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488화 (486/656)

제 488화

똑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자 진혁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셋 중 하나라는 이야긴데.’

◈          ◈          ◈

「월드 페이스트리 컵 참가자 여러분들은 무대로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우승자를 발표할 때가 왔다. 이미 누가 우승했는지 거의 짐작하고 있던 임진혁은 태연하게 서 있었다.

브라이언이 말했다.

「미미 씨가 와 있네.」

「제시카 씨는?」

진혁이 브라이언의 아내는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브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보조 역할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부르지도 않았어.」

제시카는 브라이언이 이런 행사에 나올 때마다 오고 싶어 하긴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거절해 왔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영위하고 있는 아내가 휴가를 내서 올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심호흡을 했다.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였어. 제시카가 모처럼 휴가까지 내서 와 줬는데 내가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어. 가게를 보는데 사람이 몰려 있으면 인사도 못 하고. 빵이라도 하나 챙겨 주고 싶은데 그럴만한 시간 여유도 없고.」

브라이언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가게를 열었지만, 손님이 전혀 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두 명이 왔을 뿐이다. 축하해주기 위해서 들른 제시카는 회사에 갖다 준다며 브라이언이 만든 빵을 잔뜩 사 갔다.

고마웠지만 비참했다. 가게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어볼 때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던 참이었다. 치부를 들킨 느낌이었다.

이후에 제시카는 브라이언의 가게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믿고 기다려 주었다.

브라이언은 가게를 폐업했고, 그리고….

지금 여기에 와 있다.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들어 간 브라이언에게 진혁이 물었다.

「지금 대회는 가게 영업하고는 상관없잖아?」

「네가 집중하는데 내가 있는 힘껏 도와야 하잖아. 그런데 내 가족이 저기 와 있으면 내가 신경이 쓰일 수도 있고 하니까. 너한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어.」

「나? 나한테 걸림돌이 될 게 뭐 있어. 네 가족이 오는 건데.」

진혁을 위해서 아내에게 오지 말라고 했다는 변명이다.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그런 셈이긴 한데. 사실은 나를 위해서지? 징크스 같은 건 아니지만 제시가 올 때마다 자꾸 뭔가 일이 생기더라고. 그런데 이건 왜 자꾸 물어봐?」

브라이언이 툴툴거렸다.

「지금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는 대회 때문에 긴장하고 힘들어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위로해 주어야겠지. 오히려 네가 날 신경 쓰고, 내 가족에 대해서 물어봐 주는 건 고맙긴 하지만 말이야. 내가 여기에 왜 와 있냐. 네 보조로 와 있는 거잖아.」

진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이 질문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럼 지금 저기 제시카 씨가 와 있는 건 모른 척해줘야겠네.」

진혁이 가리킨 쪽에는 이슬람교도처럼 검은색 천으로 머리카락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있었다. 부르카를 입고 있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 뭐라고?!」

브라이언은 정말로 당황했다.

진혁이 말하지 않았다면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가 제시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보니 유사한 점이 보였다.

“저 스마트폰이랑 폰 액세서리를 보니까 제시카 같기도 하고.”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거렸다.

“제시카 씨 맞아.”

“제시는 이슬람교가 아닌데.”

“날도 더운데 왜 저렇게 입고 왔겠냐?”

“내가 오지 말라고 해서….”

브라이언은 눈을 힘차게 깜빡거렸다.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떨리는 눈가의 근육을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나 때문에 와 준 거구나.”

지금이 아주 바쁜 시기인 걸 아니까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옷을 뒤집어쓰고 가장하고서 보러 왔다. 눈치채지 못했다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혁이 핀잔을 주었다.

“그럼 설마 날 보러 왔겠냐.”

“그냥 솔직하게 오고 싶다고 했으면 오라고 했을 텐데.”

한참 동안 감동에 잠겨 있던 브라이언이 문득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런데 임진혁, 너는 저 사람이 제시인 줄 어떻게 알았어? 나도 못 알아봤는데.”

진혁이 화제를 바꾸었다.

“저기 미미 씨가 나한테 윙크했어.”

“어! 나도 인사해야지.”

브라이언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눈가에는 살짝 눈물을 글썽이는 채였다.

‘이렇게 단순한 점은 마리오하고 똑같다니까.’

「이번에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준우승이 2명 그리고 우승으로 1명을 선정했습니다.」

보통 금, 은, 동 세 명을 선정한다.

이번에는 1, 2, 3위가 아니라 1위 1명에 2위를 2명 선정했다는 말에 참가자들이 술렁거렸다.

「호오.」

「그 셋 중에 하나겠지.」

주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난 틀렸지만 혹시….’

모카 F. 캘러한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어. 킹스 케이크를 내놓았으니까 만족해.」

아까까지 대기실에서 진혁에게 치근덕거리던 때와는 달리 여유 있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반면에 아까도 긴장해 있던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은 무대에서 정말로 얼음 기둥처럼 서 있었다. 주먹을 꽉 쥐고서 자신의 양 눈을 가린 모습이었다. 눈을 가리면 누가 수상했는지 모를 것처럼 말이다. 토마스의 보조가 관객석을 보고서 소곤거렸다.

