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닭, 치킨, 토리, 자지. (2)
‘맞아! 계림! 계림을 잊고 있었어! 신라를 잊고 있었다니.’
춘봉은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계림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났다.
조리 고등학교였기에 닭과 관련된 이야기라며 부산출신 국사 선생님이 재미있게 썰을 풀어주셨었다.
“너그 그거 아나? 신라라는 이름은 22대 왕인 지증왕이 정한거데이. 그전까지는 나라 이름을 신라라고 부르지도 않았어. 그럼, 지증왕 이전에는 신라를 뭐라 불렀냐 카믄.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계림(鷄林),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이런 이름으로 불렀어.
여어서 시림, 계림이 치킨하고 관련이 있는 이름인데,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가 이 숲에서 나왔는기라. 너그 김알지 다 알지?
그래서 이 숲이 성지처럼 되었는데, 김알지를 흰닭이 지켜주고 했다고 해서 이 숲에 닭을 풀어 키웠는기라.
근데, 화랑이라는 동네 귀족건달들이 캠핑가듯이 숲에 가서 닭 잡아묵고, 그 깃털을 머리에 꽂고 돌아 댕기고 했는기라. 그게 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이란 모자인거라. 너그 화랑 모자 알재?
그 화랑이쓰고 댕기던 조우관이 신라 계림의 후손이라고 알리는 상징적인 아이템이 된기라. 이 닭숲이 그 이후로도 쭈우욱~ 내리왔기 땜시 요즘도 대구 경북에서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가 많이 나오는기라. 알긋나? DNA에 새겨져 있는 거데이.”
국사 선생님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 TMI같은 우스갯소리에 핵심은 다 들어가 있었다.
신라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고, 김알지는 흰 닭이 지켜주는 숲에서 왔기에 신라 사람들은 조선 시대 선비들과는 다른 이유로 닭을 신성시 여겼었다.
그리고 계림이라는 이름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쓰였고, 고려 숙종 8년(1103년) 고려를 방문한 북송의 손목(孫穆)이란 자가 고려 여행기의 제목을 ‘계림유사’라고 지었을 정도로 계림이란 이름은 계속 존속되고 있었다.
경주의 작은 숲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도 신라가 닭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글이 있는데, 인도에서는 신라를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라고 불렀다고 했다.
구구탁은 닭을 말하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으로 ‘닭을 귀히 여기는 나라’라고 인도에 알려졌던 것이었다. 그만큼 닭에 대해 애정을 가졌던 나라가 신라였다.
그런 신라 귀족들의 입맛에 맞게 몇백 년간 개량된 닭이라면 육계의 조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서라벌 닭이 몇 마리 있소? 아니 그냥 다 주시오.”
“허허 내가 몇 마리나 있을 줄 알고 그러는 것이요?”
주걱턱의 상인은 웃으면서 닭이 들어있는 어리 통을 내밀었는데, 암탉 세 마리가 있었다.
“비봉산 근처에서 닭을 키우는데 다섯 마리가 더 있소. 그리고 더 필요하다면 내 서라벌 닭을 더 구해주리다.”
춘봉은 닭 장수의 말을 듣자 뭔가가 느껴졌다.
“그대는 닭만 전문적으로 키우는 사람이오?”
“뭐, 전문적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닭과 비둘기를 키워 밥 빌어먹고 있소이다.”
닭을 키워 밥을 먹고 있다고 하니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일 것 같아 이야길 나누기 시작했다.
서라벌 닭을 파는 상인의 이름은 김일란이라 했는데, 양인으로 일가족 모두가 비봉산 근처에서 닭과 비둘기 같은 조류를 키운다고 했다.
다음 오일장에는 가지고 있는 서라벌 닭을 다 들고 오기로 했는데, 먹어보고 맛있으면 서라벌 닭을 더 구해줄 수도 있다고 했다.
비봉산에 있다는 다섯 마리까지 해서 닭 8마리를 면포 한 필과 보리 두 말로 바꾸었다.
대충 면포 한 필이 쌀 서말로 거래가 되었는데, 서라벌 닭의 시세를 모르기에 닭값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닭을 개량하고 품종 고정화를 위해 들여야 할 시간과 비용을 김일란이 줄여준 것이라 무조건 이득인 거래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해결했으니 제대로 장을 구경해볼까.”
여름의 끝이다 보니 사람들이 오일장에 내놓은 것들이 풍성했는데, 주로 개구리참외라고 불리는 박류의 야채들이 많았다.
제대로 개량이나 비료로 키운 게 아니다 보니 과실의 크기는 전체적으로 작아 보였지만, 단단한 느낌이 드는 건강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새벽에 출발해 정오에 풍양에 닿은 것이라 발걸음이 절로 먹거리를 파는 곳으로 움직였다.
조선 시대에 흔히 생각하는 주막 같은 곳은 없었지만, 천막을 치고 음식을 파는 노점은 여럿 있었다.
장날에 맞춰서 가게를 여는 간이노점으로 운영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미래의 경쟁자들이었기에 어떤 음식들을 파는지 살펴봤다.
