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4화
아버지가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직사각형 모양의 케이크 양쪽을 잘라내서 먹어 보지, 여보? 가운데 설탕 인형 있는 부분은 내버려 두고.”
“지금?”
“그럼 지금 먹어야지. 맛있어 보이는데.”
진혁이 한 비서를 힐긋 바라보았다. 식기와 포크가 어디 있냐는 눈빛이다.
한 비서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브라이언이었다면 일회용 그릇과 젓가락, 수저 따위를 근처에서 사 왔을 것이다.
유능한 비서는 단순히 룸에 식기류를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불렀다.
카트를 가져온 식당 종업원은 케이크를 카트 위로 옮기며 놀라워했다.
「이 센트럴 파크 케이크는 대단히 멋진데요. 어디서 주문하신 겁니까?」
「아들이 만든 거예요.」
「우와,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이번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 참가자이십니까?」
「하하.」
진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 종업원의 안내를 받은 세 가족은 프라이빗 라운지의 작은 룸에 도착했다. 단정한 테이블 위에는 이미 칼과 포크, 접시 등 식기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혁은 마음속으로 한 비서에게 점수를 주었다.
‘일을 못 하는 건 아니야.’
케이크를 가운데에 놓고 세 사람이 모여앉았다. 한 비서는 자리에 앉지 않고, 일이 있다고 하고서 나섰다.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 잘 알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방해하지 않는다. 눈치가 빨랐다.
진혁은 그 점을 높게 샀다.
“자, 여기 있다.”
아버지는 진혁에게 빵칼을 내밀었다. 진혁이 물었다.
“아버지가 자르시지 않구요?”
“네 성격 보면 전부 같은 케이크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 네가 제일 맛있는 데로 골라서 잘라 주렴.”
진혁이 싱긋 웃었다.
“이왕 세 개의 케이크를 따로 굽는데, 세 가지가 모두 같은 스타일이면 재미없을 것 같긴 했죠.”
“그런데?”
“셋 다 같은 스타일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가기로 했어?”
“이 리치 후르츠 파운드 케이크는 실비안 웨인스톡 쉐프한테 직접 전수받은 레시피거든요.”
“견과류를 많이 넣은 믹스 케이크 말이냐?”
아버지가 관심을 보였다.
“네, 맞아요.”
리치 후르츠 케이크와 세미 리치 후르츠 케이크, 그리고 후르츠 케이크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견과류를 55% 이상 넣으면 리치 후르츠 케이크, 그리고 그 45% 전후로 넣으면 세미 리치 후르츠 케이크가 된다. 즉 리치 후르츠 케이크는 케이크 시트보다 호두나 아몬드, 마카다미아 등의 견과류가 훨씬 더 많이 들어 있어 단단하고 견고하며 씹히는 맛이 좋다.
단지 10% 전후의 차이라고는 해도 케이크의 성질에는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세미 리치 케이크가 열흘 정도 보관 가능한 것에 비교해, 리치 케이크는 일 년 이상 때로는 몇 년 이상도 보관할 수 있다.
견과류를 아예 넣지 않은 마데이라 케이크 같은 경우에는 위에 무거운 장식들을 올릴 수 없어, 별도의 지지대나 버팀목, 디딤판을 써줘야 한다.
“리치 후르츠 케이크 같은 경우에는 일 년 전에 주문을 받더라구요.”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이크를 사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아버지가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케이크 주문을 받은 시점에 그 사람의 취향에 맞는 견과류를 술에 담가놓는구나? 일 년 정도 술에 절여놓으면 충분히 향도 배고 맛도 좋아질 거 아니냐.”
“아, 저도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더라구요.”
부모님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럼?”
진혁이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일단 제 케이크부터 맛보시면 대답해 드리죠.”
“아하하! 막상 먹으려니까 아깝다. 이렇게 잘 만들었는데, 먹으면 없어지잖아.”
아버지가 웃었다. 어머니가 거들었다.
“진희가 있어야지. 걔는 이거 보면 바로 입에 딱! 하고 넣을 텐데. 아버지한테 양보하는 것도 없이 말이야. 아 참, 이거 찍어서 진희한테 보내 줘야겠다. 바빠서 못 온다고 그러더니, 이거 보면 아주 아쉬워할 거야.”
