
“흠. 그렇구먼. 먹물이 튀면 지워지지 않긴 하지. 그러면 마마들에게 진상할 옷도 있는가?”
“네. 물론 따로 챙겨 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주상전하에게만 진상하고 다른 분들 것은 들고 있게.”
“네에? 그렇게 되면...”
“다 자네와 자네 동생을 위한 것이야. 두 분에게 나이기온 옷을 진상하면 좋겠지만, 왕대비마마(정희왕후 세조 부인)와 대비마마(안순왕후 예종의 부인)가 은근한 알력이 있네. 난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군.”
“옷을 두 분에게 진상하게 되면 분명 어느 한 분이 서운해할 거라는 그런 이야기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주상전하께는 후궁이 세 분이나 더 계신다는 거네. 대비 두 분에게 진상을 하면 후궁 세 분이 서운해할 것이고, 후궁 세 분까지 챙겨 진상하게 되면, 또 두 대비께선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서운해하실 것이네.”
신숙주의 말을 듣고 보니 원길은 정신이 아득해 졌다. 해도 문제 안해도 문제였다.
“설마, 그런 일로 서운해하시겠습니까?”
“허허허. 그런 작은 것에도 의(義)가 상하는 곳이 궁이네. 뻔히 진상하고 나서 욕을 들을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주상전하께만 진상해야 자랑하시길 좋아하고 남들보다 뛰어나길 좋아하시는 성품상 만족을 하실 것이네.”
원길은 이야길 듣다 보니, 신숙주가 해주는 말이 단순한 나이기온 옷을 진상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옷을 발단으로 궐내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고, 예종의 취향을 넌지시 알려주며 비위를 맞추는 법을 알려주는 느낌이었다.
“대감마님의 충고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하하하. 총명하구먼. 자네 부친은 자식 농사를 잘 지었구먼. 첫째가 이리 기민하고, 셋째는 자기 분야에서 뛰어나니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군. 둘째 동생도 장가를 갔는가?”
“네. 삼 형제 중에 막내만 아직 성혼을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욕심이 나는구만. 가면서 동생 사주나 좀 적어주고 가게. 그리고, 내일 입궐할 터이니 시간 맞추어 오게나.”
“네. 내일 뵙겠습니다.”
원길은 그렇게 신숙주의 별장인 보한재(保閑齋)를 나오는데, 진기주가 흥분했다.
“이제 너는 당상관이 될 날만 기다리면 될 것 같구나. 괜히 부럽구나.”
“네? 진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숙주 대감은 남을 잘 칭찬하지 않는 분이야. 특히나 우리같이 젊은 선비들은 거의 칭찬하지 않으시지. 뭔가 결과물을 내놓은 게 있으면 그제야 칭찬하시고 끌어주시는 분이지. 헌데, 오늘 처음 보고 바로 너를 칭찬했으니 너를 끌어주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단순한 칭찬으로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니깐. 그러니 이제 이 육촌형도 좀 같이 끌어주도록 힘써보라고. 나도 좀 업혀 가보게. 하하하.”
진기주는 육촌 동생들의 싹수가 좋아 보이자, 한명회를 따라 줄줄이 출사한 청주 한씨 집안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명회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한 한씨 집안사람들처럼 자신도 날로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
“전하. 본시 새의 털을 의복에 사용하는 것은 미개하다고 하여 의복에 새의 털을 쓰지 않았습니다. 허나, 삼한의 후예이자 계림의 후예를 자처하는 조선이기에 계림에서 난 닭의 털로 만든 의복을 입는 것은 전통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리고, 소신이 입어보니 정말 따뜻했사옵니다.”
“허허. 고령군이 이리 추천하니 아니 입어볼 수가 없군. 이리 가져오라.”
예종은 신숙주가 들고 온 두꺼운 이불 같은 옷이 처음에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숙주가 먼저 나서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뭔지 모를 멋짐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입어보자 목화솜과는 다른 푹신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고, 상체를 크게 만들어 위엄을 안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자 아주 마음에 쏙들었다.
“그래, 이 옷의 이름이 나이기온이라고? 옷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 이 푹신한 느낌이 좋다. 상선은 이 옷의 이름을 들어는 봤는가?”
“네에 전하. 개경의 나이든 상인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입는다는 것은 들어보았사옵니다.”
“전하. 이 나이기온 이란 옷은 일전 방설환을 만들어 올린 전원종의 형 전원길이 만든 것으로, 건번(乾燔)의 일로 한양에 올라오며 주상전하께 진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응? 그 식료의 꼬마였던 아이 말이구나. 그렇다면 이 옷이 내 몸에 딱 들어맞는 것은 그가 내 치수를 알아본 것이구나.”
예종은 얼마전, 자신이 벼슬을 내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막내가 재주가 있었듯이 장자도 재주가 있구나. 건번이 아니라 상의원(尙衣院)에 벼슬을 내렸어야 했었나.”
“전하. 먼저 내린 건번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을 보시고 그렇게 정하셔도 될 것이옵니다. 그리고, 작년 송상이 나이기온 옷을 개경에서 팔았던 것도 모두 문경 전가에서 구매한 옷이라고 하옵니다.”
