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73화 (73/327)

73. 건번. (2)

“상당군(上黨君) 이게 무엇인가?”

예종은 상당군 한명회가 내미는 상자 속을 한번 들여다보곤 물었다.

“일전 방설환이란 약을 만들어 낸 전원종이라는 소년 의원을 기억하시온지요?”

“아 그자라면 기억하고 있네. 식료의라고 했던가? 그럼, 이 넙데데한 것이 약인가?”

“약은 아니옵고, 건번(乾燔)이라고 하는 보관 식량이라고 합니다.”

“보관 식량? 설명을 해보게.”

“전의원의 말로는 병영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는 상황이라거나 비가 많이 와서 밥을 하지 못할 때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건번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더운 한여름에도 한 달 이상 보관했다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름에도 한 달? 음식을 한 이후 한 달이 지나도 먹을 수 있다라? 허허 신기하군.”

예종은 상자 안에서 건번 한 조각을 들어보았는데, 1촌(약3cm)도 안되어 보이는 두께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촉감이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이걸 왜 병조판서가 아닌 상당군이 들고 온 것인가?”

“그것이... 이 건번이라는 보관식량을 상신 한 것은 한 달 전이라고 합니다. 전 의원이 상신했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저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예종은 자신의 장인이었던 상당군이 전원종이란 의원을 위해 직접 나섰다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건번이 들어있는 상자와 상신 한 문서를 확인했다. 문경 현감이 건번이라는 것이 노역에 도움이 되었고, 이것을 병영에 도입하면 이득이 클 것이며, 넘기 힘든 보릿고개를 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올린 문서였다.

예종이 보기에도 이런 상소가 한 달이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남이 사건 이후 병조판서로 재임된 박중선을 쳐다봤다.

“전하 그, 그것이... 건번이라는 것이 보, 보관식량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상신 한 내용처럼 진짜 묵혀두어도 괜찮은 것인지 확인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박중선은 갑자기 쏠린 예종의 시선에 곤란해했지만, 무과 장원답게 임기응변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오! 그런가? 그럼, 이 건번이라는 것은 이미 한 달이나 지난 것이로군. 여름이 아니라지만, 진짜 이걸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겠는가?”

“소신이 병조에서 찾아오며 조금 먹어봤사온데, 딱딱해서 씹기 힘든 것을 빼고는 괜찮았사옵니다.”

“그래? 그럼 어디... 아니다. 상선과 너희들 이리 오거라.”

예종은 건번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조각내어 내시들에게 먼저 먹였다.

[오독, 오도독, 찹찹]

“전하, 바짝 말라 있어 씹기가 힘이 들지만,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사옵니다. 다만, 그 맛이...”

내시들은 맛이 없다며 다시는 안 먹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전의원이 상신 한 내용에 따르면, 건번은 음식의 맛보다는 병사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가장 우선을 둔 병량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딱딱한 것은 먹을 때 뜨거운 국물에 담그어 먹으면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 있게 풀어진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찬물에도 그렇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예종은 맛이 없다는 말에 먹어봐야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그럼, 박판서가 보기에는 어떤 거 같은가?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은가?”

“음. 실제 적용을 해보아야 할 것 같으나, 전쟁 시 병사들이 주로 먹는 건량은 볶은 곡식이거나 볶아서 가루를 낸 곡식입니다. 이 건번은 그것을 대체할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다만...”

박중선은 상신 된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지만, 한명회가 나섰다는 사실에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명에 따라 구 대신들을 멀리하고 있었더니 상당군이 이렇게 경고를 하는 것이로구나.’

현 조정은 남이가 죽고 구성군 이준이 귀양을 가면서 훈구파라 불리는 한명회와 신숙주 계파가 조정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을 깊게 들여 다 보면 겉에서 보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대 왕이었던 세조는 구공신(한명회, 신숙주등)과 신공신(남이, 이준등)을 양 축으로 삼아 왕권을 공고히 하는 방법을 썼지만, 예종은 자신과 같은 종친이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뺏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공신 파인 종친 세력을 잘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왕권 강화를 노렸다. 그래서 아버지 세조를 도왔던 구공신을 대신해 박중선 같은 젊은 신하들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종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박중선과 같은 이들을 성장할 수 있게 끌어준 것이 한명회와 신숙주였기에 젊은 신하들은 왕보다도 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남이가 왜 장인인 권람에게 버림받아 죽었겠는가.’

