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1화
물은 넉넉하다. 진혁은 바로 식빵 반죽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 역시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브라이언 신은 놀라우리만큼 얇게 구워낸 팬케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그는 퀵브레드를 선택하고 장식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려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루이스 강은 효모 빵 반죽을 끝내고 발효기에 넣는 참이었는데, 다른 이들 못지않게 빠른 속도였다. 현재로서는 이제야 반죽을 시작한 임진혁이 제일 느린 것처럼 보인다.
“이제 이상 없는 거 확인했습니다, 메인 피디님!”
“원인 불명이라며? 또 문제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제한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동안 페이스트리 쉐프들에게 빵 만들기를 중단하라고 하지는 못했다. 메인 작가는 급하게 대본을 수정해 휘갈겨 썼다.
중간 촬영분 없이 어떤 전개로 프로그램을 짤 것인지 수습하기 위해서다. 한 번씩 껐다 켠 카메라들이 아무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지만 김선호 PD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혹시라도 또 카메라가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해 진행팀 보조 요원들을 보내 인근의 다른 스튜디오에서 여분 카메라를 빌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다른 스튜디오들도 전부 카메라를 사용 중이라서 세 개밖에 빌리지 못했다.
김선호는 말썽을 일으킨 카메라 다섯 대 전부를 교체하고 싶어 했지만 두 개는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여러 차례 점검한 끝에 결국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촬영을 시작한 것은 결국 30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흐.”
제한시간은 총 3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30분이나 촬영하지 못했다. 본래 요리하는 3시간을 전부 촬영하는 것은 아니고, 편집해서 30분 정도만 내놓을 예정이니 커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김선호 PD는 팔짱을 끼고서 출연자들을 지켜보았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 ◈ ◈
‘이제 친부모가 내가 만드는 빵을 보고 있을 거야.’
브라이언 신은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사정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그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백인인데 자신은 피부색부터 다르니 모를 수가 없다. 브라이언은 소년 시절,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이 밉고 싫었다.
아직 어린 열 살 그가 살던 일리노이주의 작은 도시에는 동양인이 많지 않아 그의 피부색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소년 시절, 브라이언은 친구가 없었다. 열 살짜리 남자애들은 어른보다 잔인해서, 자신들과 다른 브라이언을 괴롭히고 놀렸다. 가끔 맞아주는 것 따위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건 ‘친부모가 버린 쓰레기’라는 폭언이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빨라서 브라이언이 어느 말에 반응하는지 금방 알았고 그 말은 끊임없는 빗살처럼 브라이언을 때렸다.
맞아서 멍이 들어도 상처가 남아도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옷이 더럽혀지면 혼자 빨아서 말렸고 차비를 빼앗기면 걸어서 왔다. 브라이언을 때리던 아이들이 눈에 보이는 곳은 때리지 않았고 배나 등, 다리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을 중점적으로 때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맞고 다닌다는 것을 어딘가에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부모조차도 버린 아이를 누가 소중하게 대하겠는가?
‘양부모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을 거야…… 캐서린하고 닐은 내 친부모가 아니니까.’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자신은 오롯이 혼자다.
그렇지만 연 1회 하는 학교의 정기 신체검사 날, 큰 오해가 생겼다. 브라이언의 팔과 다리에서 지독한 상처를 발견한 간호사는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했다.
만성적으로 생긴 멍과 상처를 보면 가혹한 폭력을 반복적으로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 나온 사회복지사가 여러 차례 질문을 던졌을 때 브라이언은 누가 때렸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했다.
신참 사회복지사는 아이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 부모에게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너를 때렸으면 솔직하게 말해 줘. 그래야 우리들이 너를 지킬 수 있단다.”
“캐서린도 닐도 나를 때린 적 없어요!”
부모가 자신을 때렸다고 인정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격렬한 부정으로 인해 오해는 더 커졌다.
사회복지사와 경찰이 여러 차례 물어봐도 브라이언은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입을 꼭 다물었다.
어떤 놈이 때렸는지 밝힌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으며, 공연히 존과 제임스에게 더 맞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어린 브라이언의 세계는 어둡고 음침하며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회복지사와 경찰은 브라이언이 학교와 집 외에 다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론이 브라이언에게 새로운 위탁 가정을 찾아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단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제는 그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
“예?”
자신이 비밀을 지키려고 한 탓에, 양부모는 장기간에 걸친 입양아 학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자기 방, 유일하게 안전하고 따뜻한 장소를 빼앗기고 임시 위탁 가정으로 배정될 가능성을 깨달은 순간, 브라이언은 어렵게 사실을 말했다. 닐과 캐서린은 폭력 혐의를 받아 크게 불편을 겪었으나 브라이언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맞고 다니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어린 양아들을 위로했다.
“네가 우리에게 와준 것은 가장 큰 축복이란다. 그동안 힘들었지.“
그때 양어머니 캐서린이 해준 말은 지금도 가슴 깊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캐서린은 양아버지 닐이 ‘그 편지’를 꺼내오라고 했다. 캐서린은 봉투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며 진중하게 말해주었다.
“브라이언, 네 부모님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란다.”
“예?”
“너를 입양할 때 보육원에서 같이 준 편지와 네 이름이야.”
