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92화 (92/656)

제 092화

주영모는 무대 위에 선 후배 쉐프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조리복을 입고 서 있는 임진혁은 조명 아래에서 주인공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머리 위에서는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어 얼굴을 강조하고 있으며 기존 설치된 것을 포함해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수백 번의 촬영 경험이 있는 베테랑 모델처럼 서 있었다.

카메라맨 전은형이 속삭였다.

“새 쉐프복을 광고하러 나온 모델 같아.”

“그러게. 그냥 서 있기만 해도 화보가 되네.”

보조 스태프 이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다니던 촬영 감독이 두 사람에게 조용하라고 손짓을 했다.

“자자, 이제 시작하자고.”

“촬영 시작합니다!”

감독이 큐 사인을 보내고 나서 사회자를 맡은 이희주가 웃으며 말했다.

“1차 테스트는 휘핑(Whipping)입니다.”

심사위원을 맡은 주영모 쉐프가 입을 열었다.

“재료는 세 가지. 비네그렛과 생크림, 달걀흰자입니다.”

무대 위에서 단순히 서 있을 뿐이지만, 카메라와 조명이 지켜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경력 있는 쉐프라도 주눅이 들어있게 된다. 주영모는 자신이 처음 TV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속이 불편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렇게 태연한 임진혁을 경계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주영모 쉐프님이 직접 고르신 테스트인데요.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기본적인 스킬을 테스트해보시려고 하십니다!”

“설마 이 세 가지를 섞으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주영모 쉐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아니지. 세 가지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섞어서, 최적의 상태로 15분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할 겁니다.”

주영모가 씩 웃었다.

“각 10분씩 드리죠.”

‘이건 만만하지 않을 거다, 애송이.’

생크림 휘핑과 달걀 휘핑은 최근의 제과점에서 직접 하는 데가 많지 않다. 보통 기계를 사용해서 하며 기계가 없더라도 거품기를 사용한다. 주영모는 이 테스트에서 어설픈 초짜들이 탈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기계를 사용해서 작업해 왔다면, 휘핑의 기본은 이미 까먹었겠지. 휘핑 자체가 엉망일 거야. 그걸 알아봐 주마.’

심지어 비네그렛.

비네그렛은 오일과 식초를 3:1로 섞은 서양식 샐러드드레싱을 말한다. 보통은 발사믹 비네그렛을 흔하게 사용하는데, 발사믹 비네그렛이라면 오일과 발사믹 식초를 3:1로 섞게 된다. 식초에 오일을 천천히 넣으면서 둘이 분리되지 않도록 거품기를 사용해 빠르게 저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사실 베이킹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법은 아니다. 최근의 윈도우 베이커리에서는 다이어트용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내놓기는 하지만 드레싱까지 직접 만드는 곳은 많지 않다.

그는 스테인리스 볼과 플라스틱 볼 중에서 고민 없이 바로 스테인리스 볼을 선택했다.

‘플라스틱 볼은 생채기가 나 있다면 지방 등 찌꺼기가 낄 수 있지.’

진혁이 고른 볼을 보고 주영모 쉐프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이 되어 있군요.”

“예, 플라스틱 볼을 골랐다면 휘핑하기 훨씬 힘들었을 겁니다. 함정을 피해가는군요.”

이희주 사회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기본이라고 하지만 기본을 잘하기가 쉽지 않지요.”

“모든 주방에서 당연히 스테인리스 볼을 사용하고 있는데, 굳이 플라스틱 볼을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영모 쉐프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동안 진혁은 마저 달걀을 골랐다. 제일 생기있는, 즉 신선한 다섯 개의 달걀을 고른 후 바로 깬다.

“머랭 먼저 하겠습니다.”

진혁은 말하면서 전혀 힘들지 않게 거품기를 든 손을 움직였다. 근육에 울긋불긋 힘줄이 올라오고 온 힘을 다해서 저어야 하는데, 표정이 너무나 편해 보였다. 얼굴만 보면 찻집에서 유유자적하게 풍경을 즐기고 있는 사람 같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누구보다도 잽싸다.