“호! 그래? 좋다. 이 옷의 원조가 문경의 전가라고 하니 상선은 문경으로 사람을 보내 의복을 챙기도록 하라.”
***
“그래서, 왕대비마마와 대비마마, 후궁들에게도 올릴 나이기온 옷이 필요하네. 바느질 어멈들은 어디 있는가?”
“네에?”
원길은 상선 김중시의 말에 난처했다.
“바느질 어멈들은 모두 문경에 있사옵니다. 미리 만들어 둔 나이기온 옷을 가져가시면 아니되오이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만들어진 옷을 입는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원길은 화를 내는 김중시의 말에 아차 싶었다.
‘문경에서야 우리 집안의 신뢰와 신문물이었기에 치수 크기마다 미리 만들어서 파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곳 한양은 그게 안 된다는 것을 몰랐구나.’
그랬다. 원길의 생각처럼 조선 시대는 사람의 몸 치수에 맞게 맞춤옷을 해 입는 문화였지, 만들어둔 옷을 사 입는 기성복의 시대가 아니었다.
바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옷은 원래 입을 사람이 죽었거나 사정이 있어 옷값을 내지 못했을 때 파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입던 옷을 파는 중고제품밖에 없었다.
“속히 문경에 사람을 보내 어멈들을 불러올리도록 하겠나이다.”
“최대한 빨리 바느질 어멈들을 불러올리게, 그게 아니라면 상의원(尙衣院)에서 사람이 나오게 될 것이네. 그렇게 되면 자네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야. 어흠.”
내시인 상선에게 한소릴 들은 게 열 뻗쳤지만, 그가 내놓고 간 주머니에서 옥가락지가 5개나 나오자 끓어오르던 열불이 금세 가라앉았다.
그리고 낮 밥을 위해 궐 밖으로 나오자 급히 달유를 찾았다.
“달유! 자네가 말을 타고 문경으로 급히 내려가 다희와 바느질 어멈을 데리고 올라오게! 급한 일이야!”
달유는 궐에서 급히 나온 원길의 명이었기에 큰일이라 생각하여 급히 움직였다.
“그런데, 송상은 어떻게 만들어 둔 옷을 판 거지? 그들도 송상의 신용으로 판매를 하는 것인가.”
미리 치수별로 만들어두고 판매를 하면 금세 수익을 벌수 있어서 장점이 더 많은 것 같았는데, 주문마다 맞춤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원길은 머리가 지근거렸다.
“장사가 생각보다 쉽지 않지?”
어느새 신숙주가 따라 나온 것인지 옆으로 섰다.
“네 대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하하. 맞아. 하지만, 그런 생각지도 못한 것을 헤쳐나가야 제대로 된 인재라고 할 수 있겠지. 자, 그럼 호조로 가세나.”
현재 맡은 공직은 없으나, 실세 중의 실세인 신숙주가 이번에 벼슬을 제수 받은 이를 직접 데리고 오자 호조에서는 눈치를 보기 바빴다.
“소개까지 해줬으니 나는 이만 가네. 그리고, 자네가 문경에서 나이기온 옷을 잔뜩 들고 왔다고 들었는데, 뭐, 호조에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공랑(公廊 조정에서 만들어준 상업시설)을 하나 얻어두게. 그래야 일이 수월해 질것이야. 그럼 수고하게.”
***
송상의 행수 석태는 원래 도자기와 유기그릇을 담당하는 행수였다.
허나, 작년 나이기온이란 겨울옷을 들고 오며 성공을 거두자 송상에서 포목(布木)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올겨울에는 문경에서 구해온 물건이 아닌, 자신이 고용한 바느질 어멈들이 만든 옷을 한양에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옷에 소매를 붙이지 않은 것으로 500벌을 준비했사옵니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한양으로 가야 하옵니다.”
“그래. 출발하지.”
석태는 한양으로 움직이며 작년 나이기온을 처음 가지고 왔을 때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났다.
문경에서는 주는 대로 옷을 입고 옷을 가지고 왔지만, 개경에서 옷을 팔려고 하니, 치수가 맞지 않는 일도 있었고, 어디서 입던 옷을 비싸게 판다고 누명도 썼었다.
그래서 석태는 바느질 어멈들과 머리를 맞대어 한 가지 방법을 찾았었다.
바로, 나이기온 옷을 만들데, 소매를 붙이지 않는 방법이었다.
‘만들어진 옷을 남이 입던 중고 옷이라고 몰아세우는 자들도 자신의 팔 길이에 맞게 소매만 변경해 주자 치수를 맞춘 옷이라고 여겼었지.’
옷의 몸통 부분과 소매 부분을 따로 만들어 맞는 치수로 바느질을 해주니 옷이 만들어지는 속도도 빨랐고, 옷을 사는 사람의 요구도 모두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한양에서 나이기온 옷을 팔아보려 했는데, 이미 육조거리와 인접한 목 좋은 곳에서 나이기온을 파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퍽 하고 막혔다.
“자! 어서 서두르시오! 첫눈이 내리고 나면 나이기온의 값이 2배로 뛰게 되어 있소이다! 주상전하와 대왕 대비마마께서도 입으시는 나이기온을 어서 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