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15)
영의가 지연과 황준을 갑작스럽게 찾아와 학부모 면담을 진행하게 된 것은 즉흥적으로 저지른 부분이 있었다.
본래 크게 생각 같은 것을 하지 않고 몸부터 움직이던 영의였기에, 생각난 김에 움직이기로 한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유도 있었다.
며칠 전.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다른 차원을 이리저리 왕복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더 있지?”
용신은 영의에게 그의 비밀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있는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의는 애초에 다른 차원 간의 이동에 관해서 화연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번개를 다룬다거나 은색 헬멧을 쓰고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지인(병찬과 병민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에게는 알려졌지만, 차원 이동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화연에게 비밀을 밝히게 된 계기도 우연에 가까웠으니까.
“화연이 말고는 없을……걸요?”
“그래, 역시나 모르는군. 일단 너와 관계된 일 중에 너한테 뭔가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기대한 내가 멍청했지.”
영의는 자신을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용신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이 좀 심하신데.”
아무리 자신이 지능적으로 뛰어난 편은 아니라지만, 저렇게 대놓고 물어봐선 안 되는 일이었다고 하니까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용신이 그렇게 말을 한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네가 직접적으로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네가 가르치는 여자애는 이상함을 느낄 거다. 애초에 네 형이란 녀석이 네 동생을 가르치는 역할도 겸임하고 있으니, 그 여자애가 쓰는 기술을 보고 그 녀석도 이상함을 느끼겠지.”
“어……?”
“너, 네 집안에서 내려오는 기술이라고 얘기하고 가르쳤잖아? 정작 그 여자애 옆에 같은 집안 사람이 있는데 이상한 걸 눈치챌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거냐?”
영의는 지연에게 뇌령검법을 전수해 줄 때 비급을 보여 주거나 무공의 묘리를 일일이 살려서 하는 무림의 방식으로 전수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해 보고, 현대의 각성자가 쓸 수 있는 방식으로 개량하여 가르쳐 주었지만 무공의 형과 태는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자신이 만들어 냈다고 하거나 아카데미 소속이 아닌 이에게 가르쳐 줬다면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의는 섣부르게 집안에서 내려오는 무술이라는 변명을 했고, 하필 그 집안사람이 지연과 가장 가까우며 그녀의 연습을 지켜볼 수 있는 상대 중 한 명이라는 게 문제였던 것이다.
“하아…… 그나마 다행인 건, 물증이 없어서 기억만 살짝 조작하면 된다는 건데…… 이건 디테일한 조작이 필요하니까 네가 네 형과 그 여자애를 똑같은 자리에 모아 놔야 해. 가능하면 주변 관계자들까지 전부.”
용신은 기억 조작을 해야 한다며 관계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라고 지시했고, 영의는 그것을 단순히 아카데미의 방문으로 해결하려 했었다.
영웅에게 일회성 초청 강사 역할을 제의받기도 했었고, 자신 또한 자격증은 없지만 한때 격투기 대회 우승 경험들이 많으니 스파링 강사 등으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말에 지연이 수행을 위해 찾아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때가 기회임을 직감한 영의가 곧바로 학부모 면담을 강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준과 영의의 관계는 매우 양호했다.
“재능만큼은 정말 확실하게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몰라도 능력의 응용은 확실히 천재예요.”
“아하하하, 그런 만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며 웃음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황준과 영의.
황준은 확실한 결과물과 선생의 실력을 봤으니 인재 욕심과 함께 딸의 성장을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작용하여 어느덧 영의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다만 제 쪽에서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뭔가요? 과외비나 큰 문제가 없는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영의가 아무런 대가 없이 지연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기에, 황준은 그런 그가 더욱 마음에 들어서라도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요즘 얘가 좀 비실비실하더라고요. 물론 먹는 거야 잘 챙겨 먹고 영양학적으로 충실한 식단을 먹겠지만…… 아무래도 더 먹어 줘야 힘을 쓰겠죠.”
영의는 지연을 가리키며 지연의 영양 상태가 부실하다고 평했다.