카메라맨 전은형은 보조카메라로 진혁의 손을 클로즈업했다.

‘안드로이드 휘핑 머신 같아.’

그는 거품기로 표면을 강타하듯 내려놓았다가 다시 올리는 동작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투명한 물이던 달걀흰자는 점차 허얘지고 뻑뻑해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진혁은 설탕을 조금 뿌렸다. 샴푸 거품처럼 풍성해진 머랭을 보고 그가 말했다.

“다 했습니다. 생크림 휘핑하겠습니다.”

“아니, 벌써?!”

주영모 쉐프가 입을 딱 벌렸다.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는 주영모 쉐프가 놀란 티를 낸 것을 본 카메라맨은 주영모 쉐프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이 장면도 나중에 쓰면 좋을 것이다.

“4분 만에 머랭을 쳤다고!”

진혁은 주영모 쉐프가 뭐라고 말을 걸든 상관없이 다시 생크림을 스테인리스 볼에 옮겨 담았다. 그가 생크림을 휘핑하는 동안 주영모 쉐프는 머랭의 완성도를 살폈다.

“머랭을 지나치게 세게 저으면, 단백질이 무너지면서 오버픽이 될 수가 있는데 이건 아주…… 좋은 상태군요.”

그는 진혁이 바로 손을 내려놓고 올리브유를 집어 드는 것을 보았다.

‘생크림도 벌써 완성했다고?!’

주영모 쉐프는 손에 들고 있던 머랭 볼을 떨어뜨릴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테이블에 머랭 볼을 올려놓고 그는 생크림 볼 앞으로 갔다.

“앗, 차거.”

그는 깜짝 놀라 생크림 볼에서 손을 뗐다. 원래 보통 온도였을 스테인리스 볼은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뭐야, 누가 냉장고에 넣어줬나.’

생크림을 휘핑할 때에는 크림 사이 사이에 공간이 충분히 생길 수 있도록 공기를 넣어주며 양옆으로 치는 것이 제일 빠르다. 최근 사이언스 쉐프 뉴스에서 생크림과 머랭, 그리고 비네그렛을 휘핑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다루었다. 그때 영모가 새로이 익힌 방법은 ‘둥글게 젓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었다.

‘열흘 전의 사이언스 쉐프 뉴스까지 보고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해외의 뉴스도 챙기고, 기본도 잘되어 있다면 사실…… 경험이 부족해도 인정할 수도 있지.’

주영모는 티스푼으로 휘핑크림을 조금 떠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녹아내리는 휘핑크림은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여기 휘핑크림 재료 뭐로 줬어요? 왜 이렇게 맛있어?”

놀라버린 주영모가 뒤돌아보며 김산호 PD에게 물었다. 촬영 감독이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아, 맞다. 아직 촬영 중이지.”

감독은 아직까지 컷을 외치지 않았다. 비네그렛 만들기를 마친 진혁이 손을 들었다.

“다 했는데요.”

“비네그렛은 이제 15분 동안 기다리고 난 다음에 얼마나 분리되는지 보고 평가할 겁니다. 시간이 필요해요.”

주영모가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머랭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죠. 거품을 칠 때는 손목만이 아니라 팔 전체를 사용해서 움직이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원을 그리면서 하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로 치는 것이 제일 좋죠. 얼마 전에 사이언스 쉐프 뉴스에서 다루었는데 우리 임진혁 쉐프도 그 뉴스를 봤나 봅니다.”

임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못 봤는데요.”

관객 석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창덕이 소리 없이 킥킥 웃었다.

‘H&J가 오픈한 게 보름 정도 됐으니까, 정신없을 때지. 당연히 저런 뉴스 같은 걸 챙겨볼 수가 없지.’

