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62화
“저를 봐요. 길 가다 먹은 빵이 너무 맛있어서 아예 여기에 취업을 해 버렸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마라톤 하다가 잠깐 멈추는 건, 뭐 대순가? 난 인생의 방향을 아예 틀어 버렸는데. 사장님이 이 빵을 직접 만드신 줄 알고 빵 만들기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게 안 돼서 계산 밖이었지만.”
“하하.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분한테 빵을 직접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고 보면 이 빵을 만드시는 분은, 40여 년 정도 경력이 있는 훌륭한 분이시겠죠?”
김가영이 꿈꾸는 듯한 눈빛을 하며 양손을 모았다.
“누군지 알게 되면, 그쪽으로 확 가 버리려고?”
백진영이 농담을 건넸다.
“우리 백 사장님이야 빵에 어울리는 커피를 잘 내리시니까, 그걸 배우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벅차요.”
처음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김가영의 눈빛은 절박했다. 정말로 지금 이것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기백이 있어서 백진영은 그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배달 왔습니다-”
빵의 양을 400개로 늘리면서, 오전에 절반, 그리고 오후에 절반이 도착한다. 오후의 빵이 도착할 시간이다.
“이번에는 케이크도 있습니다.”
배달을 맡은 운전기사가 바퀴 달린 커다란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케이크요?”
미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던 김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날짜를 확인한 백진영이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감은 귀신같이 지키는데? 역시 진혁 씨야.”
케이크 상자를 옮기며 운전기사가 물었다.
“케이크는 어디에 둘까?”
“형, 이쪽 냉장고 안으로 옮겨 주시면 돼요.”
“이거 너도 보면 알겠지만, 백 사장님하고 완전히 똑같이 생겼어. 빵 잘 만드는 줄은 알았는데 슈가 크래프트까지 이렇게 신의 손일 줄은 몰랐다.”
“오븐 모양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삼촌이 거기에 있다고요?”
“나중에 열어 보면 알아. 미친 퀄리티야.”
운전기사가 양손을 들어 휘저으며 케이크의 실루엣을 그려 보였다.
“내가 운전하면서 이렇게 조심해본 게 처음이다, 처음이야. 옆좌석에 처음으로 네 형수 태웠을 때 빼고 이렇게 떨려 본 적이 없어. 오다가 케이크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들더라고.”
“이럴 게 아니라, 삼촌에게 와서 보라고 해야겠다.”
“안 그래도 내가 불렀어.”
매일같이 빵을 배달하고 있는 김현석은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과 십여 년을 함께 하고 있는 충실한 직원으로,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사람이다. 백진영과도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다.
진혁의 베이커리에서 빵을 받아서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기에, 일부러 외부인이 아니라 현석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나중에는 알려질 수밖에 없는 솜씨지만 가능한 한 숨기고 우리끼리만 알고 있고 싶은 거지…….’
“그리고 이번에 신제품이라고 샘플을 좀 주셨어. 나도 올라오다가 먹어봤는데 맛있더라.”
케이크를 옮기고 난 후 현석이 건네준 빵은 아주 낯익은 물건이었다. 한 손으로 벗길 수 있게 종이 포장지에 감싸인, 위쪽 한 면만 노릇노릇한 갈색으로 구워진 노오란 카스텔라다.
“이건 조금 전에 TV에 나왔던…… 스틱 카스텔라 아니에요?”
“이번에 마라톤 대회에 후원하면서 개발했는데, 한번 먹어보래.”
“우리야 완전 땡큐죠!”
“이것도 그분이 만드신 거였구나.”
잠시 스틱 카스텔라를 나누어 먹으며 셋 모두 조용해졌다. 빵을 씹고 있던 입의 근육이 멈추고, 혀가 멈추고, 눈을 감는다.
‘녹아내린다.’
‘텁텁하지도 않고 너무 달지도 않아.’
‘조금 더 먹고 싶어…….’
시판하는 누네띠네 과자보다 조금 더 긴 길이의 스틱 카스텔라는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타닥, 타닥, 타닥.
동상처럼 굳어 있는 세 사람을 깨운 것은, 백정흠 사장의 말소리였다.
“현석이 왔냐. 케이크는?”
“냉장고에 옮겨 놨어요.”
“삼촌 오시면 열어 보려고 했어요.”
“니들 손에 들고 있는 종이 포장지는 뭐고?”
“아, 이거는 이번에 새로 개발하신 신제품이래요. 스틱 카스텔라라고…….”
“어디, 나도 한 번 먹어보자.”
백정흠 사장이 먹는다면 절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현석은 잽싸게 한 개를 들어 점퍼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걸렸다.
“야야, 이거 횡령이야, 횡령!”
“임진혁 씨가 나 먹으라고 따로 챙겨준 건디요!”
바스락.
밀봉된 종이 포장은 마라톤 선수들을 배려했기 때문인지 한 손으로 벗기기 쉽게 가볍게 주욱 찢어진다. 그 안에 들어있는 카스텔라에서는 진한 우유 향기가 풍겼다.
“냄새부터 좋구만.”
“이것도 히트 상품이 될 거예요.”
김가영이 흥분해서 말했다. 백정흠이 한 입, 카스텔라를 베어 물었다.
“으음……!”
백정흠은 사실 여태까지 먹어왔던 맛 그 이상의 맛이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크림슨 트리플 치즈 케이크는 진하디진한 치즈의 향과 폭신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좋았다.
