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14화 (512/656)

제 514화

「이렇게?」

진혁은 소년의 몸속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심장 근처의 맥이 좋지 않았다. 타고난 기혈도 약하나 심장 근처에 맥이 유독 약한 부분이 있었다. 진혁조차 이름을 모르는 보약과 영약의 기운이 가득했다. 보약의 기운이 어찌어찌 아이를 계속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왕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벌써 예전에 죽어버렸을 몸이다.

‘이 녀석, 나름 운이 좋군.’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운 좋은 점은 임진혁을 만났다는 것이다. 진혁을 만나지 않았다면 10대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진혁은 소년의 심장 부근으로 진기를 살짝 흘려보냈다.

절정 고수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약하기 그지없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기혈에 함부로 진기를 더했다가 터져버리면 그대로 죽는다. 그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완전히 낫게 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됐어.’

이곳에는 모두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진혁과 아이의 만남 역시 기록되고 있다. 희귀한 질환에 시달리던 아이가 진혁과 접촉하고 나서 나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귀찮다.

‘CCTV를 부수면 기록 영상도 일부 빠지니까 귀찮아.’

미미가 이전에 이 점에 대해서 진혁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능력이 알려지면 탐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어지간한 이들은 제가 다 입막음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랍 왕가를 포함한 이 사람들은 어려워요.」

「굳이 입을 막을 필요가 있습니까? 죽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권력자들이 죽으면 전쟁이 날 거예요.」

「집안싸움을 하느라 바빠서 외부의 사소한 문제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되겠죠.」

「그건 그렇겠네요. 하지만 누군가 죽지 않고서도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시 진혁은 미미의 의견에 납득했다. 가족 이외의 누구에게도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몸이 가벼워졌는지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어어?」

당장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차차 몸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와작.

어린 왕자는 방금 전까지 할짝할짝 핥고 있던 사탕을 힘차게 깨물어 먹었다.

「사탕이 더 맛있어졌어요.」

진혁이 싱긋 웃으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소년과 더 이상 눈 맞춤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럼.」

그는 정원의 다른 구역으로 향했다. 화려한 열대 식물이 드넓은 녹색 잎새를 펄럭이는 곳에서 숨이 차 헉헉거리는 아랍인을 만났다.

아까 마주쳤던 이와 다른 사람이었지만 용건은 같았다.

「임진혁 쉐프님, 무하마드 왕자님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사업상의 중요한 일 때문에-.」

「그렇습니까.」

진혁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걸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축지법의 묘리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그가 조금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일반인들은 전부 뒤처져 그를 쫓지 못했다.

본디 손님들은 하루 이틀 정도 머물다가 떠나고 새로운 손님들이 오기 마련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혼식장을 방문한 손님들은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더 손님이 늘었고, 음식도 빠르게 줄었다.

이틀째 되는 날 밤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모여 간단하게 중간 점검을 했다.

「이 상태로라면 유통기한이 짧은 음식들을 새로 보충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너무 오래가는 음식들만 남아있어. 예상보다 손님들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니까 말이야.」

루이스가 의견을 냈다. 진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율이 조금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너무 단 음식들만 남아있어.」

마리오가 한숨을 쉬었다.

「오래가는 것들은 대부분 설탕이 들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슈가 크래프트와 마지팬 공예만이 아니라 리치 후르츠 케이크도 있으니까 괜찮아. 달면 알아서 집어 먹겠지.」

「달콤해도 맛있으니까 질리지는 않을 거예요.」

진혁이 말했다.

「새로이 추가되는 손님들을 위해서 새벽 시간에 미디 푸드 블록들을 보충할 수는 있어. 300인분 정도는 소화할 수 있을 거야.」

「뭐, 와서 거의 안 먹는다더니 다들 잘만 먹는구먼.」

마리오가 투덜거렸다.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사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맛이에요. 맛있는데 안 먹을 수는 없지. 나라도 먹을 거야.」

진희의 말에 루이스도 동감했다.

「애초에 너무 적게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양을 잡은 것 자체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          ◈          ◈

보석이 박힌 비단 터번을 쓴 무하마드는 연회장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째서 비서 열두 명 모두가 사흘째 임진혁을 찾아오지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불렀다고 말 한마디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말이야! 고작 그 말 하나 하는 게 그리 어렵나?」

「현재 연회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중이라 연회장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감독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찾기도 어렵고, 막상 찾으면 말을 걸기도 전에 금방 없어져 버린다고 하더라구요.」

「램프의 지니도 아니고 두 발 달린 사람이 이곳에서 안 보일 리가 없지 않나. 에이! 핑계 대기는. 차라리 내가 직접 오마르에게 소개를 받는 게 빠르겠어.」

무하마드는 입맛을 다셨다.

「꼭 이 페이스트리 쉐프를 데려오시지 않아도 좋을 텐데요. 로얄 키친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요리사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아니, 아니. 난 이 사람이 마음에 들어. 여기에 있는 음식들 전부가 하나같이 맛이 좋아. 단 것을 잘 만드는 요리사는 단것만 잘 만들고, 탕을 잘 끓이는 요리사는 환상적인 탕을 끓이지 않나. 그런데 이렇게 모든 음식의 질을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재능이야. 뭘 먹어도 다 맛있어. 이 사람을 꼭 내 개인 주방으로 데리고 가고 싶네.」

무하마드는 자신이 나름 미식가라고 자부하였다.

