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3화
「두 시간이라니.」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미미가 활짝 미소지었다. 천리향의 봉오리가 꽃피어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것처럼 우아한 미소였다.
「힐튼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 두었어요.」
한 비서가 운전사에게 손짓했다.
리무진을 운전하는 기사는 말없이 방향을 돌려,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숙소가 아닌 힐튼 미드타운 호텔로 향했다.
스위트룸에서의 두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부모님을 기다리게 할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진혁은 미미를 배웅했다. 리무진 운전사는 미미와 함께 공항으로 보내고, 그는 바로 부모님을 보러 어디로 가야 할지 확인했다.
“뉴욕 힐튼 타임스퀘어 호텔에 계신다고?”
한 비서는 두 번째 리무진을 호출했다.
“지금 가이드와 함께 타임스퀘어 주변을 관광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내가 바로 갈 필요가 없겠는데? 두 분이서 돌아다니시는 걸 좋아하시잖아.”
한 비서가 웃었다.
“아드님이 오시는 걸 알면 더 좋아하실걸요.”
진혁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니, 쓸데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데에 굳이 내가 같이 갈 필요가 없지. 오히려 그 시간에 멋진 뉴욕 환영 케이크를 구워서 갖다 드리는 게 낫겠어.”
“….”
한 비서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럴 때 보면 그냥 빵에 미쳐있는 제과제빵사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은 뉴욕에 준비되어 있는 베이킹 스튜디오로 향했다. 미미의 지시를 받고 한 비서가 미리 섭외해 놓은 이 페이스트리 키친 스튜디오는 제과제빵 대회 연습을 위해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진혁은 최고급 오븐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오, 아주 본격적이네. 그런데 좀 넓다. 열 명은 사용할 수 있겠는데? 그리고 저쪽에 빈 공간이 좀 많은데.”
“방송국의 페이스트리 키친 스튜디오입니다. 호텔이나 식당 등은 전부 사용하고 있어서 이쪽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비서가 사과했다.
“이쪽은 조명과 카메라 시설들을 설치하기 위한 곳이라 비어 있고요. 연출팀이나 작가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음, 뭐, 상관없지. 재료는?”
진혁은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신선한 달걀과 닭고기, 쇠고기와 양고기, 채소와 치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탈리아산을 비롯하여 프랑스산과 한국산 밀가루 역시 준비되어 있다.
진혁은 쉐프 복을 걸치고, 만족스럽게 손을 걷어붙였다. 손을 씻고 일을 시작할 차례다.
“브라이언은 내일부터 와도 된다고 좀 전해주고, 7시에 보자고. 그때쯤이면 케이크가 완성됐을 거야.”
“예.”
임진혁은 케이크를 만드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얼쩡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부에 CCTV가 있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대회 끝나고 브라이언이 오픈할 가게 자리는 알아봤나?”
“지금 후보지를 3곳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래, 부탁해.”
결혼 후부터 내내 진혁을 보좌해 왔던 한 비서는 충실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진혁이 빵을 만드는 동안에 서류 작업을 하면 되기 때문에, 내심 이런 시간이 기꺼웠다.
‘일단 이탈리아 쪽 지점 일 먼저 처리하고 미국 지사 일을 해결하자.’
진혁은 단순히 브라이언의 가게를 오픈할만한 장소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한 비서는 미국 지사를 아예 새로 설립하고 브라이언을 총책임자로 앉힐 생각이었다.
‘임 쉐프님은 분명히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셔.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내가 거기에 맞추어 계획을 짜야지.’
한 비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진혁은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 ◈ ◈
진혁은 이것저것 만들어놓은 슈가 페이스트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가죽과 금속 모양은 완성도가 높은데, 생각보다 목재는 같은 경우는 나무 같지가 않네.”
이럴 때는 참고 서적을 보는 것이 좋다. 그는 한 비서가 구해다 놓은 제과제빵 서적들을 뒤졌다.
“목재나 얇은 꽃잎은 슈가 아트 쪽이 훨씬 자연스럽군.”