황금 버터 앙금 소보루는 농밀한 버터의 맛과 어울리는 팥의 은은한 단맛의 조화가, 헌드레드 초콜릿 쿠키는 달콤씁쓸한 맛이 여러 겹으로 겹쳐있으면서 바삭하게 씹히는 것이 포인트다. 치킨 파이는 만두와도 같은 호탕한 육즙을 살려냈다.
진혁이 만들어낸 빵들을 전부 먹어보았지만 이런 부드러움은 처음 경험했다.
“마치 이제까지 힘들게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제 쉬어도 좋다고 이야기하는 듯한,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맛이군…….”
“맞아요! 그런 맛이에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러고 보니 그렇다. 진영과 현석, 가영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스틱도 정식으로 주문해라. 만일 천 개씩 가능하다고 하면 천 개씩 주문해야 해.”
“일일 1,000개요?! 그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 자체가 너무 적은데 과연 가능할까요?”
“선금을 더 준다고 해. 그럼 알아서 사람을 더 쓰든지 하겠지.”
“……!”
“사장님, 이 카스텔라도 미쳤지만 케이크는 더 대단합니다.”
현석이 마치 자기가 만든 것처럼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제가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잘 배달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 ◈ ◈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실제 스테인리스제 오븐인 것처럼 아름다운 은색으로 빛나는, 섬세하게 세공된 오븐이었다. 오븐 안 트레이에는 자그마한 초콜릿 쿠키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하나만 비어 있다. 초콜릿 쿠키가 올려진 은빛 트레이를 한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은 하얀색 작업복을 입은 백정흠 사장이다. 허리에는 깨알같이 자그마한 공구 통을 차고 있다.
“작업화 끈 묶은 리본 좀 봐…….”
“그보다 우리 가게! 가게 간판까지 완벽해요!”
가영이 외쳤다.
“빌딩 옥상까지 완벽하게 다 올라갔네요. 오븐 위의 빌딩이라니, 너무 잘 어울려요.”
“아래쪽에 있는 스퀘어 케이크는 그냥 밑판인가? 여기서 엄청난 설탕 향기가 나는데…….”
“사장님 60살 회갑연 때 먹는 건가요, 이거?”
“이걸 어떻게 먹…….”
입가에 주르륵, 저절로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아내며 백정흠이 말했다.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나? 영구 보존해서 박제해야지.”
현석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먹기 위해 만든 케이크라고, 절대로 꼭 먹어 주셔야 한다고 진혁 씨가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담인가?”
“예. 특히 빌딩을 만든 화이트 레이어 케이크는 이번에 새로 시도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더 맛있을 거라고…….”
“크흠, 흠.”
백진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대학 때 아는 녀석이 3D 조형을 하는데, 사방에서 사진을 찍고 출력하면 3D로 출력을 할 수 있답니다. 유통기한 문제도 있으니 이 케이크를 3D로 뽑아내고, 실제 축하연에서는 케이크를 드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 그래야겠지. 지금 당장 먹으면 안 되겠지…….”
‘지금 당장 먹고 싶어 하시고 계셨어?!’
‘하긴, 이 황홀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는 정말…….’
백정흠 사장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이제 도로 넣어 두게.”
현석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시 케이크를 상자에 넣었다. 김가영이 검지를 입술에 물고서 말했다.
“조금만 더 보고 싶은데 아쉽네요.”
백정흠 사장이 말했다.
“축하연에 자네도 오라고.”
“저도요?!”
“그래, 진영이가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둘이 같이 와.”
“아, 알겠습니다.”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가영은 아주 잠깐 갈등했다.
‘카페 사장님하고 같이 건물주님의 회갑연…… 엄청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뻘쭘한 자리…… 엄청 촉촉해 보이는 케이크…… 개 어색한 자리…… 엄청 좋은 냄새 나는 케이크…….’
그녀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티셰님의 케이크를 먹을 기회를 놓칠 순 없지.’
◈ ◈ ◈
딸그랑, 딸그랑!
가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펴졌다. 가게 안에 들어온 여자가 머뭇거리자 일봉이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제 주문한 스틱 카스텔라를 찾으러 왔어요.”
“선금 넣어주신 분! 얘기 들었습니다.”
봉지에 따로 포장된 스틱 카스텔라를 꺼낸 일봉이 그대로 건네주었다.
“저, 진혁 씨는 오늘은 안 계신가요?”
“지금 주방에 계십니다. 불러 드릴까요?”
“아닙니다.”
여자는 미소 짓고 카스텔라 봉지를 받았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중에 직원분께서 보여 주실래요?”
“뭔데요?”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짧은 동영상 클립을 보여 주었다.
“어제 있었던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의 수상 인터뷰인데요.”
일봉이 궁금해하며 카운터 너머로 고개를 죽 뺐다.
-지직, 지직.
버퍼링이 끝나고 바로 영상이 재생되었다. 스마트폰에서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늘 소망시 마라톤 대회에서 1등으로 들어온 김철희 선수입니다! 김철희 선수, 만년 2등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1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는데요. 수상 소감을 들어볼까요!”
“카스텔라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예?”
“세상에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맛있어서 중간에 걸음을 한 번 멈춰 버렸어요. 그대로 돌아가서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빨리 달려서 가게 이름을 알아낸 다음에 많이 사 먹는 게 낫겠다, 싶어서 죽어라 달렸죠. 페이스 조절이 조금 흐트러질뻔했지만 빵 생각을 하면서 견뎠어요.”
“예, 이 카스텔라는 햇살노인정 명의로 협찬이 들어온 제품이고요,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선수 중 일부가 마약이라도 넣은 게 아니냐는 항의를 하는 등 논란이 있어 약품 검출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삐익.
여자가 동영상을 중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