박중선은 각오가 서자 입을 열었다.

“다만, 건번이라는 것이 새로운 것이니만큼 도입하기 전에 검증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건번을 만들어 북방 양도(함경도, 황해도)에서 병사들에게 도입해 보고 효과가 있다면 정식으로 건번을 채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렇지. 새로운 것이니만큼 확인을 받아야겠지.”

‘헌데, 이 한 달이라는 기간이 참으로 애매하구나.’

예종은 한명회에게 끈이 있는 전원종이 처음부터 한명회에게 가지 않고, 병조에 문경 현감의 이름으로 상신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어쩌면, 상당군과 친분이 있음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문경 현감을 앞세워 상신한 것은 내게 줄을 대려 했던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문경 현감 최철환에 포상을 내리고, 끌어 올려야겠구나.’

예종은 그렇게 일을 처리하려다 빠트린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만, 병조에서 한 달 동안 답이 없으니 원종이란 자가 다시 한명회에게 갈아탄 것인가. 이제라도 벼슬을 내려서 끌어오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

하지만, 벼슬을 준다고 했을 때 나이가 어려 벼슬을 사양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을 끌어올려 달라는 것이겠지.’

예종은 내시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답을 들은 후 입을 열었다.

“병조에서 북방 양도에 도입해 이 건번의 이득을 검증하기로 했으니 그 담당자가 있어야 할 터, 문경 현감 최철환은 종5품 도사 부사직 판관으로 삼아 양도(함경도, 황해도)의 건번을 책임지게 한다. 그리고, 전원종에겐 두 형이 있다고 하니 첫째 원길과, 둘째 원상에게 종8품 봉사를 내려 한양과 문경 일대에서 구황식품으로써 이 건번이 사용될 수 있는지 검증하게 하라.”

예종의 입에서 벼슬을 내린다는 말에 한명회도 웃었고, 박중선도 다행이라 여기며 웃음 지었다.

***

“...이에 문경 현감 최철환은 속히 병조로 들라.”

선전관 이학도의 말에 문경 현감 최철환은 정신이 없었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최철환은 원종의 말을 듣고 글을 올린 것밖에 없는데, 승차를 하게 되니 기쁘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빨리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에 봉사가 된 전가네 둘째 전원상에게 건번의 인수인계도 중요하오. 주상전하께선 이 건번이라는 보존식이 구황식품이 되길 원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대로 인수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철환은 제대로 줄을 잡았다는 생각에 선전관이 원종의 집으로 가는 길에 동행했다.

“대감마님! 큰 도련님과 둘째 도련님이 봉사로 출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요! 선전관과 현감 나리가 오고 있습니다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출사를 하게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원길은 처음 한 명이 뛰어와 전할 때는 무슨 개소리냐며 무시했지만,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어오자 그제야 진짜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황당했다.

자신과 둘째인 원상이가 뭘 한 것도 없는데 벼슬을 얻게 되었으니, 도깨비의 장난질처럼 느껴졌다.

“형님! 이 건번 때문이랍니다! 제가 올린 건번이란 음식을 도입하기 위해 형님들에게 관직을 주어 일을 맡긴다고 합니다!”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온 원종의 말에 그제야 원길은 어느 정도 납득했다.

“아니, 이 맛대가리 없는 이게 뭐라고 벼슬을 준다는 말이냐?”

“맛은 없지만, 여름에도 맛이 변하지 않으니 벼슬을 준다는 것입니다요. 얼른 의관을 정리하십시오.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나 원 참. 정녕 알 수가 없구나. 아버지는 마실 나가셨는데, 금방 오실 것이다.”

아버지는 선전관이 어명을 전하고, 나서야 급히 오셨는데, 선전관은 아버지가 입은 나이기온 옷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그 나이기온이라는 옷이오? 한겨울 눈보라가 쳐도 춥지 않다는 그 옷이오?”

“맞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상전하께 올리기 위해 막내가 만든 옷이 있소이다.”

아버지는 첫째 첩이었던 다희에게 얼른 옷을 가져오라 시켰다.

곱게 포장된 패딩을 가져왔는데, 그 색이 곤룡포의 색처럼 붉었다.

가슴팍과 등판에는 금실로 곤룡포의 원형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직 주상전하만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표가 났다.