「저기 토마스 씨 가족들 와 있는 거 아니에요?」

토마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그 사람들은 바쁘다고 해외 출장은 잘 안 나가. 홍보팀 이사를 맡고 있는 데르케라면 모를까.」

「음」

보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토니오 바트는 드디어 은회색 봉투를 열고 대상자가 누군지 말했다.

「준우승 영국! 모카 F. 캘러한, 축하드립니다!」

캘러한이 자랑스럽게 앞으로 걸었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작업용 부츠를 신고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언제 갈아신었는지 혼자 구두를 신고 있다.

캘러한의 지인과 제자들, 팬클럽 회원들이 관객석에서 손뼉을 쳤다. 안토니오 바트가 두 번째 봉투를 꺼내어 열었다.

브라이언이 주먹을 꽉 쥐었다.

“너일 수도 있어. 그럼 네가 최연소로 수상자가 되는 거야.”

진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덴마크 팀의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 앞으로 나와주세요. 준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진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내가 우승이 아닐 줄 알았는데.”

그는 우승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기에 그는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를 비롯해 슈퍼스타 페이스트리 쉐프들에게 배운 온갖 기술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러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필요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주제를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허례허식 같기만 했다.

‘단순한 기술로도 살인(殺人)하는 데에는 충분해.’

화산파의 매화검법은 꽃잎이 흩날리는 것과 같은 극도의 쾌(快)를 추구한다. 쾌검술의 초식은 마치 검무와도 같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이름 높은 화산파의 장로들도, 화려하고 장식적인 초식을 자랑할 새 없이 한칼에 죽었다. 무엇이라 해도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날카로운 칼끝이 살갗을 파고들어 심장을 찌를 때, 초식이 정교하였는지 투박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케이크에 있어서도 같은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수플레와 치즈 케이크, 호두 파운드 케이크.

단순하기 그지없는 초식일수록 더 정확해야 한다.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빵과 케이크인 만큼, 레시피가 심플한 만큼 더 맛있게 하기가 어렵다.

배리에이션이 적기 때문이다.

희귀하고 값비싼 재료와 어려운 기술을 사용해 맛있게 구워내는 것.

이것이 바로 고급 재료를 다루는 페이스트리 쉐프가 추구하는 길이다. 최고급 코스요리에 어울리는 디저트를 내놓는 이들이 바라보는 방향이다. 임운정의 친구인 고구려호텔의 황 쉐프가 이런 식의 작업을 했다.

반면에 아버지가 하는 작업은 완전히 다르다.

흔한 재료를 단순한 요리 방식으로 조리해 맛있게 하는 것.

구하기 쉬운 질 좋은 재료를 굽거나 쪄서 맛있게 만든다.

진혁은 자신이 대회에서 내놓는 케이크가 어떤 것이라면 좋을지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미미가 초청해온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기술은 이미 전부 배웠다. 가죽 같은 질감도 낼 수 있고, 실처럼 가느다란 사탕 공예도 할 수 있다. 초콜릿 공예 역시 이전보다 뛰어난 정확도를 갖고 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기를 원하지 않았다.

기술 수준이 아버지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은 아버지도 알고 있고, 진혁 역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봐주고 계신 데 과시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더 이상 뭔가를 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았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시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더 향상시키려고 노력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물엿’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무의식중에 결정했다.

아버지‘가’ 노력하면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케이크를 만들자.

아버지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해내셨다.

‘이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온 거지.’

솔직히 두렵다.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어디서 황당한 꿈을 꾸고 왔냐고 질문하실 것 같다.

두려움과 불편함, 초조함과 불안함.

그런 마음을 담아, 단순하기 그지없는 케이크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더 연습하고 연습해서 기술 수준을 더 높인다면 만들 수 있을법한 케이크다.

누가 봐도 우승을 노리는 케이크는 아니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 대한 존경.

그 모든 마음을 케이크에 담았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한국 팀의 임진혁 쉐프님!」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서 관객석에 앉아 있던 부모님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이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열심히 손뼉을 쳤다. 한 비서와 강 씨 형제, 그리고 기자들. 밥 앤더슨, 미미와 스타일 팀, 경호원들 모두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다른 사람들도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무대까지 닿아 메아리쳤다.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탄생했습니다. 수상 소감은 어떻습니까?」

「기술의 다양성이 부족하여 우승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요.」

진혁의 무뚝뚝한 대답에 안토니오 바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회의에서 그 점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프리 디버가 대답을 가로챘다.

「그래도 더 맛있었지. 나도 수플레 케이크를 만들 줄 알지만 이렇게 극한까지 맛을 끌어올린 수플레 케이크는 처음 먹어 봤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야.」

안토니오 바트가 물었다.

「우승자는 전미 제과제빵 챔피언 클럽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20만 달러의 상금을 받습니다. 보통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교육자의 길을 걷기도 하고, 자신의 가게를 열기도 합니다. 임진혁 쉐프,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진혁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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