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91화
테이스팅 테스트(Tasting Test).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식당에서 새로운 쉐프를 고용할 때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인사부에서 서류 평가를 통과한 이들은, 헤드 쉐프가 지정한 메뉴로 테이스팅 테스트를 받는다. 경력만으로는 요리사들이 어떤 맛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진혁 씨가 받을 테스트는 테이스팅 테스트는 아니에요.”
전화상으로 김산호 PD가 설명한 것을 듣고 진혁은 오히려 약간 실망했다. 그는 자신의 시그니처 디쉬를 미리 생각해서 연습했었다.
‘뭐, 나중에 또 쓸데가 있겠지.’
“기초 기술 테스트입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쳤다. 다행히 가게를 쉬는 월요일에 촬영이 잡혀, 진혁은 편안한 마음으로 테스트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마침내 월요일 오전.
방송국 앞에서 창덕과 만난 진혁은 박하연에게 도착했다고 연락했다. 누군가 데리러 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경비원이 있었다.
“저 SBC 방송국에는 처음 와 봐요.”
서창덕이 DSLR 카메라를 가방째 목에 걸고서 두리번거렸다. 임진혁이 창덕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에 왜 따라온 거야?”
“임 쉐프님 사진 찍으러요.”
“어차피 방송이라 사진은 찍힐 거 아닌가.”
진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창덕이 웃으며 대답했다.
“촬영용 방송 파일이랑 저희가 가게에서 찍는 거랑 또 다르잖습니까? 화웅에서 협의 다 마쳐서, 이 사진들 제가 찍은 거 가게에서 사용해도 된대요. 포스터 사이즈로 뽑아서 가게에 붙여 놓을 겁니다.”
“……맘대로 해라.”
“제가 이래 봬도 H&J에서 일하기 전에는 웨딩이랑 돌잔치 보조, 에어쇼, 게임쇼 같은 것도 많이 나갔어요. 행사 좀 뛰어봤죠.”
“그런데 왜 갑자기 빵집에서 일해?”
“모르셨어요? 이거 섭섭하네.”
“?”
“제가 쉐프님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에 반해서 아예 제빵으로 업종 변경했잖아요? 학원 다니고 있는데, 화웅에서 새로 여는 빵집에서 일할 직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나름 이래 봬도 추천받아서 뽑혀왔습니다.”
“그냥 이력서 내고 선발한 줄 알았지.”
“홀 직원들도 빵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창덕이 오른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씩 웃었다.
“진실은 외모를 봐서 뽑혔죠.”
“…….”
‘원래 이런 성격이었구나.’
홀에서 싹싹하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응대하면서 미소를 보일 때는 단순히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말하는 걸 좋아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방송국에 와서 신난 서창덕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즐거워했다.
“3시 30분까지 스튜디오 B. 여기 맞지요?”
“그래.”
서창덕과 임진혁, 키가 큰 남자 두 명은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키가 커서 눈에 띄었다. 미리 나와 있던 촬영팀 스태프, 막내 박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이분은 그 말씀 하셨던 화웅 쪽 카메라맨이시죠? 이쪽입니다.”
스튜디오 B 입구를 통과해 들어가자, 안쪽에서는 드넓은 주방이 설치된 무대가 보였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새 기계들 거의 전부 HW-화웅의 이니셜이 보였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테스트를 하려고 하나 보군.”
그 앞에는 사복을 입은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 중, 진혁은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두 사람보다는 키가 작지만 어깨가 넓고 덩치가 커서 찾기 쉬웠다.
“여기요! 여기!”
김산호 PD가 양손을 흔들었다.
“테스트를 받을 사람들이 꽤 많군요.”
“아닙니다. 이분들은 이미 테스트를 통과하신 참가자분들입니다.”
“그럼 오늘 테스트를 받을 사람은……?”
“지금 시각에는 진혁 씨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와 있다니,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 보군.’
“미리 테스트를 통과하신 분들이 응원하려고 하나 봐요.”
창덕이 웃으며 말했다. 진혁이 씩 웃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뛰어난 청력을 가진 진혁의 귀에는 이들이 아까 웅성거리던 소리가 전부 들렸다. 누군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었겠지만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알 수 있었다.
‘이민주는 어디 가고 시커먼 남자가 새로 들어와?’
‘경력도 안 되는 애송이를 화웅에서 돈으로 밀었다며.’
‘그래도 어느 정도 하니까 테스트도 보는 거 아니야?’
‘솜씨나 보자고.’
‘어차피 못하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아버지가 말하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귀여울 정도였다.
‘이런 걸 경쟁이라고……. 이 정도야 우습지.’
그는 옛 시절을 잠깐 떠올렸다.
최초의 훈련생들은 일월신교의 신도들이 낳은 자녀가 아니었다. 외부에서 사 오거나 데려온 고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중에서 쓸만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명목으로 더 혹독하고 잔인한 훈련을 했다.
고독(蠱毒).
항아리에 두꺼비와 거미, 지네와 개미 등 독이 있는 동물과 곤충을 잔뜩 집어넣는다.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두고 백 일을 기다린다. 제일 강한 독물이 다른 동물과 곤충을 잡아먹고 살아남는데, 그 독기가 쌓여 최고의 저주용 재료가 된다고 한다.
일월신교의 전 교주는 이 고독술을 응용하여 최초의 훈련생들에게 적용했다. 백 명씩 백 개의 조를 만들고 그 조원들 중 단 한 명만 살아남는 훈련을 했다. 함정을 파든 독을 먹이든 칼로 찌르든 상관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그는 그 백 명 중에서 살아남았다.
