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7화
한국, 서울.
<해와 달> 명동점.
이른 새벽,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시간.
어두운 창문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빛이 비쳐 들어왔다.
임진희는 빵집 주방 안에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직원들이 아직 출근하기 전에 혼자 먼저 나온 이유는 다음 계절에 새로 내놓을 호두 파운드 케이크 시제품을 굽기 위해서였다.
“내가 호적메이트 녀석 대회를 보려고 이 시간에 나온 건 아니지. 아무렴.”
하얗고 끈적한 반죽을 성형해 오븐에 넣고 나서, 그녀는 머뭇거리며 스마트폰을 켰다.
“엄마랑 아빠가 거기 가 계시니까 혹시 카메라가 부모님을 잡을지도 몰라. 진혁이 케이크가 궁금한 건 아니야.”
대회는 벌써 최종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진희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과거를 추억했다.
“짜식, 전에는 대회 트렌드를 파악해야 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아서 내가 녹화 파일 구해다가 보여 줬는데.”
그때 진혁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군대를 갔다 왔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잠을 쪼개 조사를 했다. 혈육이 어디 가서 함부로 속지 않도록 꼭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회에서 혼자서 이상한 걸 만들까 봐 걱정하기만 한 건 아니다.
실은 이번 대회 준비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프로페셔널을 여러 명 초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심하면서도 내심 조금 섭섭했다.
‘가게 오픈하면서 계속 도움만 받아서 이번에는 뭔가 좀 해 주고 싶었는데.’
결혼식 때 아버지와 함께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하긴 했다.
하지만 진혁이 자신에게 해 준 것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마침 화면에 나오는 케이크는 듣도 보도 못한 모양새였다. 놀이터의 정글짐을 비틀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삐죽이 솟은 과자에 그 옆에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케이크를 보고서 진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혁이 이 녀석. 또 잘도 이상한 걸 만들었네.”
제과제빵 대회에도 유행이 있다. 진희는 대회에 제대로 출전해 본 적은 없지만, 명품 가방이나 신발을 재현한 케이크가 인기 있을 무렵에는 대회에도 유사한 케이크가 종종 입상했다.
고풍스러운 고딕식 교회를 비롯해 다양한 건물들을 재현한 케이크가 사랑받았던 때도 있다.
반면에 최근의 유행은 ‘자연 보호’와 ‘미래’다.
‘계절’과 ‘축제’ 역시 꽤 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주제부터 특이했다.
“아니, 지금 주제가 <가족>인데 올케를 쏙 빼놓고 케이크 만들었어? 정신이 나갔나?”
생중계되는 영상을 보면서 그녀는 손을 꽉 쥐었다. 굽고 있던 호두 파운드 케이크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카메라는 관객석에 있던 부모님을 스쳤다. 부모님의 얼굴 표정 역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진희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갈 걸 그랬나.’
진혁이 와도 좋다고 했지만, 가게를 비우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책임지고 있는 만큼 제대로 결과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빼고서 가족들 모두 가 있는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비슷한 위치라고 생각했던 쌍둥이가 날개를 달고 비상하고 있다.
당연히 축하하고, 그래서 더 기쁘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거 방송 중이니 분명히 올케도 보고 있을 텐데. 지금 전화를 해서 알려 줄 수도 없고.”
화면 속의 임진혁이 아내가 좋아하는 식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진희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게 문을 열었다.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하기 위해 회의에 들어갔다.
“휴우, 뇌가 아예 비어 버리지는 않았네.”
◈ ◈ ◈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대기실 안에서 기다렸다.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략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브라이언이 초조하게 종종걸음을 치며 진혁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서 빨리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 역시 나름 바빴다.
주느비에브는 구석에서 누군가에게 스마트폰 메시지를 보냈다.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은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서 먼 곳을 응시했다.
모카 F. 캘러한은 보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혁에게 다가왔다.
「이봐, 임진혁 쉐프! 엄청난 걸 내놓았던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이전에 진혁에게 뭔가를 알아내려고 했을 때와 태도가 달랐다. 조금 더 겸손하면서 진혁을 존중해 주는 모습이다.
「흠.」
진혁은 적당히 건성으로 받아 주었다. 브라이언이 어이없다는 듯이 캘러한을 바라보았다.
「태도가 너무 다른데.」
그가 무림 초출로 가장해 무림 대회에 나갔을 때 명문정파의 후계자들이 저런 식으로 굴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굴다가 실력을 보고 나면 행동이 바뀐다. 세상에서 제일 진혁을 존중한다는 듯이 군다. 그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실력 차이를 눈으로 보고도 인정하지 못하는 바보들보다 이편이 훨씬 낫지.」
최소한 캘러한은 지금 임진혁의 실력이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의 수준에 달해 있다는 것을 간파할 정도로 눈이 좋았다.
그리고 다시 접근하여 싹싹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주변머리도 있다.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수군거리기만 하고 진혁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최연소 우승자가 될지도 모르겠어.」
브라이언은 기대감에 가득 차서 말했다.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임진혁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서 긴장해 있는 다른 참가자들과 달랐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전부 들린다. 진혁이 만든 케이크에 대해서 호의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매겨진 점수로는 세 사람이 비등비등했다.