주로 팥죽과 같은 죽류와 알 수 없는 고기와 야채로 끓인 국밥류가 많았는데, 박복 아범의 말로는 오늘은 없지만, 떡을 파는 자들도 있다고 했다.
‘오일장이나 시장에서는 시장국수나 칼국수를 간단하게 말아 먹는 게 최고인데...’
한국의 오일장이나 시장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수 노점이 없는 게 뭔가 아쉬웠다.
‘조선의 기후상 밀이 재배되기 힘들다 보니 이 시대에는 값싼 면류 음식이 힘들겠구나. 밀가루로 하는 모든 요리에 애로사항이 있겠어. 빵도 안 되겠고.’
기후 때문에 밀이 한국에서 재배되기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반만 맞는 말이었다.
초여름에 파종하는 여름 밀은 한반도의 여름이 고온다습하기에 재배조건이 맞지 않는다는건 맞았다.
하지만, 밀을 가을이나 겨울에 씨를 뿌려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 수확하는 겨울 밀은 재배가능한 기후였다.
그럼에도 겨울 밀이 재배되지 않았던 이유는 보리라는 작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 밀은 같은 시기에 성장 가능한 보리와 비교했을 때 수확량이나 지기(地氣)의 손실에서 보리보다 좋지 못했다.
보리라는 비교우위의 작물이 있었기에 조선에서는 밀의 재배가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보리보다 수확량도 적은데, 지기를 더 빨리 날려버리니 다시 벼를 심어야 하는 조선의 현실에서는 밀보다 보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여름에도 나름 건조한 북한 쪽 고원에서 여름 밀을 재배하지 않는 한 면류의 보급은 힘들겠어.’
면류가 없는 장터 먹거리에서 알 수 없는 고기가 들어간 국밥보다는 죽이 괜찮은 듯싶었다.
“여기 팥죽 세 그릇 주시오.”
편하게 간이 평상에 앉아 팥죽을 시켰는데, 박복이와 박복 아범은 춘봉이 올라앉은 평상에 오르지 않았다.
그저 평상 끝에 겨우 엉덩이만 걸친 채 어중간하게 앉아 있었다.
팥죽을 받아서도 손에 들고 먹는 게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리 불편하게 먹나? 거 세 그릇 시켰는데 소반 하나는 더 주쇼. 편하게 먹어야지.”
아낙이 춘봉의 말을 듣고 소반을 더 내어 왔지만, 박복 아범이 말렸다.
“왜? 겸상이 아니라, 같은 평상도 안되는 것이냐?”
“그게... 도련님 나중에 경을 치게 됩니다요.”
“내가 괜찮다는 데도 그러네. 내가 내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겠다는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냐?”
“그, 그게... 도련님 저희가 안 괜찮습니다요. 이게 주인마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경을 치게 됩니다요.”
“누가 본다고? 누가 이야기한다고? 집까지 찾아와서 그런 헛소리를 누가 한다는 게야?”
이런 게 무슨 소문이 나느냐며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길 했는데, 노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살펴보니 양반은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노점에 앉아 먹는 것 자체가 양반의 체면 문제라고 여기는지 양반들이 아예 없었다.
‘아니, 무슨 노점에서 팥죽 먹는 게 뭐가 문제인 거야.’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춘봉은 알고 있었다. 시골일수록, 어두워지고 할 일이 없는 곳일수록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소문이 난다는 걸.
그리고, 그 소문이라는 것은 입을 거쳐 감에 따라 으레 살이 붙기 마련이라는 것도.
모 가문의 도령은 노비랑 한 평상에서 밥을 먹는다고 소문이 나면 어느 순간 노비랑 양반이 겸상하고 있더라는 소문이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시발 주오옥같네.’
결국, 박복이 부자는 평상에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 등을 지고 팥죽을 먹었다.
팥죽 특유의 텁텁하면서 구수한 맛이 입맛에 꽤나 맞았지만, 이미 입맛은 버린 후였다.
“계산.”
박복 부자가 다 먹기를 기다려 일어섰다.
그리고, 팥죽값을 치르고자 내민 조선통보로 인해 기분이 더 언짢아졌다.
“도령. 우리는 이런 거 받지 않수다. 다른 건 없수? 옳지 저기 쌀이 있구만. 쌀 한 되만 주슈.”
춘봉이 내민 조선통보 돈은 받지 않고, 소달구지에 실려있는 쌀로 팥죽값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에 춘봉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웃겨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너무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시발. 내가 바보였어. 조선통보니 상평통보니 나라에서 만들어 보급하면 뭐해 돈이 있어도 쓸 수 있는 곳이 없는 나라가 조선인데.’
조선 중기 1600년대 후반은 되어야 사람들이 엽전 형태의 상평통보를 화폐로 인정하고 사용했지 그전에는 조선통보니 십전통보니 만들어 유통시켜도 사람들이 쓰지를 않았다.
