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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372화 (372/656)

제 372화

임진혁은 층층이 쌓인 적갈색 케이크 위에 아무렇지 않게 크림을 발랐다.

칠판에 분필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편안한 손길이다.

하지만 손이 한 번 쓱 휘두르듯이 지나간 그 자리에는 깔끔하게 하얀 크림이 발렸다.

보통 아이싱을 할 때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

동그란 판대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치덕치덕 바른 다음에 케이크 나이프로 모양을 다듬어 단정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아이싱을 한다는 것은 보통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는 두 소년은 멀뚱멀뚱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제과제빵을 해본 경험이 있는 너구리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이렇게 바로 해도 되는 건가.”

소년이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데 진혁이 피식 웃었다.

“할 수 있으면 해도 돼.”

“그럼 저도 나중에 해볼래요! 가르쳐 주세요.”

망설임 없이 슥 슥 해치우는 게 이미 달인의 손길이다.

세 층의 케이크가 전부 하얘지자 진혁은 맨 위에 크림으로 볼록한 언덕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크림을 짜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너구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소리를 들은 멸치 역시 읽던 이런 책을 덮고 그대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강운종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뭐야, 케이크야?”

강운종이 평생 봐온 케이크라는 물건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제과점 진열장을 보면, 그 안에는 납작하고 하얀 케이크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곤 했다.

보통 하얀 케이크 위에 딸기나 설탕에 졸인 파인애플 같은 과일이 올라가 있다. 드물게는 검은색 케이크 위에 잘게 잘린 초콜릿 조각들과 체리가 있기도 하지만, 그 경우를 벗어나는 케이크는 보지 못했다.

이런 것은 텔레비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예쁘다.”

한쪽 끝이 뾰족하고 둥근 깍지 아래에서 한 장 한 장 피어나는 꽃잎들이 모여, 화려한 꽃이 된다.

수십장, 수백 장의 꽃잎이 겹쳐진 꽃송이가 하나씩 하나씩 쌓여가는 것을 보며 너구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꽃이에요?”

“모란.”

진혁이 짧게 말했다. 멸치가 물었다.

“이건 모양이 좀 더 다른데요.”

“그건 작약.”

동그라니 노란 꽃술이 촘촘하니 가운데에 자리하고, 풍부하게 결이 잡힌 주름진 꽃잎이 입체적으로 겹쳐지며 화려한 꽃송이가 피어난다. 가운데 쪽의 꽃잎은 선명한 분홍빛이나 가장자리의 꽃은 점점 더 색깔이 연해져 은은한 연분홍빛이 되었다. 그 곁에는 희미하게 노란 꽃송이가 미미하게 분홍빛을 띠며 함께 피어있는데, 점점 더 색깔이 달라졌다. 물감이 한지에 번져가며 색이 변하듯이, 분홍색은 점차 노란색으로 물이 들었다. 한쪽 끝에 있는 꽃들은 아예 전부 선명한 개나리빛깔이었다.

“어.”

그것은 마치 머리를 망치로 맞는 것처럼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이, 강운종은 모든 사실을 납득했다.

저 사람은 그냥 케이크를 아주 잘 만드는 예술가다.

그 외에 다른 무엇일 리가 없다.

저 정도로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라면 굳이 조직에서 일하면서 자금을 세탁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도와줘야겠어.’

이 사람은 빛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저절로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강운종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훌륭한 제과제빵사라면 세상 물정을 모를 수도 있다. 예술가들은 보통 험한 일들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자기 예술 속에서만 산다고 했다.

그러니 제과제빵 학교의 스케줄에 터무니없는 체력 훈련 따위를 끼워 넣기를 강요하는 누군가가 분명히 곁에 있을 것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저 사람한테 배우면 내가 이런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서 운종은 항상 손재주가 제일 좋은 아이였다.

찰흙을 만지는 것도 잘하고, 수수깡을 부러뜨리는 것도 잘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다 잘 될 것이다.

살아오면서 느껴본 적이 없는 감동 속에서, 강운종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이제 그렇게 케이크 만드는 걸 배우나요?”

커리큘럼 중에 이렇게 커다란 케이크를 만든다거나, 크림으로 꽃을 만든다거나 하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진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너희가 원하면.”