「한국 팀의 케이크는 아주 맛있었어. 하지만 사용한 스킬 자체가 너무 단순하네. 수플레 케이크도 그렇고 호두 파운드 케이크에 크림 치즈 케이크라니. 이건 일반적인 동네 빵집에서 내놓는 케이크가 아닌가? 만든 사람의 테크닉과 정교함을 확인할 수가 없어.」
다른 심사위원이 정론을 꺼냈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는 의외로 임진혁을 옹호했다.
「하지만 아주 맛있었지. 사용한 기술의 가짓수가 부족하긴 해. 그렇지만 그 깊이는 아주 깊지 않나. 그건 과자와 다른 빵을 세워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자네는 눈이 삐었나? 반드시 설탕 졸임을 세밀하게 조각해야만 스킬을 알 수 있냐고.」
진혁은 맛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기술 면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탁월한 기술이었으나 사용한 기술의 종류가 적기 때문이다.
제프리 디버는 끝까지 진혁 편을 들었다.
「채점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고! 광택도 완벽하고, 완성도가 높아. 예술성과 창의성 모두 충족하고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젠가?!」
「최소한 다섯 가지 이상의 기술을 보여 줘야 해! 새로운 기법을 쓰긴 했지. 그렇지만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잖아.」
「기술을 열 개를 쓰면 뭘 해. 주느비에브를 봐. 세 종류의 케이크에 열다섯 가지의 기술을 사용했지만 지랄같이 맛이 똑같아!」
아서 J. 클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 팀의 쉐프는 맛을 잘못 잡았어. 할머니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맛이 너무나 단조로웠단 말일세! 그녀가 언급한 할머니들이 세쌍둥이가 아닌 이상 나와서는 안 될 맛이라네.」
「덴마크 팀 기술이 좋았지. 슈가 크래프트의 기술은 물론이고, 초콜릿 공예 기술도 다양하게 사용하였어.」
「기술 면에서는 영국이 최고 아니었나? 초콜릿 쿠키와 빵은 전부 다른 것이었지. 어떤 것도 최상급 퀄리티였어. 책장과도 잘 어울렸고.」
「영국에서 뇌물 받았냐? 그 진하기만 한 초콜릿 케이크가 맛있냐고. 기술만 이것저것 쓰면 다가 아니잖아. 맛있어야지!」
제프리가 흥분해서 막말을 했다. 다른 심사위원 역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안토니오 바트가 중재했다.
「자, 기술 면에 대한 심사는 그 정도면 됐어. 케이크가 주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고.」
「덴마크 팀은 아주 완벽한 답을 내놓았어. 토마스 크리스티얀센 같은 답안만 있다면 곤란해졌을 거야. 모두에게 100점을 줄 수밖에 없어.」
「가족과의 갈등 그리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아주 제대로 묘사했어. 감동적이었지.」
「갈등 그리고 해소! 스토리텔링 방식도 완벽했고.」
‘주제와의 일치’ 그리고 ‘디자인’ 항목에서 덴마크의 토마스는 만점을 받았다.
진혁은 ‘맛’ 부분에서 토마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주제와의 일치’에서 점수가 깎였다. ‘다양한 기술’에서도 깎인 점수를 포함하면 덴마크나 영국보다 점수가 낮았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일차적인 가족에 부모님과 남매가 들어가다니, 정상적인 일은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가족의 형태를 평가하려고 모인 게 아닐세. 페이스트리 쉐프가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 그 자체를 보면 되는 거야. 그런 식으로 트집을 잡을 필요는 없어.」
「프랑스 팀은 지나치게 쉬운 길을 걸었지.」
주느비에브는 ‘주제와의 일치’에서는 그럭저럭 점수를 받았지만 ‘맛’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점수가 깎였다. 그렇기에 일찌감치 우승 후보에서 탈락했다.
「영국 팀은 어떤가?」
「킹스 케이크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다면 더 좋았을 거야. 치아가 약한 이가 있다면 다칠 수도 있었어. 심사하러 와서 앞니라도 부러지면 그 무슨 낭패인가?」
「나는 페이스트리 쉐프는 놀라움과 기쁨을 주어야 한다고 믿네. 킹스 케이크가 상을 받아야 마땅하지.」
영국 팀의 모카 캘러한은 ‘주제와의 일치’ 그리고 ‘다양한 기술’에서 만점을 받았다. ‘맛’ 역시 다양성에서 점수가 좋았다.
「나는 덴마크 팀에 한 표를 주겠어.」
심사위원들이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기 때문에 좀처럼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한 명뿐이었으나 프랑스 팀이 우승해야 한다는 심사위원도 있었다.
「주느비에브 쉐프가 한 종류의 케이크에 집중하긴 했으나, 주제는 아주 잘 살리지 않았나? 그러니 충분히 우승할 만한 가치가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안토니오 바트가 심사위원들에게 말했다.
「참가자들이 기다리고 있네. 언제까지 어린애들처럼 싸우고만 있을 거야. 누가 우승해야 할지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지.」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지금 상위 3명이 비등비등하지 않나. 그들을 두고 재투표를 하지.」
제프리 디버가 손을 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임진혁에게 한 표.」
아서 J. 클라크가 말했다.
「덴마크의 토마스 닐슨 크리스티얀센에게 투표하겠어.」
「나는 모카 F. 캘러한이 우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네.」
저마다 한 마디씩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자 안토니오 바트가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에게 투표하도록 하겠네. 그럼 최종 우승자는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