진혁이 빙긋 웃었다.
“아, 벌써 찍어서 보냈어요.”
이미 케이크를 구워낸 시점에 찍어서 보냈다. 시차가 있어 아직은 확인하지 않았지만, 보면 분명히 답장이 올 것이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이걸 보면 진희도 기분 좋아할 거야. 남매가 사이좋으니 보기 좋구나.”
어머니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보, 오고 싶어 했는데 바빠서 못 온 애한테 우리는 이렇게 멋진 케이크 먹고 있다고 자랑하는데 좋아할 리가 없잖아.”
“우리가 어디 놀러 왔나? 진혁이 케이크 대회 응원하러 왔지. 우리 아들내미 케이크 굽는 솜씨가 이렇게 좋아졌다구 보여주는 건데, 이걸 보면 기분이 좋지, 어디 안 좋겠어? 진희가 그렇게 속이 좁은 애가 아니야.”
진혁은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빵칼을 내리그으며 망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탄식했다.
“진짜 예뻐서 자르기가 아까웠는데 말이야.”
“나도.”
어머니도 동의했다.
막 완성한 영화 필름을 자르고 싶어 하는 영화감독은 어디에도 없다. 스스로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을 난도질하려는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도 먹어야죠.”
진혁의 칼날은 단단한 호두를 물처럼 갈라, 깔끔하게 케이크를 절단했다.
케이크는 영화가 아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케이크라고 해도, 맛이 없다면 그건 실패작이다.
관객이 봐주지 않는 영화에는 의미가 없듯이, 케이크 역시 누군가 시식해주어야 한다. 케이크란 먹어주는 사람들의 입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부모님도 드세요.”
아버지는 코를 가까이 갖다 댔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풍기던 향기가 정말로 케이크에서 나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굽고 나면 술 향기는 없어질 텐데, 내가 잘못 맡았나?”
살짝 코코넛 향기가 섞여 들어가 있는, 익숙한 럼주의 향기. 임운정은 자신이 즐기는 술 냄새를 맡으며 흐뭇하게 눈을 감았다. 아직 맛을 보지 않았는데 이 향기만으로도 벌써 기대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아들이 이번에는 어떤 것을 만들어 자신을 놀라게 해줄지 상상하기만 해도 즐겁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술이요, 위쪽에 조금만 발랐어요.”
카리브해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럼, 말리부. 화이트 럼에 코코넛을 으깨어 넣고 걸러낸 술로, 럼 답지 않게 짙은 코코넛 향에 달콤한 맛으로 유명하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도 싫어하지 않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은 이것밖에 없다.
“향기가 아주 좋구나.”
아버지가 술의 향기를 즐기는 동안 어머니는 볼이 미어지도록 케이크를 담아 씹었다. 갓 따낸 아몬드나 호두, 헤이즐넛이라면 오도독 씹힐 것이다. 하지만 술에 오랫동안 담가놓은 견과류는 생 견과류와는 맛이 달랐다. 보들보들하면서도 아삭아삭하게 씹힌다.
“호두에는 레시틴이 들어 있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잠이 잘 오게 한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오시면서 긴 비행과 시차 때문에 피곤하셨을 테니까 듬뿍 넣었어요.”
“고맙다.”
“호두만 들어있는 건 아닌데?”
“원래 실비안 쉐프의 레시피에는 잣이 들어있지 않은데, 조금 넣었습니다. 잣은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지요. 피스타치오는 항산화제가 함유되어 있어 특히 갱년기 여성에게 좋대요.”
빵보다 견과류가 더 많다. 그것도 한 가지 맛이 아니다. 단단한 아몬드에 부드러운 잣, 호두와 피스타치오에 헤이즐넛. 다양한 견과류들이 서로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아몬드가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게 아주 내 취향이야.”
“호두도 부드러워. 쓴맛이라곤 하나도 없네. 어쩌면 이렇게 질 좋은 것들만 쏙쏙 골라서 담았니?”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 후르츠 믹스 케이크는 사실 빵이 들어있는 양이 적잖냐. 그걸 케이크라고 부를 수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지. 이걸 먹고 나니까 확실히, 이건 케이크가 맞네. 견과류의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맛이 날 수밖에 없어.”