대답하는 와중에도 꽃은 계속해서 피어났다. 케이크는 이제 평범하게 거대한 꽃장식처럼 보였다.

너구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빵반 선생님들은 크림으로 꽃 짜기를 할 때, 쪼끄만 꼭지 위에다가 짠 다음에 나중에 이상한 가위 같은 거로 꽃을 하나씩 옮기던데요.”

“그렇게 해도 돼.”

“초보자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음….”

진혁은 플라워 케이크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페이스트리 쉐프를 떠올렸다. 지금 어설프게 잘못 설명하면 그들을 모두 초보자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의 제과제빵반 선생님을 바보로 만들지 않고서 설명할 수 있을까?

여태까지는 그냥 ‘하면 되는데?’ 스타일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유일봉이 ‘형! 앞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돼! 다들 형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가 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각자 스타일이 있는 거지. 처음에는 꼭지에 따로 짜서 옮기는 것부터 배워도 돼.”

‘좋아, 제대로 설명했다.’

진혁은 뿌듯한 마음으로 어린 새싹들을 돌아보았다. 세 명 모두 충분히 납득한 것 같았다.

◈          ◈          ◈

발효가 끝난 빵은 오븐 속에서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하얗던 빵이 점차 노랗게 물들고, 다시 갈색이 되었다.

오븐 안쪽을 들여다보며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진혁이 설명해주었다.

“아까 너희들이 달걀 물을 발라서 이렇게 된 거야.”

“우와.”

“운종이 너는 달걀 물을 한쪽에 많이 발랐지? 그래서 이쪽이 갈색이 된 거고.”

운종은 움찔했다. 손재주를 뽐내기 위해서 붓에 달걀 물을 듬뿍 묻혀 발랐는데, 그게 바로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달걀 물을 아끼려고 조금씩 얇게 바르라고 한 게 아니었구나.’

반면에 아주 얇게 발라 놓은 너구리의 식빵은 예쁜 황금색이었다.

“30분 지났지?”

소년들이 우르르 오븐 앞으로 다가갔다.

장식 작업을 완전히 마친 진혁이 오븐 앞에 섰다.

오븐 장갑을 낄 필요는 없지만, 애들이 엄한 것을 보고 배우면 안 되므로 일부러 신경 써서 장갑까지 끼었다.

“여기 봐라.”

진혁이 말했다.

“이제 장갑을 끼고 오븐에서 빵을 꺼낼 거야.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다음에는 너희들도 이대로 하면 된다.”

“네!”

오븐에서 빵을 꺼내자마자, 진혁은 그 빵을 틀째로 내동댕이치듯이 던졌다.

판 위에 던져진 빵을 보고 운종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무심코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이제 빵틀이 이쪽으로 날아올 것만 같았다.

멸치와 너구리는 숫제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있었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폭력에 익숙한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렇게 던져서 수증기를 빨리 빼 줘야 빵이 안쪽으로 찌그러들지 않아.”

“우와.”

너구리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멸치는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강운종 역시 알았다.

‘이 분은 지금 화가 난 게 아니야. 정말로 수증기를 빼려고 그냥 던졌나 봐.’

진혁이 빵을 가리켰다.

“봐. 달걀 물을 진하게 바르면 바를수록 갈색이 돼.”

틀에서 꺼내진 식빵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강운종은 신기해하며 빵을 받았다.

봉곳하게 솟은 두 개의 봉우리는 아예 딱 붙어 있었다.

“풀로 붙인 것도 아닌데 찰떡같이 잘도 붙어있네.”

“그러게.”

“지금 같이 먹어도 돼.”

진혁이 잼을 꺼내주었다. 포도 잼과 살구 잼, 딸기 잼, 땅콩버터와 바르는 초콜릿 등등이 조그마한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너희가 이것저것 만들려면 맛을 잘 알아야 하니까 비교하면서 먹어 봐. 먼저 그냥 빵부터 먹어 보고.”

강운종은 힐끔 케이크를 살펴보았다.

“저거는 저희가 못 먹죠?”

“크, 욕심이 많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저건 이번에 생일 축하 선물로 들어가는 케이크야. 예약 주문받아서 만들고 있는 거지.”

“연예인이에요? 누구길래 저런 걸 생일 선물로 받아요?”

“너희들은 말해도 모를걸.”