“네? 제가요?”
지연이 아카데미에서 식사하는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 식사는 수연과 함께 누구보다 빠르게 아카데미의 식당으로 달려가 식당의 테이블이 아닌 주방에 직접 들어가 갓 나온 밥과 반찬을 한번 먹고 나온 뒤 또다시 식당에서 받아먹는다.
점심 식사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다른 교육생들보다 뛰어난 속도와 전략(강의실이 어디에 있건 창문에서 뛰어내린다)으로 먼저 도착하여 깔끔하게 비운 뒤 남는 식사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매점으로 간다.
보통 아침의 경우에는 거르는 교육생도 많고 강사들은 안 먹지만 점심은 모두가 동일하게 먹었으므로 남는 경우는 별로 없어 매점의 신세를 자주 졌다.
저녁의 경우엔 식당에서 먹기도 하지만 간혹 조금 모자라다 싶을 때 수연의 주도하에 아카데미 바깥에서 사 먹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또다시 수연의 주도하에 야식으로 뭔가를 배달시켜 먹을 때도 있었으니, 살이 찌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의 생활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영양 상태가 부실하다고 말하는 영의를 보자, 지연은 순간 먹여도 먹여도 더 먹이려는 할머니들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설마……?’
“뭔가를 더 먹이라니요……?”
“단백질이나 다른 부분은 몰라도…… 원기 회복은 확실한 게 있죠. 저희 집안에 내려오는 그런 식품이.”
영의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영웅은 그 말을 듣고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너, 설마…… 그거 먹이려고? 효과는 좋지만 맛은 진짜 별로인데?”
“원래 입에 쓴 게 몸에 좋은 법이지.”
영웅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고, 자신을 가르치는 두 형제가 뜻밖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본 지연은 불안해졌다.
“어떤 걸 먹이시려는 건지……?”
황준은 지연의 반응과 영웅의 반응을 보고 뭔가 심상찮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그것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저희 집안 특제 원기회복탕…… 재료는 준비해 왔습니다.”
영의가 준비한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골 조금, 돼지 다리 살(후지) 부분 2kg, 찹쌀 조금, 그리고 약간의 한약재.
“……그냥 사골국이나 고깃국 재료 아닌가요? 찹쌀은 의외지만.”
“아뇨, 그것들을 다 넣고 끓이는 과정 전에! 이 비밀 약초가 들어갑니다.”
영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의 식물 잔해들이 섞인 작은 비닐 봉지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본래 레시피대로의 약초 외에도 영의가 추가로 넣은 비밀 재료가 하나 더 들어가 있었다.
“으윽…… 저거 진짜 싫은데……. 그보다 넌 부모님한테 그 레시피도 물어본 거야?”
하지만 주머니에 담겨 있는 모습에 별 의심이나 의견 제시를 하지 않는 영웅.
“자취하다가 언젠가 아프다든가를 대비해서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할 때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평생 병도 잘 안 걸렸던 녀석이…….”
영웅의 말을 무시한 영의는 그 재료들을 곧바로 가지고 국을 끓이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한약 향이 솔솔 올라오지만 국물이 녹색인 탕이 완성되었다.
“……이건, 대체……?”
황준과 지연은 그 결과물을 보고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했으나, 영웅은 이게 정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게 제대로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이대로 약한 불로 끓이다가, 저녁쯤에 한 그릇씩 하고 내일부터 먹으면 될 겁니다.”
“저, 선생님. 저는 아카데미로 가야 하는데요? 매일은 못 먹을 텐데.”
지연은 아무리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이더라도 눈앞의 괴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루에 한 그릇이면 되니까 저녁에 나와서 먹거나 식당 쪽에 잘 말해 두면 되겠지.”
“윽…….”
“그리고, 예전에 말했지?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던 거.”
“그랬……죠?”
지연은 과거 영의에게 가르침을 부탁할 때 소원 하나를 대가로 가르침을 받기로 했었다.