“오오! 그러면, 이 나이기온도 이 댁에서 만든 것이오? 개경에서 몇몇 사람들에게만 돌았다고 하던데.”

“작년 겨울에는 송상에게 나이기온 물량을 모두 넘겼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구만. 그렇다면, 전 봉사가 주상전하를 알현하며 옷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아마, 주상전하께선 아주 기뻐하실 거요.”

선전관 이학도는 작은형에게 가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아버지가 그에게 검은색과 흰색 나이기온 패딩을 챙겨줬다.

물론,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원길 형이 아예 입혀주자 못 이기는 척 입고 갔다.

“형님!!”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달구지에 나이기온 옷을 모두 실어라!”

역시 이런 금전적인 부분에선 원길 형이 눈치가 빨랐다.

나이기온 옷을 송상에서 어느 정도 홍보해주었으니 집안 종들이 1년 내 만들어 둔 옷을 들고 가기만 하면 대박이 날 터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출사하게 되었으니 조상님께 제를 올리고, 향교의 친우들을 불러 잔치를 하는 것이 기본 아니겠느냐. 달구지를 집어넣고, 소를 잡아라!”

“아버님! 아닙니다. 저는 어서 한양으로 가야 합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주상전하께서 나이기온 옷이 없어 고뿔에 걸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맞습니다. 형이 속히 올라가 저 특별히 만든 나이기온 옷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상전하가 고뿔에 걸리지 않으실 겁니다.”

아버지는 형과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 걸리지도 않은 주상 전하의 고뿔을 핑계로 대자 아버지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형님. 한양에는 기주 형이 이미 자리 잡고 있으니, 주상전하께 옷을 드리고 나면 기주 형과 같이 잘산군과 한명회 대감, 신숙주 대감에게 옷을 드려야 할 겁니다. 그 외의 관리들은 형이 판단하시면 될 겁니다.”

“그쪽에 줄을 서라는 말이구나. 내 알겠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런데, 벼슬을 하는 거 보다, 나이기온 옷을 팔아 돈을 벌 생각에 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무슨 일이냐. 하하하.”

흥겹게 웃으며 출발하는 형에게 달유와 오추를 붙여줬다.

사냥꾼이기도 하고, 이미 한양을 다녀왔기에 형을 잘 보좌해 줄 터였다.

***

“전도령.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나?”

이젠 전(前) 문경 현감인 최철환은 원종과 마주 앉았다.

“특별히 뭔가를 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네. 내 정말 딸자식이라도 있었다면 자네에게 주었을 것이네. 원하는 게 있으면 말 만하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해주겠네.”

“정, 그렇다면, 연풍 현에서 노역을 온 자들 중에 만길이란 자와 그 손자를 문경 현으로 빼주실 수 있겠습니까?”

“양민을 탈호(脫戶)시켜 노비로 만들어 달라는 건가? 힘들긴 하겠지만, 내 책임지고 해주겠네.”

멀쩡한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일도 책임지고 해주겠다는 최철환을 급히 말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닙니다. 연풍 현의 호로 잡힌 자를 문경 현의 호로 옮겨 주기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이야기인가? 그건 뭐, 문경과 연풍의 호를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쉽네. 이름이 만길이라고? 그런데 그거면 되는가? 너무 작은 부탁 아닌가?”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허허. 이거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면 이 최모가 얼굴이 부끄러워지네. 옳지! 그렇다면 자네 집에 가 있는 관노들을 집안 종으로 만들어 주면 되겠는가?”

“아, 그것도 되는 것입니까?”

“물론이지. 내 그럼 그렇게 해주겠네. 하하하. 그건 그렇고, 그 건번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게나. 아님, 아예 내일 건번 만드는 곳으로 가면 되겠는가?”

“네. 직접 만들어 보시고 배우시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옵니다.”

“알겠네. 그럼, 내일 보세.”

최철환이 웃으며 돌아가자 원종도 같이 웃음을 지었다.

산나물을 잘 찾아오던 만길이란 노인과 그 손자를 어떻게 문경으로 이주시켜 일을 시킬지 고민했는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며 해결이 되어버렸다.

‘연풍 현감에게 뇌물을 줘서라도 빼돌리고 싶었는데, 일이 잘 풀렸구만.’

원종은 만길이란 노인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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