무조건 쌀과 같은 곡식이나 면포가 물물교환의 화폐로 쓰이는 게 현실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는 물물교환 경제라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아예 밥값으로도 돈을 받으려고 하질 않는다니. 이러면 내가 하려는 닭 농장이나 가게도 문제가 생긴다.’
치킨집이든 다른 요식업이든 동일한 가치를 가진 화폐가 사용되어야 거기에 맞게 치킨이든 국밥이든 팔 수가 있었다.
화폐 없이 면포나 쌀로 물물교환식으로 거래를 하게 된다면, 판매하는 물건의 가치를 일괄적으로 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값으로 받은 그 물건들을 다시 다른 재화로 바꾸는 과정을 또 거쳐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햐~ 헬조선 헬조선 하는 거 진짜 이해 못 했는데, 이제 이해되네. 진짜 조선은 헬이었어. 헬! 시파!”
모든 것이 물물교환이라는 충격에 장터를 더 둘러볼 의욕도 없었다.
힘이 빠져 소달구지에 앉아 멍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장사를 하고 가게를 하려면 화폐경제가 먼저 돌아가고 있어야 해. 그래야 재화의 가치를 설정하고 그 재화의 가치에 맞는 거래를 할 수 있는거고. 한데 그러지 못하다면 과연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아니 장사는 되겠지만, 기업적으로 가능할까?’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화폐의 유통을 장려하고 싶어도 화폐의 유통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 세종대왕도 조선의 열악한 상거래 현실을 타파하고자 조선통보를 만들어 보급했으나, 쉽게 정착되지 않았었다.
‘그 세종대왕도 못한 일을 내가 어떻게 해. 휴...’
“자, 두 사람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엿이요~ 엿! 엿사시오~!”
엿장수의 호객에 박복이의 눈이 지남철처럼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래 스트레스는 단 거로 푸는 거지.’
“이보쇼. 엿 세 개 주시오.”
“어이쿠 감사합니다여.”
엿장수는 박복 아범에게 쌀을 받고는 내게 엿을 두 손으로 건넸다.
그리고, 엿을 받은 춘봉이 그중 두 개를 박복이 부자에게 내밀자 엿장수는 놀랐다. 그리고 엿장수가 놀랐듯이 박복이 부자도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엿을 받아들 생각도 하지 않고 멀뚱히 엿을 보았다가 나를 보았다가 눈치만 봤다.
“어서 안 받고 뭐 하느냐?”
“네, 네? 지, 진짜 쇤네가 먹어도 되는 겁니까?”
“그럼, 구경하라고 엿을 샀겠느냐? 어서 엿 먹어라.”
제 아비의 눈치를 보던 박복이는 내게 엿을 낼름 받아서는 입으로 욱여넣었다.
“욘석아 그렇게 입에 무는 게 아니여. 엿을 처음 먹어보는 애들만 그렇게 길게 한 번에 먹는 거여. 이렇게 조각내서 잘라 먹어야 아, 이놈이 엿 좀 먹어 본 놈이구나 알아보는거여. 그리고, 잘라 먹어야 오래 먹을 수 있는거시여.”
엿장수는 엿을 먹는 방법을 박복이에게 알려줬는데, 엿 먹는데도 무슨 방법이 있는가 싶어 웃음이 났다.
맛있게 엿을 먹는 박복이와는 달리 박복 아범은 엿을 먹지 않고 소매에 조심스레 넣는 게 보였다.
“왜 안 먹는가? 박복 아범은 엿을 안 좋아하는가?”
“아. 저 그게... 언년이가...”
내 물음에 난처하다는 듯이 답하는 박복 아범을 보니 입안에서 단맛을 내던 엿이 씁쓸해졌다.
자신도 먹고 싶은 엿을 먹지 않고 집에 있을 딸에게 챙겨주려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다.
팥죽 세 그릇 값보다 비싼 엿이다 보니 노비인 박복이와 언년이가 먹어봤을 리 만무했고, 어쩌면 박복 아범도 못 먹어봤을지도 몰랐다.
“여기 엿 두 개 더 주시오. 그리고 이건 언년이와 어멈에게 줄 것이니 아범도 어서 엿을 먹게나.”
내가 지켜보자 박복 아범은 그제야 엿을 잘라 입에 넣었는데, 그걸 보곤 새 엿 두 개를 챙겨줬다.
내게 부채질하며 달콤한 엿 조각에 즐거워할 언년이를 생각하니 언년이보다 한두 살 어린 배다른 이복동생들도 생각이 났다.
‘휴. 다정도 병이라...’
“두 개, 아니 세 개 더 주시오.”
이복동생들과 그들의 어미에게도 하나씩 줄 수 있게 엿을 더 사자 가지고 온 쌀이 다 떨어졌다.
‘엿 하나 사 먹는데도 마음을 졸여야 하는 시대에 치킨 장사가 될 턱이 있나. 치킨 한 마리 사 먹기 위해 쌀을 지고 다녀야 하는 병신같은 시대인데, 치킨 장사가 되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장사에 대한 접근법 자체를 다 바꿔야겠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조선의 현지 사정에 맞게 로컬라이징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진짜 헬 난이도네... 시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