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0화
외전 24화
이곳의 숙소에 머물 예정이었던 페드로 쉐프와 라시드, 무하마드 왕자만이 남아있다. 린드버그 박사는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먼저 돌아간 모양이었다.
진혁이 무하마드 왕자의 옷에 묻어있는 그을음을 살피는데 라시드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아기들을 올려다보았다.
「아기가 아주 귀여워요.」
아기를 본 적은 있었다. 뒤늦게 태어난 일곱 살과 여섯 살, 세 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인 아기는 처음이었다. 라시드의 동생들은 모두 피부가 갈색이고 머리카락이 새까맸는데, 이 아기들은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이 짙은 다갈색이었다.
「머리가 갈색이에요.」
「이 머리카락은 자라면서 점차 검게 될 겁니다.」
진혁이 웃었다. 아들 자랑은 언제 해도 지치지 않았다. 그는 안고 있던 장남을 살짝 들어 올려 주었다.
「이 아기가 책이입니다.」
무하마드 왕자가 아이를 마주 보며 웃었다.
「채기! 네가 장남이구나. 아주 아버지를 쏙 뺐군.」
진혁은 칭찬을 들으며 흐뭇해했다. 페드로 쉐프는 옆에 서 있던 명이에게 다가갔다.
「그럼 얘가 둘째군요? 이름이 묭?」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엘리엇이 안고 있던 둘째가 울음을 터트렸다.
“와아앙!”
명이는 무하마드 왕자가 머리에 쓰고 있는 터번도, 짙은 색 피부도 처음 보았다. 이국적인 복색을 하고 있는 무하마드 왕자가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었다. 책이 역시 처음 보는 아랍인과 그 복장이 신기한 모양인지 계속해서 시선이 왕자를 따라갔다.
엘리엇이 황급히 아기를 달래며 쪽쪽이를 입에 물렸다. 그리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익숙한 것이 입에 들어오면서 낯선 사람과 멀어지자 명이가 다시 진정했다.
엘리엇이 말했다.
“저는 차에 가 있을게요.”
“예.”
진혁이 책이를 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곤 무하마드 왕자에게 물었다.
「불이 났습니까?」
「오, 불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 아주 사소한 사고였지.」
라시드가 첨언했다.
「돌아가신 후에 다섯 명의 다른 참가자들이 음식을 내놓았어요.」
「그리고 불이 났지.」
처음 보는 오븐으로 요리를 해보려다가 새까맣게 태운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해서 별 문제 없었어.」
소방차가 올 필요도 없는 조그만 화재였다고 한다. 진혁이 장남을 꼬옥 안으며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작은 사고라고 해도 불똥 하나라도 튀기면 누구나 다칠 수 있다. 진혁은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오늘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일 것이다.
‘저 사람들도 부모가 있겠군.’
타인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다친 음식만 있지. 아참, 진희 씨가 맹활약했어.」
「진희가요?」
불이 난 순간, 복도에 있던 임진희가 바로 뛰어들었다며 페드로 쉐프가 거들었다.
「무거운 소화기를 주걱처럼 가볍게 들고 움직였습니다.」
비상용 소화기를 들고 맨 앞에서 소화기를 흩뿌려서 무사히 화재를 진압했다며 무하마드가 즐겁게 이야기했다.
「진희가 그런 일을요.」
임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진희는 어디에 있습니까?」
「숙소에서 휴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희를 보러 가겠습니다.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군요.」
「아무렴 그렇게 해야지. 우리가 병원에 가기를 권했는데 거절하더군. 피를 나눈 남매이니 잘 설득하게나.」
무하마드 왕자가 품위 있게 말했다.
「심사를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네 명은 모처럼 조리한 음식이 완전히 그을음에 거슬려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예 심사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저도 전에 제과제빵 대회를 할 때 불이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진혁이 옛일을 이야기하려는데 무하마드 왕자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본선 일정은 이틀 후에 시작할 거야.」
「내일이 아니고요?」
「주방을 수리해야 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진혁이 납득했다.
「그럼 저도 이틀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여기서 머물러도 좋아. 귀빈용 숙소는 마련되어 있으니까, 아예 아기님들도 같이 데리고 머물지그래? 고용인들 별채도 딸려 있어.」
‘그런 것까지 같이 짓느라 대회장 준비가 오래 걸렸군.’
아랍 왕족의 스케일에 진혁이 혀를 찼다. 그는 안고 있던 장남을 내려다보았다.
‘대회까지 완전히 끝났으면 굳이 돌아올 필요가 없었을 것을 그랬군. 괜히 애들까지 데리고 나왔나?’
하지만 책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동차 안에서부터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책이가 자동차를 처음 타던가?’
보통 어린아이들은 예방접종을 할 때 처음으로 외출해서 병원을 방문한다. 하지만 황미미는 소아과 주치의를 고용해 의사가 방문해서 주사를 놓게끔 했다. 백일잔치도, 돌잔치도 전부 집에서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책이가 처음으로 바깥으로 나온 날이네』안전을 신경 쓰는 황미미는 아기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진혁은 장남을 고쳐 안았다.
『기계 탈것에 나를 묶어서 데리고 와서 고문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책이가 전음을 보내왔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다음에는 거기에 쿠션을 좀 더 대자고 해야겠네.』
차 안에서는 창밖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여기 와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뭐가 제일 신기하려나.’
움직이는 차들과 오가는 사람들, 새로운 의복.
그리고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웠다.
「진희의 숙소가 어디인지는 아십니까?」
「아, 내 비서가 안내해 줄 걸세.」
무하마드 왕자가 고갯짓을 했다.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앞서 나왔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 * *
“진혁아!”