손녀를 위해 죽기 전에 미리 주문받은, 특별한 생일 케이크다.

광안마는 죽기 전에 손녀딸의 50년 치 생일 케이크를 미리 주문해 놓고 입금까지 마쳤다.

‘심지어 생일 파티에 초대까지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무덤 봉분이라도 좀 밟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났어도 전혀 로맨틱한 관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 녀석이라도 사람 마음은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하니까.’

진혁이 꽃 케이크를 마무리하는 동안 아이들은 완전히 책을 놓고 옆에서 알짱거렸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이건 얼만데요?”

“이 정도?”

진혁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케이크 가격을 들은 소년들이 기함했다.

“우와 케이크 잘 만들면… 돈을 진짜 많이 버는구나.”

돈을 좋아하는 너구리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제빵사는 돈 잘 못 번다고 하더라구요.”

진혁이 가볍게 말했다.

“어디나 말단은 그렇지. 무슨 직업이나 처음에는 다 그래.”

“지금 이거 만드는 데 30분 걸리신 거예요?”

“며칠 전부터 준비했지. 마무리 작업만 바로 한 거야.”

곧 미리 불러둔 배달원이 와서 케이크를 운송해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소년들이 놀라워했다.

“우와 신기하다.”

반면에 너구리는 빵을 보며 계속해서 입맛을 다셨다.

“흐흐흐, 맛있겠다.”

멸치는 빵 모양을 보고서 시무룩해 했다.

“왜 내 것만 이렇게 찌그러지고 폭 폭 들어가 있지?”

“달걀 물을 바를 때 붓끝으로 빵 반죽을 찔렀지? 그래서 그래.”

“으어, 그래도 진짜 손톱 끝으로 찍힌 것만큼 조그만 자국이었는데.”

“부풀어 오르면서 자국이 커지는 거야.”

그래도 세 명 다 즐거워 보였다. 직접 만든 빵을 줄기줄기 찢으며 색색의 잼을 바르고, 입안에 쑤셔 넣는다.

“언앵님, 이어 으아 어어도 아이어요.”

“다 먹고 말해.”

“선생님, 이거 그냥 먹어도 맛있어요.”

“갓 구운 빵은 원래 다 맛있어. 굽고 나서 식으면 좀 덜한 것도 있고, 식혀야 맛있는 것도 있고.”

진혁이 웃었다.

“여기에 고구마를 넣으면 고구마 식빵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단호박이나 밤 같은 걸 넣기도 하고, 검은깨를 넣기도 해.”

아이들은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처음에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진혁이 말했다.

“내일부터는 다른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 주실 거야. 체력 단련도 그렇고.”

“네에.”

“그럼 선생님한테는 언제 배울 수 있어요?”

“케이크 장식 수업 때?”

“두 달 후네요.”

“그래, 그 중간중간에도 아카데미에 왔다 갔다 하니까 볼 거야.”

말똥말똥 쳐다보는 세 소년을 보며, 진혁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이번에 첫 번째 소년원 출신 아카데미 생인 건 알고 있지?”

“네!”

“잘 해야 후배들도 들어오는 거야. 너희가 못하면 이 계획은 그대로 파기할 거니까.”

“…!”

“이건 자선 사업이 아니야. 너희들을 교육시켜서 각 지점의 핵심 제과제빵사로 키우려는 거지. 그러니 제대로 배워야 한다.”

즉, 졸업만 하면 취업이 보장되어 있다는 얘기다. 강운종이 눈을 크게 떴다.

“조직이 아니구요?”

“무슨 조직?”

“그, 혹시…, 행동대원들이 필요하셔서 저희를.”

너구리가 강운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동시에 멸치는 운종의 발등을 밟아 주었다.

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핫! 어느 조직에서 행동대원에게 제과제빵을 가르쳐?”

“어….”

‘그러면 그 한강 뛰기는 왜 한 거지요?’

하지만 강운종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너구리는 옆구리를 비틀어 꼬집어 주었고, 멸치는 발등을 자근자근 밟고 있었다.

“그냥 열심히 배워서 빵집에서 일하면 돼.”

진혁이 단언했다. 운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래야 네가 배우고 싶었던 케이크도 배우지.”

“네에!”

운종이 여태까지 살아온 세상이 무의미한 회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어쩐지, 찬란한 무지갯빛 길이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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