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1화
외전 25화
“기분 탓이야. 이제 금방 기분이 좋아질 거야.”
“아악!”
하지만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진혁은 힘을 좀 더 빼고 진희의 몸에서 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살폈다. 군데군데 막혀있었고 근육 역시 뭉쳐있었다. 진혁은 사정없이 임진희의 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데 아픈 척하긴.”
“으으으.”
눈물이 맺힌 채 진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나저나 장시간 비행은 성인들도 힘든데.”
“음.”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애들을 데리고 갈 필요가 없잖아. 비행기에서 멀미를 할 수도 있고, 고기압에 약할 수도 있는데. 한두 시간짜리 단거리 비행을 한두 번 해 보고 나서 괜찮으면 조금씩 비행시간을 늘려가는 식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
하지만 진혁은 애들을 떼어 놓고 가는 것이 신경 쓰였다. 이낙호나 엘리엇 조는 열심히 아이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비행이라는 게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가?』
고모의 말에 책이가 궁금해했다. 진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누워 있기만 하면 탈것이 알아서 데려다줄 거야.』
“애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괜히 데리고 가려고 그래.”
진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비행을 말리려 했다.
“애들은 정말로 괜찮을 거야.”
아니, 눈물을 흘리는 건 애들이 걱정돼서라기보다는 그냥 몸이 아파서 그런 것 같았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임진희, 이제 안 아프잖아. 어디서 아픈 척을 하고 그래.”
“흠흠.”
진희가 등을 꼿꼿이 폈다. 이제 몸이 개운해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최후통첩을 보내듯이 말했다.
“난 샤워 좀 하고 자야겠다. 그럼 멕시코 조심해서 다녀오고, 애들은 웬만하면 두고 가고.”
진기가 원활하게 순활하니 목욕을 하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임진혁이 씩 웃음을 지었다.
“그래, 푹 쉬고.”
“응.”
* * *
“아기님이 계속 주무시네요.”
왕이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서류철을 가져와 진혁에게 보여주는 참이었다.
공항까지 이동하는 동안 책이와 명이는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자고 있는 걸 처음 보니 신경이 쓰이는 듯싶었다.
“예.”
집 밖으로 한 번도 나와보지 않았던 책이는 서울에서 이천으로 이동하는 내내 신이 나서 주변에 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주변 상황이 어떤지 꼼꼼하게 살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형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본 둘째 명이도 따라 하다가 일찌감치 기운을 소진하고 잠들어 버렸다.
명이가 잠든 후 체력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첫째 책이도 금방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고 주변에 아무리 소음이 심해도 깨지 않았다.
“비행기를 보면 좋아할 것 같았는데 아쉽네요.”
왕이 비서가 말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제 자주 탈 테니까 괜찮아.”
책이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에 익숙했다. 그러니 멕시코에서 카카오 빈 농장을 보는 것도 분명히 좋아하리라.
여러 차례 전용기에 탑승했던 왕이 비서나 경호원들과 달리 육아 도우미들은 잔뜩 굳어있었다. VIP 터미널을 지나 전용기에 처음 타기까지 내내 긴장한 것 같았다.
‘김포에 이런 터미널이 따로 있었어?’
‘처음 봐.’
마침내 비행기에 탔을 때까지 육아 도우미들은 계속해서 놀라고만 있었다.
‘난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에도 타본 적이 없는데.’
‘여기 타면서 신발 벗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니야…….’
두 사람은 서울에 처음 온 시골 사람처럼 주변을 살폈다.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는 비행기에 갓 올라서자 평범한 호텔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침대와 의자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호텔과 다른 점은 침대나 의자 양쪽의 쿠션 안쪽에 안전 벨트가 설정되어 있는 것 정도였다. 평범하게 옮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안락의자도, 의자 다리가 바닥에 단단하게 못 박혀 있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나 커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칫해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잘 고정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급작스럽게 소집된 승무원들도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맞이했다. 경호 대장이 마주 고개를 숙이고, 진혁을 돌아보았다.
“그럼 내려서 뵙겠습니다.”
“그래.”
경호원들은 전용기의 뒤편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경호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항상 필요 없긴 한데.’
황미미는 진혁에게 반드시 경호가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걱정 때문이었다.
진혁은 자신의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 여러 차례 설명을 하면서 설득을 했지만 실패했다.
‘편리하기도 하고.’
미미와 타협을 한 결과는 간단했다. 경호원 역할과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쓰는 것이다.
현재 함께 있는 직원들은 모두 경호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통역을 할 수 있는 경호원도 있었고, 운전이 아주 뛰어나서 운전기사 역할을 할 수 있는 경호원도 있었다.
왕이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호원 역할을 할 정도는 아니어도 호신술은 제대로 익혔다고 했다.
“고용인분들은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승무원들이 육아 도우미들도 경호원 대기실로 안내하려고 하는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예에?”
엘리엇이 어리바리하게 책이가 잠들어 있는 유모차를 끌면서 따라왔다. 그 뒤에서는 이낙호가 명이가 잠든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아이들을 이쪽에 두시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엘리엇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버님이 혼자 돌보시면 너무 힘들지 않으시겠어요?”