“그렇죠.”
꼼꼼하게 만들어진 아이싱 아래에는 갈색으로 좋게 익은 케이크가 있다. 칼로 자른 단면적에는 꼼꼼하게 들어찬 견과류만이 아니라 치밀하고 빼곡한 파운드 케이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슈가 페이스트가 붙기 쉽게 설탕 시럽이 발라져 있던 겉면은 짙은 갈색이지만 안쪽은 갈색빛이 살짝 도는 따뜻한 노란색이다.
“자칫하면 질리기 쉬운 맛인데 말이야, 대단하구나.”
꼬들꼬들한 헤이즐넛에 살짝 짭조름한 아몬드, 그리고 코끝을 계속 감도는 코코넛 향. 목으로 넘어가는 케이크의 맛까지.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하려고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저 눈앞의 케이크 장인에게 감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장인이 우연히 아들일 뿐이다.
“훌륭해, 훌륭해. 정말로 좋은 케이크야. 둘만 먹어서 아쉽네.”
케이크를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장은효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두 분이 뭘 좋아하시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같이 살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식탁에서 앉아서 식사하면서 내내 관찰해왔다. 어머니가 건강에 좋다며 내오는 싱거운 국. 그리고 그 국물에 몰래몰래 소금을 조금씩 쳐서 드시는 아버지.
쫄깃한 말린 오징어를 씹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흰쌀밥보다는 이런저런 콩을 두어 밥에 지어, 다양하게 씹히는 맛을 즐기시기도 한다.
“맛있다, 맛있어!”
살짝 짭조름하게 소금으로 간을 더하였으면서도 어머니가 즐기는 씹힘 맛을 여러 방면으로 추가했다.
두 분이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며 진혁이 웃었다.
“맛있게 먹어주시니까 좋네요.”
“그럼, 그럼.”
세 사람은 케이크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옆자리에서 아기가 울었던 이야기를 했다.
‘아기가 울 때 수혈을 짚어 주면 조용해지긴 할 텐데,’
건장한 성인 남자라도 수혈을 짚으면 혈을 풀어줘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조그마한 아기라면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낯모르는 아기보다는 어머니의 불편감이 더 중요했다.
“네 어머니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거지.”
“여봇!”
“우리 가게에서 만들어 파는 쿠키 있잖니? 옛날에 한정판으로 만들었던 시리즈.”
“생강 쿠키 말이군요.”
각종 살인 사건의 피해자 모양으로 찍혀 나가 인기를 끌었던 진저브레드 쿠키. 살인 사건 현장을 재현한 쿠키 하우스와 함께 퍽 인기를 끌었다. 초반에 진혁이 운영하는 빵집을 다른 빵집과 차별화해서 손님들을 끄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응, 내가 먹으려고 조금 꺼내 놨는데, 옆자리에 있던 아기가 날름 집어 먹지 뭐야.”
“저런.”
진혁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어머니가 드실 걸 뺏어 먹다니.”
“아기 아빠가 잠깐 뭐 떨어뜨린 사이에 옆으로 기어 와서 먹었더라고. 그리고 그 다음에 뭔가 이유식 같은 걸 먹어야 하는데, 안 먹겠다고 어찌나 소동을 피우는지.”
“하하.”
진혁이 레시피를 개발해 구워낸 진저브레드 쿠키는 맛있다.
이유식보다는 훨씬 맛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나이에 단것을 먹게 된 아기는 더 이상 다른 맛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진혁의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아기가 입맛이 아주 까다롭다고 하더라고. 이유식도 먹던 것만 먹고, 그것도 제대로 된 온도로 데워줘야만 먹는대. 그런데 이 쿠키는 평소 보던 게 아닌데도 입에 댔다는 점이 신기하다고 하더라고.”
“맛있어 보였나 보죠.”
“이상하지?”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만난 부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비행기 여행에 대한 소감을 짧게 표현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조그만 하늘이 너무 예뻤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람을, 아버지는 풍경을 즐기시면서 오셨구나.’
남은 케이크는 상자에 포장하여 냉동하기로 했다.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내일 대회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