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13화 (511/656)

제 513화

진혁은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말끔히 다듬어져 있고, 피부나 손톱도 곱다. 언뜻 보기에는 영양 상태가 좋은 것 같지만 안색이 창백하고 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 더 왜소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바닥과 벽재만 빼고 다 먹어도 됩니다.」

진혁은 꽃줄기를 또각 하고 부러뜨렸다. 그는 방금 부러뜨린 사탕 조각을 소년에게 주며 덧붙였다.

「이건 좀 덜 달 겁니다.」

줄기 조각을 받은 소년이 눈동자를 굴렸다.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을 본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줄기 안쪽은 복숭아 맛인데요,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덜 답니다.」

소년은 미적거리며 냄새만 맡았다.

‘얘 좀 봐라?’

낯선 사람이 준 음식을 먹기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줄기 사탕을 한 조각 깨물어 보였다.

「아, 맛있다.」

소년은 방금 받은 사탕을 보고 진혁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아삭, 하고 사탕을 깨물었다.

어두웠던 표정이 환해졌다.

「맛있어!」

진혁이 싱긋 웃었다.

「어떻습니까.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요. 여기에 있는 다른 꽃가지를 꺾어 드셔도 됩니다.」

「아!」

소년은 신이 나서 옆에 있는 꽃들을 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면서 조그마한 꽃잎을 하나 뜯었다. 하지만 꽃잎이 입안에서 살살 녹아 사라지자 참지 못하고 다른 것들도 뜯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예 가지째로 꺾어서 손에 들었다.

진혁은 흐뭇하게 어린 손님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사탕 꽃 먹기에 몰두하던 소년은 문득 허리를 폈다. 아이는 허리를 펴고 나름 근엄한 자세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왕족의 품위를 지킬 줄 안다구.」

입가에 얼룩덜룩하게 사탕 조각이 붙어 있지만, 표정만은 엄숙하다. 진혁은 어린아이에게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렇죠. 왕족은 단것도 아주 잘 먹습니다.」

소년은 흠칫 놀란 듯 눈알을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우움.」

사탕을 우물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진 소년에게 진혁이 말을 걸었다.

「오마르 왕자님도 단 것을 좋아하시던데요.」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아빠가?」

‘얘가 그 몸이 약하다던 막내아들인가보다.’

다른 가족들은 전부 건강해 보였는데 혼자 비실비실해 보이긴 했다. 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아이에게 말했다.

「여기 사탕 정원도 전부 왕자님의 아버지께서 짓자고 해서 지은 겁니다.」

「그렇지? 역시 우리 아빠는 대단해.」

앳된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한 눈썹에 다갈색 피부, 그리고 또렷한 코에 튀어나온 광대.

인종도, 종교도 나이도 다르지만, 진혁은 이 소년을 보면서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나도 다섯 살 때 즈음에 이랬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득한 옛날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초롱초롱 빛나는 이 소년의 눈동자를 보니 새록새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진혁도 비슷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밀가루를 주물럭거려 순식간에 빵으로 만들어내고 불과 물을 자유롭게 다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크고 세 보였다. 원한다면 아버지는 하늘에서 달도 따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그 믿음은 부서지고 망가져 버렸다. 진혁은 어느샌가 아버지보다 더 키가 커버렸고 종일 좁은 주방에 갇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아버지를 우습게 여겼다.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서 브랜드 옷을 턱턱 사 주는데 우리 집은 그렇지 못한 것이 눈에 밟혔다.

‘나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좋아하면서 무서워했지. 하지만 십 대 때는 생각이 바뀌었어.’

대개 아버지란 아들이 삶에서 친밀하게 접하는 첫 번째 남자 어른이 된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우상처럼 숭배하며 따르게 되나 어느 시점에서 아버지가 태산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혁에게 있어서는 그 시점이 사춘기 때였다.

‘어지간히 반항했고 아버지와 다투기도 많이 다퉜어.’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시키는 일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마땅히 자기 의견을 주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군대에서 겪었던 부조리한 일들과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말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했다.

‘그땐 그랬지.’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 서툴렀던 과거의 자신에게 부끄러울 정도다.

‘멍청했어.’

기나긴 삶을 살고서 아버지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아버지보다 나이를 먹어버린 이 시점에 와서도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존경할만한 분이야.’

지금 와서 보면 더욱더 그렇다. 지금 이곳에서 결혼식장을 건설하는 데에 아버지는 참가하지 않았다.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현장, 역사의 한순간으로 남을만한 거대한 케이크-겸 결혼식장.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구하면서 유명한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저마다 이력서를 던지며 참여하고자 했다. 유명 제과 대회에서 수상했던 이들부터 자신의 가게를 경영하고 있는 오너 쉐프, 그리고 호텔에서 일하고 있던 최상급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서류가 대거 밀려 들어왔다. 누구라도 진혁과 함께 일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진혁은 그중 실력이 좋고 성실한 이들을 골라야만 했다.

그러나 진혁이 직접 찾아가서 요청했는데도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임운정.