이제 대회가 끝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던 진희가 다가왔다.
“어머! 우리 조카님들 첫 외출이네.”
명이는 신기한 듯이 두리번거렸다. 낯선 공기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엘리엇은 명이를 고쳐 안았다. 반면에 책이는 근엄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여기 안쪽으로 들어와.”
“너무 좁은데?”
진혁이 숙소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임진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방 하나만 해도 12평은 될걸?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숙소인데 작은 방은 아니지.”
임진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는 보안이 좋지 않아.”
그는 들어올 때 입구의 경비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험한 곳이니까 나가자. 가방 챙겨.”
임진희가 눈알을 굴렸다.
“아냐, 아냐. 오버하지 마. 내 파리 숙소는 6평도 안 돼.”
“파리 숙소도 다시 잡아 줄게. 그쪽에 미미 씨 명의의 별장이 있는데 아예 거기서 출퇴근을,”
“이 과보호 팔불출아! 안 그래도 된다고.”
진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올케에게 안 좋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회장님 별장이지 네 별장이야? 어디서 네 멋대로 남의 집을 빌려주려고 해.”
“내가 말하면 빌려줄걸?”
“그렇지. 네가 말하면 빌려주겠지.”
“……?”
“…….”
책이가 진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회장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 어머니인가?』
『맞아.』
『고모와 어머니가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닌가 본데.』
『……그럴 리가 없는데? 서로 아주 좋아하는데.』
『네 앞에서는 그렇겠지.』
『!』
진혁의 동공이 흔들렸다.
황미미는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진혁의 가족들에게 100% 맞추어 주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자신의 생활을 해나가면서 조금씩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을 긋는 것을 제일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임진희였다.
『그런데 너 이제 한국말을 알아듣네?』
책이 머뭇거렸다.
『알아들을 수는 있어, 말을 잘 못 해서 그렇지…….』
우리 책이가 한국말을 해요!
장남이 외국어도 잘한다!
“진희야, 책이가 한국말도 잘 해.”
진혁은 크게 기뻐서 그만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진희는 그 말을 그저 웃어넘겼다.
“그럼 한국말을 하지, 영어를 하겠어?”
“음.”
“책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날 볼때마다 고모 고모 하고 인사한단 말이야.”
진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책이를 바라보았다. 진혁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너 대회 끝나고 바로 파리로 돌아가?”
“아니, 이틀 더 있다가 갈 거야.”
“나랑 같이 가.”
“……전용기 타고 갈 거야?”
“어, 그러지 뭐.”
“알았어. 그럼 같이 갈래.”
진희가 씨익 웃었다. 그녀는 전용기를 딱 두 번 타 봤는데, 정말로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파리에 있는 숙소가 마음에 들어. 회사 바로 앞이고, 전망도 좋단 말이야. 보안도 괜찮아.”
“6평짜리라며.”
“파리는 원래 다 그래.”
“알았어.”
임진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혁의 ‘알았어’는 ‘일단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라고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오늘 밤에 애들 데리고 멕시코에 다녀올 거야.”
진희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요 앞에 있는 멕시코 식당 말이지? 키즈 체어가 있는.”
“아니? 호르헤스 농장.”
푸드 팩토리의 카카오 빈 거래처.
『우리를 데리고 멕시코에 간다고?』
지금 황 그룹의 전용기는 다섯 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중 한 대가 진혁이 사용할 수 있게 김포의 자가용 비행기 터미널 격납고에서 주기하고 있었다. 이곳의 VIP 터미널은 보안 검색과 출입국 수속, 검역, 세관 통관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어 통관 절차가 빠르게 끝난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응, 지금 바로 출발하면 돼.』
왕이 비서는 유능했다. 그는 이미 호르헤스 농장의 농장주에게 연락을 해서 익일 방문이 가능한지 물었고, 가능하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전용기가 출발할 수 있도록 연락도 마쳤다.
이 자가용 비행기 특별 터미널의 직원들은 평소 상주하지 않고, 하루 전날 미리 연락을 해야 출근을 한다.
진혁은 새벽에 바로 출국할 계획이었다. 그럼 호르헤스 농장에 갔다가 바로 돌아올 수 있다.
“너도 같이 갈래? 호르헤스 농장에 가본 적은 없지?”
“음.”
진희가 갈등했다. 카카오 빈 농장에 실제로 방문해본 적은 없었다. 여기서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보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는 거지? 대회에는 참가할 수 있고.”
“그렇지. 나도 심사해야 하니까 시간에 맞춰 돌아올 거야.”
임진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는 데만 18시간이 걸리는데, 그러면 가서 두세 시간 있다가 바로 돌아와야겠네?”
“그렇지.”
“나는 패스.”
아무리 전용기로 간다고 하더라도 장시간의 비행은 피로가 쌓이게 마련이다. 진희가 질린 듯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아기들을 데리고 그런 장시간 비행을 하겠다고? 애들은 두고 가.”
진혁이 책이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기를 잠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책이는 불평하지 않고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진혁이 임진희에게 손을 뻗었다.
“이 애들은 너보다 더 튼튼하고 건강할걸?”
진혁은 혈연에게 애정을 담아 혈점을 쿡쿡 찔러 주었다.
“억! 야! 으악! 잠깐만!”
추궁과혈.
이전에는 종종 해 주었지만 최근 일 년간은 바빠서 해 줄 수가 없었다.
“이 안마를 받고 나면 훨씬 몸이 좋아질 거야.”
진희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파! 아파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