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61화
“이건 뭐야?”
“앗, 보지 마!”
이미 개봉된 봉투는 안에 진희의 건강검진 결과를 담고 있었다.
“신체 나이 ……마흔여덟? 너 임진희 맞냐?”
“아, 누나라고 하라고!”
“누나 맞네. 엄마 아빠보다 더 늙은 누나.”
“아니야!”
병원에 들어가서 힘들다, 피곤하다는 입에 달고 살았지만 이렇게까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줄은 몰랐다. 진혁이 혀를 차며 진희를 바라보았다.
“쯧쯧. 늙은 게 그렇게 좋을까.”
“우씨!”
“이게 진희 네 결과가 맞니? 내 것하고 바뀐 게 아니니?”
어머니는 진지하게 진희의 건강검진 결과를 읽으며 물었고 진희는 왁 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제 것 맞아요. 다 확인해 봤어요.”
“너, 이렇게 몸 상하면서 병원 일을 꼭 해야겠어?”
“저만 이런 거 아니에요. 우리 병동 간호사들 다 그래요. 전 그나마 괜찮은 편이에요.”
“그럼 거기가 이상한 거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머니도, 진희도 흥분해서 점점 더 말투가 날카로워져 갔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았는지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와 두리번거렸다. 고양이가 진혁의 무릎 위로 오르려고 하는데 진혁이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엄마한테 가, 이 자식아!’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며 어머니의 무릎에 뛰어올랐다. 어머니는 고양이를 안아 올리며 뺨에 얼굴을 부볐다.
“그래, 우리 막내야. 뭐 먹고 싶은 게 있어?”
어머니는 고양이를 안고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진호야, 고맙다. 나중에 소고기 육포 주마.’
“야아오오오오옹-”
부엌에서 화답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리고, 어머니가 고양이를 달랬다.
“그래, 그래. 진호야.”
진희는 아버지와 진혁과 함께 거실에 남았다. 어머니가 자리를 뜨고 난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었다.
“일하는 게 많이 힘드냐.”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뭐.”
“그만둘 생각은 없고?”
“…….”
진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저번에는 그만두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더니, 이번에는 있는 대로 풀이 죽어 있다.
“비싼 등록금 내고 3년이나 학교에 다녔는데 최소한 등록금만큼은 벌어야죠…….”
진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진혁이도 등록금이 부담돼서 4년제 안 가고 일부러 전문대로 갔잖아요.”
‘아닌데, 집에서 가까워서 갔는데…….’
향인대가 제과제빵 특성학교에 실무진 교수들 평판이 좋다는 점도 한몫했다. 아버지도 향인대 진학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반면 진혁에 비해 월등하게 성적이 좋았던 진희는 서울의 4년제 대학교에 반액 장학생으로 합격했지만 포기하고 장학금을 주는 3년제 대학교로 진학했다.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드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심지어 지금 가게 일 돕느라 복학도 못 하고 학교도 못 다니고 있고요.”
‘아닌데. 군 휴학 하고 나서 가게가 너무 잘 돼서…….’
못 다니는 것이 아니다. 안 다니고 있다. 진혁은 팔짱을 끼고서 진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보다 훨씬 잠이 많던 애가 새벽에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면서 열심히 일하는 걸 보니까 나는 너무 놀고 있는 것 같고.”
‘무공 고수라서 잠이 줄었을 뿐인데…….’
그러고 보면 진혁도, 진희도 어렸을 때부터 잠이 많았다. 열 시간은 꼬박꼬박 자야 했다. 최근 집에 오면 진희는 열두 시간씩 침대에서 잠만 자곤 했다.
“진혁이가 집안을 일으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어렵게 들어간 국립대병원인데 지금 와서 그만둔다고 하면 제가 너무 형편없잖아요…….”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솔직히 옛날에는 뱃속에서 한날한시에 나왔는데 고작 6초 빨리 나온 거 보고 진혁이 오빠라고 부르는 게 너무 아깝고 짜증 났어요. 제가 챙겨주고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군대 갔다 와서 어른스러워진 거 보면…….”
“저절로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지지?”
“그건 아니고.”
훌쩍이고 있던 진희가 울음을 멈추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동갑인데 오빠는 무슨 오빠냐고. 대신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지는 않을게.”
아버지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진희가 고민이 많았구나.”
“당뇨 전 단계라고 나오면 보통 5년 안에 당뇨가 발병한단 말이에요. 당뇨는 그 자체가 아니라 합병증이 무서운걸요. 관리 제대로 못 하면 실명에, 신장 문제에, 말초 혈관 순환이 어려우면 손발 절단까지 이르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라고요. 환자들이 아파서 매일 오지만 내 가족, 우리 엄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 마음고생 많았다. 그런데 진희야, 너 병원 그만 다녀도 돼.”
“네?”
아버지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는 네가 진혁이보다 만두도 잘 빚고, 송편도 잘 만들었잖니?”
“네, 그런데…….”
“농담이 아니고 가게는 정말로 잘 되고 있어.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필요한데, 새로 모집해도 좋지만 가족이 하면 좋겠다고. 이번에 진혁이하고도 의논했지만, 맞은편에 있는 빈 가게 자리도 인수하기로 했어.”
