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45화 (45/327)

45. 집을 떠나다. (1)

“교형(絞刑)?”

교형이라 하면, 교수형(絞首刑)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목매달아 죽인다는 뜻이었다.

사극에서 보면 망나니가 칼춤을 추고 술을 뱉으며 죄인을 죽이는 참형(斬刑)이 대부분이었지만, 실제 역사에선 역모나 모반, 내란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형은 교형으로 시행이 되었다.

물론, 사약을 받아 죽는 것은 더 희귀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이 사형을 판결하는 것도 지방관이 마음대로 ‘너 사형!’ 이렇게 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의 3심제처럼 3번의 판결을 하는 3복제(三覆制)가 있었고,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국왕의 재결(裁決)을 거치게 되어있었다.

사형을 시행하는 날짜도 중앙에서 일일이 정해주었는데, 왕과 왕비의 탄생일, 종묘의 대제사일 같은 날짜를 피해서 정해주었다.

3심제와 같은 3복제가 지켜지는 조선의 사법제도가 그렇게 미개하거나 후지진 않았다.

물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지방관들이 사형을 시키고 난 이후 보고하게 되는 일이 많아져 국왕의 재결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1468년이니 세조가 죽는 해이구나.’

세조가 죽은 이후 예종이 즉위하지만, 1년 만에 급사하게 되고, 성종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될 터였다.

‘설마, 내가 이곳에서 만들어 낸 변화로 인해 세조가 죽지 않는다거나, 예종이 1년 만에 급사하지 않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식료의로 이름 높은 전순의 영감도 세조가 죽는 이즈음에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확한 생몰을 모르니 빨리 가야 그를 만나볼 수 있겠구나.’

지금이야 우리 집안의 위세가 있다 보니 문경이나 이 근방에서 식료의라고 말하고 다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만, 한양이나 다른 지역에 가면 그렇게 식료의라고 말을 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유학에도 학맥(學脈)이 있듯이 의술에도 누구에게 배우고 익혔는지가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2품의 고위관직인 동지중추원사에 오른 전순의의 배경은 내게 반드시 필요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려면 지금 가야 했다.

***

“아직 산에 쌓인 눈이 녹지 않고 있는데 지금 길을 나서겠다고?”

“네. 아버님. 춘궁기(春窮期)가 되기 전에 길을 나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원종의 말에 전기환은 탐스럽게 자란 턱수염을 쓸며 고민했다.

“흠. 이 근방은 작년 돌림병 때문에 흉년이 들었으니 지금 길을 나서는 게 맞긴한데... 허나 그렇게 되면 외지 땅에서 춘궁기를 맞게 될 것이다. 외지에서 먹을 것이 없어 유민이 생기거나 하면 네게 곤란한 사정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님. 그렇게 재어보게 되면 영영 집을 나서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으흠.”

전기환은 뜻을 세운 아들이 스승을 찾아 떠나겠다는 말에 보내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제 10살인 어린 아들을 보내야 하다 보니 보내기가 망설여졌다.

“지금의 식료 재주만 해도 충분한데 꼭 가야 하겠느냐? 전순의 영감이 너를 제자로 삼아줄지 알 수도 없는 것 아니더냐?”

“네. 그래서 더더욱 가서 그분의 문하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찰로는 알 수가 없는 법이지요.”

“흠. 그럼 그곳까지는 어떻게 갈 것이냐? 네가 뜻을 세워 아무리 어른 같다고는 하나 아직은 원행을 하기가 무리일 것 같구나.”

“아버님도 제가 거두어들인 사냥꾼 들을 보셨을 겁니다. 그들을 보표(保標) 삼아 갈 생각입니다.”

전기환은 창칼을 쓰고 활을 다루던 두 사람을 보았기에 막내아들이 이미 먼 길을 위한 준비를 다 했다고 판단했다.

떠나지 못 하게 말려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아들을 보내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 둘 외에도 삼식이와 박복이도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가는 김에 외가에도 한 번 들리도록 하고.”