아버지는 그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소망 베이커리에는 내가 있어야 돼. 열대에 있는 작은 섬을 장식해서 거대한 웨딩 케이크처럼 만든다, 결혼식장을 화려하게 한다, 다 좋단 말이지. 그런데 거기에 내가 꼭 있어야 되냐? 아니잖아.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만의 그릇이 있는 거야. 나는 내 가게를 지키는 게 좋아.”

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학생들도 가르치고 텔레비전에도 나와 보고, 유명해지기도 했지. 그런 건 다 소용없는 거야. 그냥 내 가게를 내실 있게 다지는 게 제일 좋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면 난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그 일을 내가 같이 하지 않아도 된단다.”

“….”

“아버지를 키워주지 않으려고 해도 괜찮아. 난 이미 충분히 바쁘거든.”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맞다.

아버지에게도 좋은 경력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일부러 아버지의 자리를 빼놓고 권했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아버지는 아직 어리다.

아직 예순 살도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아버지에게는 앞으로 살날이 꽤 길다. 지금까지 살아온 정도의 삶, 즉 백이십 살 정도까지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러니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일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이 좋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냥 지금처럼 살면서 소망 베이커리에서 빵을 구워내는 게 좋다고 하셨지.’

평생 살아왔던 좁은 주방.

그곳에서 앞으로도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작고 아담한 공간 속에 머무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진혁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조금 더 다양한 일을 하며 새로운 케이크를 개발하고 싶었다.

‘좁은 우물에 갇혀 있는 아버지가 답답하실까 꺼내 드리려고 했는데 말이지.’

이 왕족의 결혼 연회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여 실력도 기르고 경험도 쌓게 해주고 싶었다. 앨리슨의 방송을 통해 ‘동네 빵집에서 빵 굽는 임진혁의 아버지’가 아닌 ‘페이스트리 쉐프 임운정’이 유명세를 쌓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생각보다 그 유명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너무 유명해지니까 외지 뜨내기들이 계속 오느라 우리 할머니들 줄 빵도 남아나지를 않네. 경로당에 보낼 빵은 아예 따로 구우면 되지. 그런데 동네 손님들이 못 오니까 다른 가게가 된 것 같아.”

아버지께서는 함께 늙어가는 동네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이야기하셨다.

“학교 다니던 애가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도 내 빵을 먹으러 온단 말이지. 느이 엄마가 하는 집밥 맛인 거야. 난 내 가게가 자랑스럽다.”

사춘기 때에 했던 실수와 같다. 얼마 전에 진희에게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했던 때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어.’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멋대로 도왔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도움은 때로 기만이나 폭력일 수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하루하루 같은 일을 반복하며 더 나아가고 있다. 그 삶에 대한 태도는 구도자의 그것과도 닮았다.

절의 승방에서 끊임없이 수련하고 구도하며 고뇌하는 주지승을 떠올렸다.

‘오마르 왕자의 딸은 과연 이 결혼식장을 좋아하고 있을까?’

아랍 왕족의 여인은 가족이 아닌 남자를 만날 수 없다. 아버지를 만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라고 들었다. 그렇기에 진혁은 오늘의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서면으로 소망 사항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즐거워해 줬으면 좋겠는데.’

오마르 왕자가 만족스러워하는 만큼, 오늘의 주인공 역시 기뻐하기를 바랐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진혁에게 소년이 말을 걸었다.

「우리 아빠는 말도 있어! 세계에서 제일 빠른 말인데 내 이름을 따서 말 이름을 지었어.」

어린 왕족은 나름대로 자기 자랑을 했다. 조금 전까지 주눅 들어 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꼿꼿하게 턱을 세우고 열심히 말했다.

「아버지는 너무 바쁜 사람이라 자주 올 수 없어. 그래도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아빠가 보러 올 거야.」

‘아버지가 중요한 사람인 만큼 더 압박감을 느끼고 있군.’

어린 소년은 아직 아버지를 우상처럼 여기고 있었다. 아버지가 너무나도 큰 인물일 경우 아들은 존경하며 친밀하게 따르거나 아니면 아예 증오하며 거리를 두게 된다. 당장 황태명의 아들만 해도 아버지와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진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를 존경하시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아버지를 존경해! 너도 존경해야지.」

지금 이 소년에게 있어서 아버지 역시 그렇게 위대하고 큰 인물이리라. 확신에 가득 찬 그 눈동자를 보며 진혁이 말했다.

「몸이 아픕니까?」

「가끔 여기가 아파.」

소년은 왼쪽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심장이 위치한 곳이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아픈 것도 낫고, 아버지가 날 자주 보러 올 거야.」

오마르 왕자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다. 아들만 열여덟 명이 넘는다. 그러니 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혁은 이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가의 자손이니만큼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최고의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다. 먹을 것 때문에 고민해 본 적도 없이 비단옷과 보석을 걸치고 자랐다.

그렇지만 아버지와는 가깝지 않다.

「제 손을 잡아 보시죠.」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