그렇다고 당장 내일이 대회인데 슈가 아트를 가르쳐줄만한 사람을 찾아 헤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유튜브 영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탕 만들기를 변형한 거 아닌가?”
프랑스식 슈가 아트를 해본 적은 없지만, 사탕을 만들어본 적은 있다.
투명한 사탕 안쪽에 분홍색이나 보랏빛 색깔을 심은 반죽을 덧붙여 무늬 있는 사탕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이것저것 덧붙이고 깎아 장식해보기도 했다.
‘허, 참. 슈가 아트라는 이름에 홀려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는 반드시 프랑스식 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만들고 있는 케이크에 필요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만 있으면 된다. 진혁은 하얀 케이크 위에 조그마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지금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고 계시다고 하니까, 센트럴 파크를 만들어 드리면 좋아하시겠지.”
미국에서 오래 머물러 있어 한국을 그리워하고 계신다면 뭔가 한국과 관련된 것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해야 어제나 오늘 미국에 입국했을 두 분이다.
그는 실비안 웨인스톡이 만들었던 스타일의 후르츠 파운드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센트럴파크는 보통 케이크처럼 동그랗거나 직사각형으로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길고 넓적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혁은 납작한 직육면체 모양의 길쭉길쭉한 케이크를 만들고자 했다.
‘특별한 케이크로 부모님을 환영하고 싶어.’
진혁은 먼저 케이크에 넣을 과일부터 골랐다.
건포도와 체리, 아몬드와 헤이즐넛, 마카다미아.
럼주에 담겨 숙성된 견과류들. 모양이 나쁘거나 술을 덜 머금은 것들은 제외했다. 그는 작은 아몬드 한 톨까지 일일이 세심하게 하나씩 골라냈다.
“아무렴, 부모님께 못생긴 건포도가 들어간 과일을 드릴 수는 없지.”
쭈글쭈글한 것들 중에서도 주름이 균일하고 술을 담뿍 머금어 향이 풍부하게 밴 건포도만이 남았다. 체리와 아몬드, 헤이즐넛 등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번에 만들 케이크는 반죽의 양보다 견과류가 더 많을 예정이었다.
이번에 실비안 웨인스톡에게 전수받은 리치 후르츠 믹스 케이크다.
그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버터를 믹싱했다. 본래대로라면 미리 꺼내서 녹여 놓아야 하는 버터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버터는 한국의 농장에서 받아오던 것보다 좀 더 진해 보였다.
“자, 휘저으라고.”
하지만 진혁의 명령에 순종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종이옷을 벗어던지며 허공에 솟아오른 버터는 홀로 빙글빙글 돌면서 점차 고체의 형태를 잃고 액체처럼 변해갔다.
개나리처럼 샛노란 색깔이 점차 우유처럼 뽀얗게 물들어갈 무렵, 다른 친구들도 출동했다.
비정제 갈색 설탕 가루가 춤추듯이 회오리 속에 뛰어들고 나서 소량의 고운 소금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설탕과 소금이 충분히 섞여들자, 껍질을 버리고 분리된 달걀이 퐁당퐁당 회오리에 섞여 들어갔다.
저 혼자 체를 통과한 박력분이 이미 크림화된 회오리에 팔랑팔랑 날아가, 헤어졌던 연인처럼 서로 녹아들었다.
진혁이 미리 골라둔, 술에 절인 견과류와 건과가 폴짝폴짝 섞여 들어가자 회오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위이이이이이잉
눈에 보이지도 않을 법한 속도로 빠르게 돌던 회오리는 어느 순간 완벽하게 멈추어 팬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넓은 센트럴 파크를 만들고 싶었기에, 반죽의 양이 넉넉했다.
그래도 지나치게 많았는지 유산지가 깔린 사각형 빵틀을 여덟 개나 가득 채웠다.
“남은 건 브라이언 줘도 되겠다.”
진혁은 콧노래를 부르며 빵틀을 들어 올렸다. 한쪽 구석에 있던 오븐은 예열된 흔적도 없이 가만히 멈추어 서 있었다. 진혁은 오븐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양강지기를 불러일으켰다.
‘염화기공(炎火氣功).’