테스트가 무엇인지 듣자마자 서창덕은 안심했다. 그는 지난 보름간 임진혁이 오픈 키친에서 반죽을 만들고 머랭을 치고 생크림을 휘핑하는 모습을 내내 보아왔다. 그래서 그가 떨어질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가게에서 휘핑하실 때보다 더 느리게 하신 것 같기도 한데. 무대라서 긴장하셨나?’

서창덕은 진혁이 일부러 카메라에 녹화될 것을 의식해서 느리게 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

주영모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다른 쉐프들이 테스트를 할 때는, 이들이 모두 주영모를 존중하며 어른으로 모셨다. 하지만 이 임진혁은 그런 예의가 없어 보였다.

“그럼 그냥 경험으로 알아냈다, 이건가?”

주영모가 반말로 물었다. 진혁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강남의 오픈 키친 카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 머랭은 직접 손으로 쳐서 만들면 손님들이 구경하면서 좋아하십니다. 같은 이유로 휘핑크림도 손님들 앞에서 치고 있다 보니, 워낙 많이 하던 일이라 속도가 빨라진 것 같습니다.”

지난 열흘간 오픈 키친에서 매일같이 하던 일이라 카메라와 인간의 눈에 적절한 속도를 조절하기도 쉬웠다. 진혁은 이 테스트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럼, 비네그렛은?”

“그냥 섞어 보았습니다.”

“대단하군.”

주영모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처음 봐서 섞었다라.”

“이번 발사믹 비네그렛은 처음 해 보았지만 샐러드 개발 때문에 오렌지 비네그렛, 머스터드 비네그렛, 라즈베리 비네그렛은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군.”

주영모가 납득했다. 그가 진혁을 잠시 응시하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기술 테스트 통과를 축하하네. ……이제 시작일 뿐이니 앞으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게나.”

“감사합니다.”

진혁이 웃었다. 테스트가 너무 쉬워서 사실, 테스트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계속 이런 식이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었겠는데.’

그는 아버지나 일봉에게 주의받은 대로, 방송에서 무언가 ‘쉽다’거나 ‘연습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겉으로는 그런 태도를 드러내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테스트가 끝나고 진혁이 무대를 내려가 쉐프복을 갈아입으러 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사회자 이희주가 짧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오늘 테스트를 해보니 어떠셨습니까?”

“평소 계속해오던 일이었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진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태도였다. 이희주는 생각했다.

‘주영모 쉐프가 놀랄 정도로 기초가 튼실해서 화면을 좀 뽑고 싶은데.’

“평소 제빵을 하시면서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이 답변에 사회자는 조금 당황했다.

‘이 답변에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보통 비슷비슷하다.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힘들지만 새로운 빵을 구상하는 등 창조적인 면이 즐겁다고 하는 식으로 부정적인 답변을 한 다음에 긍정적인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아예 빵 만드는 것이 너무 좋다며 기쁘게 웃는 식으로 답변을 회피하기도 한다. 경험이 풍부한 프로 쉐프들은 자신의 이미지가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으로 굳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희로애락이 뚜렷하지 않고 대답이 얌전해서 재미가 없어. 이 사람을 어떻게 캐릭터 메이킹해야 하지?’

“일하는 게 힘들지 않다니요.”

“그전에 더 힘든 일을 해서요.”

됐다 싶었던 이희주가 캐물었다.

‘힘든 일이라면…… 모델? 배우? 이쪽이려나. 알려진 게 전혀 없는데.’

“출전자들 중 나이가 상당히 젊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군대에 다녀왔습니다. 육군 현역으로 제대했죠.”

이희주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정말 힘들었겠네요. 저도 군대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다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짜 젊으시네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앞으로 방송에서 진혁의 캐릭터를 어떻게 잡을지 확인하기 위해서 기본 질문에 더해서 세세하게 물어보았다.

‘다른 쉐프들은 그래도 정보가 좀 있는데, 이 임진혁은 정보가 하나도 없단 말이지. 그런데 뭔가 더 주지를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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