“네. 그렇지 않아도 들려볼 생각이었습니다.”

***

“춘궁기를 대비해서 토끼를 아끼라는 말이냐?”

“네. 형님. 작년이 흉년이었으니 다들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에 고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을 먹지 않고 풀만으로도 잘 크고 번식을 하는 토끼를 더는 잡아먹지 말고 아껴야 합니다.”

“흠. 그렇게 하도록 하마.”

원길도 토끼고기를 먹지 않고 번식시켜 모으라고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닭이 아니라는 것에 만족을 했다.

원길 형의 확답을 듣고 나자 원종은 한숨을 돌렸다. 그러곤, 덕쇠 아재를 불렀다.

“광을 보니 박나물 외에도 박 씨가 많던데, 덕쇠 아재가 책임지고 초가집 지붕에 박 씨를 뿌리게나.”

“네? 초가지붕에 박 씨를 뿌리는 건 좋으나 지붕을 만든 지 오래된 초가들은 지붕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요.”

“그래서 덕쇠 아재를 부른 거네. 무너질 것 같은 지붕을 보수해서 박 씨를 뿌려주게나. 우리 집안만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다른 집안의 솔거노비들에게도 박 씨를 나눠주게. 지붕에 박이 많이 열릴수록 배곯는 이가 줄어들 것이네.”

“네. 알겠습니다요.”

덕쇠 아재는 잘 익은 박의 속이 요긴한 식량이라는 걸 알기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박을 초가지붕에 심으므로 해서 먹거리인 박나물이 생기고, 박의 겉면은 잘 말려 물을 뜨는 바가지로 쓸 수 있다는 건 기본이었다.

‘하지만, 박나물을 초가지붕에서 키우면 두 가지의 이익이 더 있지.’

우선은 여름철 남부에서 올라오는 태풍에 대비할 수 있었다.

태풍이 올라오는 여름이 되면, 이미 봄부터 크기 시작한 박이 어른의 머리만 해지는데, 그런 박이 초가지붕에 10여 개만 있어도 초가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현대에서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폐타이어를 올려두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그리고, 그 박이 초가지붕에 뿌리를 내리게 됨으로써 생기는 식재료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굼벵이였다.

주로 부엽토나 썩은 나무 둥치에 사는 풍뎅이의 유충인데, 박이 자라며 그 뿌리가 초가지붕의 짚을 삭게 만들고 발효를 시켜 굼벵이들이 살아가는 최적의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굼벵이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한 마리에 30g에서 40g까지도 자라기에 다 큰 굼벵이 다섯 마리만 먹어도 춘궁기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에너지가 나왔다.

‘춘궁기에는 아주 좋은 단백질원이지.’

초가지붕에 자연 보관되는 박과 굼벵이로 보리가 익기 전까지 버티는 며칠을 늘려줄 터였다.

“언년아. 내가 없더라도 이 지렁이를 잘 키워야 한다. 덕쇠 아재에게도 이야길 해두었으니 아예 이 곁채에서 살며 지렁이를 키워 텃밭에 지렁이를 던져주거라.”

“네에. 염려 마세요.”

언년이는 글 쓰는 것 외에도 다른 일을 받았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이걸 받거라.”

원종은 서찰을 언년이에게 주었다.

“음. 이 서찰은 한자라서 제가 모르겠어요.”

“마을이나 이 근방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키운 지렁이를 삶아 먹이라는 글이다.”

“네에? 지렁이를 사람들에게 삶아 먹이라고요?”

언년이는 지렁이를 사람에게 먹이라는 말에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래. 닭이나 새들이 먹는 징그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이 지렁이에는 아주 영양가가 많단다. 그래서 닭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고. 굶어 죽는 자가 나오면 이 서찰을 덕쇠 아재에게 보여주면 될 것이다. 그러면 지렁이를 배 굶는 자들에게 줄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 이 지렁이는 맨정신으로는 못 먹을 것 같은데요.”