이 아이들은 특히나 체력이 좋았다.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깨어나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른다. 특히나 물건을 집어 던질 때가 위험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인데 계속해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게 힘드실 겁니다.”
이낙호도 진혁을 염려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두 육아도우미를 보면서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애들이 멀리까지 나오느라 피곤했나 봐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잘지도 모릅니다. 일단 두 분은 쉬시죠.”
두 도우미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끔 조심스레 유아 시트에 고정시켰다.
“여기, 띠에 쓸릴 수도 있으니까 수건으로 좀 감자.”
“좋아.”
육아실은 없어도 유아 시트 부착이 가능한 의자로 교체하는 작업은 출발 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돈과 권력은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진혁은 두 육아도우미가 일을 마치고 후방의 대기실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럼 푹 쉬십시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엘리엇이 못내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 * *
다행히도 육아 도우미들은 경호원들과 다른 방에서 머물 수 있었다. 편안한 의자 앞에는 최신식 평면형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원한다면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골라서 시청할 수도 있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평상시처럼 근무해서 출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외 출장을 나가게 되었다. 무역회사원도 아니고, 아기 돌보미로 취업했는데 해외에 나가게 된 상황이다.
지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멕시코에 간다니.’
“엘리엇 씨도 멕시코는 처음입니까?”
국내파 이낙호가 물었다. 엘리엇이 고개를 저었다.
“티후아나는 가본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는 멕시코 여행을 자주 가요. 저렴하기도 하고 가깝고.”
티후아나에는 자주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카카오 농장에는 처음 가본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멕시코 여행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내서 재생했다가 재미없는지 바로 껐다.
비행은 평화로웠다.
당장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힘센 아기를 돌보는 것보다 전용기의 전용실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즐거운 건 당연한 일이다.
리모컨을 붙들고서 이것저것 둘러보던 엘리엇이 중얼거렸다.
“책이랑 명이는 좋겠다.”
이낙호가 말했다.
“얘들하고 비교하면 안 되죠. 지금 전용기 타고 세계 여행하는 한 살짜리가 몇 명이나 있겠어요.”
의자조차도 달랐다.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일반 이코노미석의 의자와는 푹신한 정도가 다르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이낙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 의자도 따로 주문 제작한 안마의자인 것이 틀림없다.
“이 의자, 여기 버튼 누르면 마사지 받을 수 있어요.”
엘리엇은 마사지 의자의 버튼을 눌렀다.
“오.”
이낙호도 사양하지 않고 마사지 버튼을 눌렀다. 의자가 스르륵 올라와서 두 사람을 눕혔고, 가죽 쿠션 너머로 봉이 두들겨 주는 듯한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여기 취업하길 잘했다…….”
편안하고 안락했다.
“태어나길 잘했다…….”
엘리엇이 말끔한 상아색 천장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낙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예?”
“엘리엇 씨, 저희가 돈을 많이 받는 건 비밀 보장 계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그렇죠?”
“책이도, 명이도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다를 정도로 힘이 세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아직 두 살도 되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로 힘이 세면 분명히 근육과 관절에 무리가 갈 겁니다. 앞으로 자라면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히 두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르죠. 부모님이 아무리 돈과 권력이 있어도, 다름 그 자체만으로도…….”
“아…….”
엘리엇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 역시 동양계로서 해외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 놀림을 받았다. 아몬드 모양의 눈, 낮은 코, 그리고 노란 피부.
지금 이낙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이낙호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마사지 기계에 붙잡혀 있어서 목과 허리, 등 모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기형적으로 발달할 수도 있고, 자기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사고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죠.”
“진혁 대표님께서 아직 어린 도련님들을 데리고 출장을 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요.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다.”
“!”
“책이는 선천적으로 근력이 지나치게 강할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똑똑하기까지 합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 겁니다.”
“그런.”
“그때까지 저희들이 그 아이를 지켜줄 수 있어야죠. 남들보다 조금 더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힘들어질지도 모르는데……, 더 나이 먹기 전에 크게 다치거나 죽으면 어떡합니까.”
“이낙호 씨는 정말로 사려가 깊으시네요.”
“명이가 동생을 지키려고 하는 그 모습이 꼭 제 모습 같아서 말입니다. 아직 어린 애가 얼마나 헌신적인지 몰라요.”
“낙호 씨…….”
“엘리엇, 엘리라고 불러도 될까요?”
* * *
보육교사 둘이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동안 임진혁은 왕이 비서에게 지시를 했다.
“파리 회사 근처에 구매할 만한 건물을 찾아 주세요.”
“투자 목적이십니까?”
“투자와 임대요.”
왕이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괜찮은 투자처가 있습니다. 황 회장님의 별장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인데, 이제 이백 년 정도 됐죠.”
“이백 년이요?”
“그 근처에 있는 건물 중에서는 제일 새것입니다.”
“…….”
“회장님이 구입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건물인데 대표님께서 선물하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아, 진희 줄 건데요.”
왕이 비서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추천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