실은 빵틀이 없어도 된다.
유산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좋다.
거추장스럽게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오븐 따위는 당장이라도 치워버려도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오븐과 함께 해야 한다.
‘이 최신형 오븐은 열선이 조금 많네. 열을 전달하는 방식을 다르게 해볼까? 그럼 최상의 맛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 방식은 빵틀 전부가 열을 전달하기 때문에 훨씬 열을 고르게 전달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븐을 사용하는 게 시간 낭비다.
그는 빵 위에 장식할 슈가 페이스트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호수와 나무들, 그리고 벤치.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생략했다.
단 두 사람, 그에게 중요한 사람만을 만들 예정이다.
◈ ◈ ◈
“우리 진혁이, 미국에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
“하하하!”
진혁은 이 칭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적당히 웃으며 넘겼다. 적당히 부모님이 돌아올 시간에 케이크를 들고 부모님이 머무는 호텔로 찾아갔다. 부모님은 이산가족을 상봉하는 것처럼 진혁을 반겼다.
“여보, 우리 아들은 어디서 봐도 인물이 훤해.”
“물론이지, 날 닮아서 그래.”
“당신을 닮은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날 쏙 뺐구만.”
사실이야 어찌 됐건 어머니가 이기는 전쟁이다. 아버지는 패배만이 남은 전투에서 물러나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진혁아, 뒤에 들고 온 건 뭐냐?”
“엄마 선물 사 온 거야? 그런 건 안 해와도 되는데.”
어머니가 뺨을 상기하며 기뻐했다.
“결혼하더니 애가 아주 훤해졌어. 전에는 잘 모르더니 이런 선물 같은 건 진짜 귀신같이 챙긴다니까. 면세점 지날 때마다 부인 것 사는 김에 내 것도 사는 거지?”
면세점에 들르지도 않았다. 진혁은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까지 쭉 걸어갔고, 선물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부인 것은커녕 부모님과 가족 것도 없다.
진혁은 아주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케이크를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그가 머뭇거린 순간, 한 비서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여기에 있습니다, 진혁 쉐프님.”
“한 비서님!”
“면세점에서 어머니 생각이 난다면서 고르신 향수요. 아버지 선물도 있습니다.”
“오, 내 것까지 있다고?”
임진혁은 뒤를 돌아보며 한 비서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아버지는 포장을 풀어보고 고급스러운 위스키를 발견하였다.
“햐, 이거 철우가 아주 좋아하는 술이구만. 아들아, 잘 마실게!”
어머니도 붉은색 리본을 잡아당겨 선물을 풀었다. 볼록하니 투명한 하트 모양의 브랜드 향수병을 보고서 생글생글 웃으셨다.
“향수가 병도 투명하고 아주 예쁘네. 부인 선물도 챙겼지?”
딱히 챙긴 것이 없다. 진혁은 한 비서를 힐긋 바라보았다. 비서가 대답했다.
“꽃과 케이크를 보냈습니다.”
“정석적인 선물이네.”
“그런데 진혁아, 뒤에 그건 뭐니?”
“부모님이 뉴욕에 오신 걸 축하해서요, 이제 금방 결혼기념일이시잖아요.”
진혁은 케이크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어디 국립공원인가? 예뻐라.”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나무가 우거진 숲 모양의 길쭉한 케이크 위에 서 있는 자그마한 설탕 인형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나야?”
아버지가 물었다.
“그런데 이게 어디야?”
한 비서가 설명해 주었다.
“센트럴 파크 전경이네요. 여기 호수 보면.”
“어머, 어머, 어머!”
어머니는 감격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왔다 간 걸 기념하려고 했구나.”
공원을 조금 걷긴 했지만 헬리콥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보지는 않았기에 그 공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늦었다.
“고맙다, 진혁아.”
“아주 좋은 추억이 되겠어.”
“이거 아까워서 어디 먹겠니? 한국에 가져갈 수는 있나?”
“아무래도 이 부피면 비행기에 들고 타기는 어렵지. 여기서 먹어야 해.”
“후르츠 파운드 케이크라서 오래 보관할 수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