“그래, 보기에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하지만, 춘궁기에 굶어 죽기 직전의 사람이라면 잘 먹을 것이다. 그래도 못 먹는 자가 있으면 지렁이를 토막내어 끓이고 소금 간장으로 양념해 눈을 가리고 먹이면 될 것이다.”

“윽... 속여서라도 먹이라는 말이군요.”

“그래. 굶어 죽는 거보다는 좋지 않겠느냐?”

“뭐, 그건 그렇죠. 일단, 이 서찰은 제가 중히 들고 있죠.”

조선 시대 사람인 언년이도 얼굴을 찌푸릴 만큼 지렁이를 먹는다는 것에는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실제 지렁이는 토룡탕이란 이름으로 예전부터 음식의 범주에 드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도 지렁이를 식용으로 먹었고, 아즈텍 문명에서도 말린 지렁이를 육포처럼 먹었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작은 지렁이가 아닌 40~50cm 길이의 뱀 같은 지렁이들이긴 했다.

그리고, 지렁이를 보릿고개를 위한 구황 동물(?)로 생각한 것은 어릴 때 본 전설의 고향이란 드라마 때문이었다.

봇짐장수를 하는 장사꾼이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마누라를 두고 장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살이 보기 좋게 올라있었다.

“며느리가 고기 국수를 매일 챙겨줘서 살이 오른 거지.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맛있어서 너를 주려고 고기 국수를 따로 빼두었단다.”

장사꾼은 마누라가 너무 고마웠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없는 살림으로 고기 국수를 해서 먹였다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

허나, 아들을 생각한 어머니는 고기 국수라며 챙겨둔 그릇을 내밀었는데, 그 그릇에 담긴 것을 보곤 혼비백산했다.

그릇 안에는 삶은 지렁이가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 못 보는 어머니가 고기 국수라 여기며 먹었던 것이 바로 지렁이였고, 그 지렁이로 인해 살이 찔 정도로 지렁이는 고단백의 구황 동물이었다.

지렁이까지 보릿고개가 너무 높아 넘기 힘들 때를 대비해서 지금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은 준비를 다 시킨 것 같았다.

달팽이도 식용으로 삶아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지렁이로도 굶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달팽이를 식용으로 쓰는 최후의 식재료로 남겨 두었다.

***

“아직 결혼도 하지 않으셨고, 관례도 치르지 않으셨는데 상투를 올리시려고요? 대감마님이 말도 내어주신다고 했는데, 말도 마다하셨다면서요?”

박복 어멈은 아직 어린 원종이 상투를 틀고 원행하는 것을 걱정했다.

“아버지께도 허락을 받았으니 어서 상투를 틀고 갓을 씌워주게나.”

‘조선 양반 하면 갓이지!’

문경이 아닌 한양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 그리고 전순의 영감의 문하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상투를 틀고 갓을 써서 어른행세를 해야 했다.

그리고, 내 시중을 들 박복이와 삼식이는 장가를 가지 않은 총각을 나타내는 댕기를 땋았고, 달유와 오추는 상투에 패랭이를 썼다.

“다 챙겼느냐? 그럼 가자!”

아버지와 형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지만, 채 두시진 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내어준다는 말을 받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차 타고 넘을 때는 문경새재가 별거 아니었는데, 무슨 산세가 이리 깊은 거야. 해발 1000m대 인걸로 아는데. 왜 이런 거야?’

사실 지금이야 잘 닦인 도로에 자동차로 지나다니기에 문경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그리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문경새재의 험준함은 예로부터 아주 유명했다.

삼국시대 남진을 하며 국토를 넓혔던 고구려의 장수왕을 막는 방어선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임진왜란의 신립 장군이 문경새재의 조령산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막았다면 임진왜란의 판도가 바뀌었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경새재의 지형은 험했다.

“그래, 여기서 주막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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