그리고 지금, 저 괴식을 앞에 두고 영의가 소원을 언급하자 지연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설마, 설마……!’
“저거 매일 한 그릇씩 먹어. 그게 내 소원이야.”
“아, 아아아……!”
영의는 지연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지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학부모 면담 이후, 영의는 다른 이들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한 뒤 혼자 외딴곳으로 왔다.
강원도의 한 한적한 국도 옆 주차장.
과거 올림픽을 위해 이것저것 만들던 잔재로, 주차장 옆에 물자 보관용 창고나 공중화장실 등이 있었지만 평일에 이곳을 이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 도착한 영의가 그 자신의 휴대폰이 아닌 다른 휴대폰(더 최신 기종이었다)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고, 착신음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래서…… 약은 제대로 넣었냐?”
“넣었죠. 조금 전에 먹었을 거예요.”
영의는 집에서 나오기 전 사약을 눈앞에 둔 신하의 눈빛으로 최씨 가문 특제 원기회복탕이 담긴 그릇을 노려보던 지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도 그거 진짜 효과 있으니까 날 너무 미워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잘했네. 잠깐만 기다려라.”
용신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라졌고, 영의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곧바로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기억은 제대로 조작했다. 아직 네 형이란 녀석이 그 다른 걸 본 적은 없으니, 네가 뭘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검법을 전수해 준 거라고 조작해 뒀다.”
“다행이네요.”
“그래…… 다행이지. 그리고, 이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지. 이건 네가 봐 둬야 하니까 보여 주는 거야.”
그들은 주차장 겸 작은 관광 스폿에 가까운 장소에 있었다.
그런 관광 스폿의 일환으로, 주차장의 앞에는 산 위에서 풍경 좋은 푸른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와 유명 관광지에 대한 지도와 안내판이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는 다른 관광지와의 거리와 방향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기도 했지만, 용신에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 봐라. 잠깐이지만 차원과의 연결을 보여 줄 테니까.”
짜악!
용신은 손뼉을 치며 양팔을 벌렸고, 그러자 영의의 눈앞에 강원도의 경치에 조금씩 겹쳐 보이는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조금씩 푸르게 물들이기라도 하는 듯, 눈앞에 파란 안경을 쓴 것처럼 조금씩 파랗게 변하기 시작하는 세상.
“이게…… 무슨 일이죠?”
“세상과 세상 간의 접촉면이 표시되는 거지. 다른 차원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이만큼 크다는 거다.”
영의는 과거에 치기 어린 마음에 바다로 나아가 본 적이 있었다.
회사 소유의 마정석 바이크를 운행하는 규정 중 섬이 없는 방향의 해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고, 머나먼 동해 너머로 나아가 본 적 있는 영의.
그는 거기서 자신의 주변이 모두 푸른 바다와 하늘로 메워진 광경에 환희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고, 지금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그때의 바다를 수직으로 세워 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푸르게만 보였지만, 이내 그 푸른색이 머나먼 하늘 끝에서부터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푸른색이 점점 더 줄어들며 마침내 영의의 눈앞, 그가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문인 일반 가정집의 철제 현관문 크기와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문 같네요.”
“실제로도 맞지. 네가 평소에 차원을 아무렇지 않게 큰 의식 없이 건너뛰었던 것도, 저만큼 거대한 출입구가 열려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그럼 지금은 조금 지장이 생긴다는 건가요?”
“아니, 지장은 없지. 아직까지도 너보다는 크니까. 하지만 여기서 더 작아지면…… 더 크게 키우거나, 찢어 내고 들어가야겠지.”
“……찢는다고요?”
영의는 용신의 말을 듣자, 과거 화연을 구하기 위해 신화 길드가 공략하러 갔던 게이트를 떠올렸다.
당시 게이트가 소멸하기 전, 그것을 잡아 찢고 안으로 들어갔었던 영의.
그는 그때 당시를 생각하며, 눈앞에 있는 다른 차원과의 접촉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크기가 줄어들며 완전히 새파란 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눈앞의 접촉면은 게이트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