캐서린은 브라이언이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는 낡은 종이를 내밀었다.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가 기이한 작대기와 뒤섞여 있는 그 글자가 한글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영어로 된 번역문을 함께 내밀며 하나씩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여기 이 말은 네 어머니가 너를 사랑한다고 쓰여 있는 말이야.”
“오, 맙소사. 캐서린!”
그렇게 맞아도 눈물 한 번 흘리지 않고 악을 쓰며 싸웠더랬다. 처음으로 브라이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음속 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캐서린이 또박또박 브라이언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너의 어머니는 널 버린 게 아니라, 사정상 잠시 맡긴 거라고 되어 있어.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겨서 널 찾으러 오지 못하게 된 거야.”
“…….”
“너는 나와 닐에게도 소중한 아이야. 널 낳아주신 친부모 덕분에 우리가 너처럼 귀한 아이를 맡아서 키울 수 있게 되었단다. 그러니 너도 널 소중하게 여겨야지.”
애정 표현이 솔직하지 못한 양어머니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후, 브라이언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친어머니가 쓴 편지를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한국어를 따로 공부했다. 수백 번을 다시 잃어도 편지에는 쓰여 있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형편이 좋지 않아 잠시 맡기는 거야. 사랑하는 아들 춘봉아! 꼭 찾으러 올게.>
자신의 이름이나 연락처가 무엇인지는 적어두지 않았다.
브라이언을 괴롭혀오던 아이들은 처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 친구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생활은 더 괴로워졌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더라도 괴롭힘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닐과 캐서린은 아예 동양계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를 골라 이사를 갔다.
평범한 대기업의 회사원이었던 닐은 새 회사에서 취업하는 것을 포기하고 배관 기술을 배워 배관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유치원 교사였던 캐서린은 베이비시터 일을 하며 새로운 일을 찾았다.
브라이언은 양부모가 자신을 위해 직업을 포기한 것을 알고서 부채감을 느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브라이언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상아색 피부를 아무리 씻어도 어머니처럼 분홍색 피부가 되지는 않았다.
타고난 흑발을 금발로 탈색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으며 운동은 하면 할수록 몸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할 뿐이다.
그는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무슨 수를 써도 오리는 백조가 될 수가 없어.’
그러던 어느 날, 미들 스쿨의 화학 실용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이스트를 넣은 반죽이- 즉 빵이 오븐 속에서 부풀어 오르며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브라이언은 그 변화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조금 전까지 하얗고 차가우며 끈적끈적한 덩어리였던 그것은 보잘것없는 가루가 더해지자 은은히 타오르는 오븐의 고온 속에서 크나큰 변화를 거쳐 다시 태어났다.
고작해야 보잘것없는 흰색 덩어리다. 그 반죽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은 신비 그 자체였다.
나비가 번데기를 찢고 나오며 자연스럽게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놀랍기 그지없는 변화였다. 그 순간이 황홀하며 아름다워서 브라이언은 울 뻔했다.
‘나도 빵을 구울 거야. 아주, 아주 많이 구울 거야.‘
지금도 브라이언은 밀가루가 반죽이 되고 익어서 금빛으로 구워지는 빵을 제일 사랑한다.
그렇게 그는 제과제빵 분야에서 일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을 이루었다.
특급 호텔의 페이스트리 쉐프로 일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몇 차례 한국에 드나들며 친부모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열 살 때 자신을 놀리던 존과 제임스에게 찾아가서 얼굴을 들이대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봐, 이 새끼들아! 내 친부모님은 나를 버린 게 아니라고. 우연히 사고가 나서 못 오시게 된 거란 말이야. 지금 빵을 만드는 이 모습도 그분들이 보실 거라고.’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하고 저절로 웃음이 난다.
어렵게 부모를 찾았으며 부모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고 한꺼번에 동생들까지 얻었다. 가슴 속 한구석에 있던 허전함이 전부 채워져 가는 그 기쁨. 그는 그 환희를 전부 이 레시피에 담았다.
‘연어와 아보카도에 치즈 크림을 올릴 거야.’
양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아보카도에 친모가 좋아하는 연어,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치즈 크림을 활용한 메뉴다.
두 사람이 텔레비전을 본다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었구나’라고 알 수 있게 배려했다.
브라이언은 호밀 식빵 반죽을 먼저 만들어 발효기에 넣은 후, 바로 치즈 크림을 준비했다. 치즈 크림에 잘게 다진 훈제 연어를 썰어 넣어 맛에 깊이를 주려고 솜씨를 부렸다.
그가 두 번째로 준비한 것은 연어 타르타르였다.
미리 깔끔하게 깍둑썰기해둔 훈제 연어를 옮겨 담고 양파를 손질해 잘게 썰었다. 흔히들 하는 단순한 일이지만 빠르고 정확해 과연 프로는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마를 헹궈내고 나서 송송 썬 신선한 차이브까지 양파와 연어가 담긴 스테인리스 볼에 넣은 후, 레몬즙과 마요네즈, 소금과 함께 버무렸다.
맛을 한 번 보고 나서 레몬즙의 양을 조금 더 넣은 후에는 아보카도의 껍질을 벗겼다. 능숙하게 순식간에 잘라낸 껍질들을 버린 후, 그는 아보카도를 얇게 잘라냈다.
“바질은 마지막에 올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