‘입이 가벼운 놈들이로군.’
진혁은 헛된 소문들을 주워 담아 상대를 얕보는 이들의 목소리를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첫 번째 테스트는,”
들창코에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머랭 치기입니다.”
진혁은 그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서창덕이 알려주었다.
“주영모 쉐프님이네요!”
“주영모 쉐프님이 저렇게 생겼어?”
“예. 학원에 원장 직강 나오셨을 때 뵈었어요. 학원 프런트에도 사진 걸려 있고요.”
주영모 쉐프는 본인의 이름을 내건 주영모 과자점을 운영하는 오너 쉐프로, 한국의 첫 제과 제빵 명장이다.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한다며 자신의 레시피를 공개해 여러 권의 책을 냈으며 본인의 이름을 걸고 베이커리 학원도 운영하고 있다. 빵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하다.
진혁도 사실 아드레아노 존부보다 주영모 쪽이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백정흠 사장님 못지않게 다혈질적인 걸로 유명하시죠?”
진혁이 창덕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사회를 맡은 주영모 쉐프가 큰 소리로 호명했다.
“임진혁 쉐프는 무대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26장
조금 전.
아직 임진혁 쉐프가 도착하기 전, 김산호 PD는 곤란해 하고 있었다.
“경력이 이제 일 년째인 애송이를 심사해서 올려달라고?”
“올려달라는 게 아닙니다. 심사를 해 달라고요.”
주영모 쉐프가 미간을 찡그렸다.
“비주얼도 되고, 화제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사진을 보셨잖습니까.”
사진을 받은 주영모 쉐프가 얼굴을 더 찡그렸다. 모델처럼 잘생긴 몸은 쉐프라기보다 헬스 트레이너나 운동선수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까지 확인하고 나서 주 쉐프가 사진을 탕하고 내려놓았다.
“얘는 제대로 된 쉐프가 아닐 수도 있어. 이 몸매를 봐. 자기가 만든 빵 하나 맛보지 않은 것 같네.”
통통하게 살찐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며 주영모 쉐프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 한국 대 미국의 국가적인 대결이 되게 생겼는데, 잘생겼다는 이유로 이렇게 경험이 없는 애를 올리냐고. 김 PD, 진짜 이러기야?”
“최소한 인원수는 똑같이 맞춰야 할 거 아닙니까. 프로그램 포맷 자체가 대결인데 한쪽이 부전승으로 올라갈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이분 크로캉부슈 하는 걸 봤는데 솜씨가 일 년 경력 같지는 않아요.”
“크로캉부슈 같이 쇼맨십이 필요한 특정 아이템만 계속해서 연습했으면 그것만 대단히 잘할 수도 있지.”
주영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는 그 영상을 보지 못했으나 이야기만 들었다.
“크로캉부슈만 수백 번 연습한 걸 수도 있지.”
그는 작년에 진행한 제과 워크숍을 떠올렸다. 크로캉부슈와 부쉬 드 노엘, 두 종류의 유명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었을 때, 여자에게 고백하려고 한다며 크로캉부슈를 연습하러 온 남자가 있었다. 뺀질거리는 놈이 손재주만 좋아서 금방 방법을 익혔지만, 빵을 만드는 데는 뜻이 없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빵을 우습게 보는 놈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1차 테스트는 기초 기술 테스트로 할 거야. 출연후보자가 그 테스트를 통과하든 통과하지 못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알겠습니다, 주 쉐프님.”
“경력이 좀 부족해도 된다면 TV에 나오고 싶어 하는 애들은 많아. 내가 명단을 따로 주든지 할 테니까, 추가적으로 테스트를 더 해도 된다고.”
“임 쉐프가 거의 다 왔어요. 일단 떨어질지, 붙을지는 사실 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그다음에 보죠.”
임진혁을 데리러 가면서 김산호 PD는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너무 급이 떨어지는 사람이 나올 수는 없으니까, 강남 화웅 베이커리의 유일한 쉐프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데. 얼굴도 먹어 주고. 스폰서로 화웅도 물어왔고. 주 쉐픈 도대체 임 쉐프의 어디가 맘에 안 든 거야?’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은 작은 회사지만 오븐계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맥도 넓다. 하지만 제과제빵 사관학교의 교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주영모 역시 이 바닥에서 꽤나 인망이 좋다. 양쪽 다 포기할 수 없는 김산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임진혁을 기다렸다.
곧 막내 박하연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빠른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테스트를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김산호 PD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관없습니다.”
“이쪽에서 조리복으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진혁이 들어간 탈의실 문이 닫히고, 김산호 PD가 지휘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혼자 남은 창덕이 물었다.
“방송 현장은 처음인데, 엄청 급하네요.”
박하연이 대답했다.
“지금 다들 좀 날카로워져 있어요. 원래 테스트 다 마치고 오늘 오후부터 촬영을 들어가기로 했는데 일정이 미뤄졌으니까요.”
그녀가 두리번거리다가 속삭였다.
“지금 진혁 쉐프님 탈락할 수도 있어요. 테스트가 좀 하드하게 들어간대요. 낙하산이라고 오해를 받았나 봐요. 그런 게 전혀 아닌데……진짜 저희가 얼굴만 보고 초빙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창덕이 푸핫하고 웃었다.
“그건 진짜 오해네요. 저희 임 쉐프님이 얼마나 성실하시고 실력도 좋으신데요. 얼굴만 장점이 아니에요.”
그가 단언했다.
“무슨 테스트건 간에 그게 제빵이나 제과랑 관련이 되어 있는 거라면, 임 쉐프님이 탈락할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