「맛있는 게 뭔지도 모르는 오마르 녀석이 어디서 이런 사람을 낚아채 왔는지 모르겠어. 내 딸의 결혼식 때 이런 쉐프를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

임진혁을 쫓아다니면서 여러 번 거절당한 전적이 있는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자님, 그는 이미 자신의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으니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무하마드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 오마르가 연회에 쓴 돈이 얼마 정도라고 했지? 1,000억 정도? 이런 일을 맡아서 할 정도라면 과시욕이 있고 돈 욕심이 많은 타입이야. 명예에 대한 욕망도 넘치고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들 다루는 법은 좀 알지」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돈을 좀 쥐여주면 누구라도 꼬리를 흔들면서 오는 법이야.」

◈          ◈          ◈

무하마드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손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진혁은 온갖 종류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아왔던 성을 이번에 리모델링했습니다. 그 성을 케이크 모형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은데요.」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분이 결혼식에서 이탈리아식 성과 갑옷을 훌륭하게 재현하는 일이 있었죠.」

「어머, 그분은 이미 유행이 지났잖아요.」

진혁이 빙긋 웃었다.

「아주 훌륭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시리즈 영화를 계속해서 찍어온 유명한 배우가 넌지시 물어왔다.

「이번에 내가 요트에서 갈라 디너쇼를 하려고 하는데 케이크로 과자의 집을 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내가 아주 좋아할 겁니다. 헨젤과 그레텔을 테마로 해서 본격적인 과자의 집이었으면 좋겠는데, 언제쯤 시간이 되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요청이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진혁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분간은 어렵습니다.」

「돈이라면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 임진혁 쉐프님? 쉐프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진혁은 그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결혼식장은 넓기 그지없어 그가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는 추가적인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드디어 만났군, 임진혁 쉐프.」

금목걸이에 비단 예복을 갖추어 입고 불룩 나온 배를 당당하게 내민 무하마드 왕자였다.

「이번에 결혼식장에서 놀라움이면 놀라움, 맛이면 맛 전부 빠지지 않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지. 아름다운 케이크는 맛있기가 어렵고, 맛있는 건 못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내가 누군지 모르나? 무하마드 알 빈이다. 신부의 삼촌이 되지.」

비서들이 만나지 못했다고 하자 아예 진혁이 확실하게 올 장소에서 기다린 것이다.

마침 주방에서 할 일이 있던 진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안녕하십니까.」

「긴말할 필요가 없지,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네.」

무하마드가 턱짓하자 옆에 서 있던 비서가 명함을 건넸다.

왕자 본인이 아닌 비서의 연락처가 적혀있는 명함이었다.

진혁은 그 명함을 받았다.

「그럼 연락주게나.」

무하마드 왕자는 당당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리오가 주방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 아저씨 갔어?”

“방금 여기에 있었던 왕자 말하는 거지?”

“신분 높고 배 내밀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 그 사람도 왕자야? 하여튼 이 결혼식장에는 왕족이 아닌 사람이 드물구만.”

처음에 실제 아랍 왕족을 보았을 때는 신기했지만 이제 너무 많이 봐서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며 마리오가 투덜거렸다.

“갔어. 왜?”

“아니, 여기서 하루종일 서서 너 언제 오는지 찾잖아.”

“흐음.”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귀찮았어?”

“음, 뭐. 귀찮기만 한 건 아니었어. 그 사람 잘 먹어서 그런지 미각은 진짜 귀신같더라. 푸드 블록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재료가 뭐 들어있는지, 어디서 어떤 걸 썼는지 다 알더라고.”

마리오가 신나서 말했다. 진혁이 흥미롭게 말했다.

“예를 들자면?”

“처음에 송로버섯 디저트 이야기하면서 이거 그 경매에서 구한 송로버섯 아니냐고 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 그건 소문이 꽤 퍼졌으니까 그 이야기 듣고 적당히 아는 척할 수 있잖아. 그런데 진짜 이탈리아산 모짜렐라 치즈하고 한국에서 우리가 만들어온 생 치즈를 귀신같이 구분하더라고. 물소젖 치즈하고 우유 치즈는 당연히 다르지 않냐면서.”

진혁이 킥킥 웃었다.

“다르지. 보면 알잖아.”

“아니, 그걸 어떻게 일일이 구분해. 난 못한다고.”

루이스가 물었다.

“저 사람이 뭔가 또 행사 맡기려는 거 아니야? 진혁 네 다음 계획은 어떻게 돼?”

진혁이 싱긋 웃었다.

“당분간은 ‘해와 달’에 집중하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이쪽에 있으면서 미미 씨가 찾아오지도 못하고 바빴으니까.”

“이제 좀 신혼을 즐기는 새신랑 느낌이 나네. 전에는 그런 소리 하지 않고 바로 대회 나가고 그랬잖아.”

“나는 그보다 왕자가 어떤 조건을 내세우면서 스카웃을 하려고 할지 궁금한데. 왕족씩이나 되니까 손도 클 거 아냐.”

“연락 안 할 건데. 조건도 안 궁금해.”

“하긴… 네가 지금 궁금한 게 뭐가 있겠냐… 나도 결혼하고 싶다.”

마리오가 흘린 말에 루이스가 어이없어했다.

“일단 연애부터 하고 말해.”

“원래 결혼식장에서 사람들 만나서 자연스럽게 친해지려고 했는데, 여기는 완전히 남탕이잖아! 이럴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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