“권리금하고 보증금, 월세는 얼마인데요?”
“앞서 있던 가게가 나가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서, 권리금 없이 들어가기로 했어. 보증금과 월세도 나쁘지 않아.”
“아…….”
“너도 손재주랑 끈기가 있으니까 할 수 있어. 진혁이 녀석이 어렸을 때 손재주 없었던 걸 생각해 봐라. 이게 저 녀석이 만든 케이크야.”
아버지가 스마트폰으로 플라워 구겔호프 케이크를 보여 주었다. 은빛 정장을 입은 할머니가 우아하게 서 있고, 크고 작은 꽃이 우아하게 피어있는 케이크다. 금천복 어르신의 생일 파티에 주문 제작 받았던 제품이다.
“이건 진짜 예술이네요. 멋있다.”
진희가 감탄했다.
“임진혁 진짜 많이 컸다.”
“음.”
진혁은 순간 아버지의 설득을 말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무공이 없으면 저 케이크를 만드는 건…… 만들 수는 있겠군.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손재주가 좋은 진희가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진희가 어렵게 말했다.
“저도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요, 제가 병원 다녀서 얻는 이득이 있어요. 건강검진 할인 혜택도 받고, 진료비 할인도 되고.”
“느이 엄마랑 나는 당분간 아플 계획이 없다. 이번 건강검진으로 충분해.”
“제 4대 보험에 어머니 지역가입자 보험료도 올라가 있잖아요?”
“그런 돈 몇 푼은 문제가 아니야. 세금은 괜찮다.”
아버지가 정색했다.
“우리는 한 푼도 숨김없이 세금은 정직하게 내고 있어. 그거는 상관없어. 오히려 네가 병원 다니다가 몸이 다 상하면, 그게 더 큰 문제야. 네가 아무리 일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일하다가 몸이 다 망가져 버리면 어떡하냐.”
“……알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그날 밤.
어머니도 아버지도 환골탈태를 한 후, 진혁의 지도에 의해 축기를 하여 일 년 가량의 내공을 쌓았다. 손발을 놀리는 방법과 초식을 모르므로 일반 무림인과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건강하게 양생하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진희는 아직 어려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릎까지 내려왔다고 해도 좋을 다크 서클에, 항상 피곤해서 굽어 있는 어깨. 그것만 봐도 진작 짚어서 알 수 있을 부분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진혁은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같이 쓰던 방에서, 진희가 지붕 밑 창고방으로 옮겨간 지도 벌써 육 년이 넘게 지났다.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 아래로 진혁은 진희를 살펴보았다. 중학생 때부터 키가 자라지 않아, 그때부터 입고 있던 곰인형 무늬의 잠옷 상하의를 아직도 입고 잔다. 얇은 홑이불은 걷어차서 곁에 내팽개쳐져 있고, 말려올라간 잠옷 상의 때문에 배가 드러나 있다.
‘엄마가 매일 검은 구두를 신는다고 불평하더니, 정작 자기 옷은 신경 쓰지 않는군.’
집에 갔다 온 다음에 얼굴이 싹 변해 있으면 누구나 의심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이전 실험했던, 백일에 걸친 환골탈태를 시행할 때다.
‘병원의 여자 기숙사에 침입할 생각은 없어.’
집에 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손을 대서, 가랑비에 옷을 적시듯이 천천히 하면 된다.
그는 옆으로 누워 있는 진희의 등에 손을 대고, 유문혈에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일단 혈관에 쌓여 있는 탁기부터 제거한다.’
단련되지 않은 기혈에 갑자기 막대한 양의 진기가 주입되면 큰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
‘주화입마가 오게 해서는 안 되지.’
설탕으로 머리카락을 세공했던 것처럼 극미량의 진기를 흘려 넣어, 진희의 기혈을 탐색했다.
“호오.”
진혁이 감탄사를 흘렸다. 원래 진기를 주입하는 자도 입을 열 수 없지만 진혁은 상승의 심법을 익히고 있어 목소리를 내도 상관없다.
‘역시 재능이 있단 말이야.’
과연 같은 핏줄을 타고났다고나 할까, 진희에게도 무골의 특성이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쓸데도 없지만.’
미세한 진기의 흐름만으로도 순식간에 뚫려버리는 기혈을 보며 진혁이 진기의 주입을 멈추었다.
‘자, 자. 그만. 그만. 오늘 이렇게까지 많이 기혈을 열어버리면 곤란하다고.’
탁기가 액체의 형태를 띠고 나오기 전, 특유의 고약하고 지린 냄새가 먼저 솟기 시작했다. 기혈을 막고 있던 검고 끈적끈적한 탁기가 흘러나오기 직전 진혁이 손을 뻗었다.
“타올라라.”
탁기가 잠옷과 이불에 닿기 전, 없애버리는 데에는 지극히 정교하고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하나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일부터는 덜 피곤할 거야.”
진혁은 진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물여섯 살에 신체나이 마흔여덟은 너무하지 않냐.”
진희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새근새근 깊게 잠들어 있었다.
“내일 일어나서 보자.”
16장
강남역 앞. 화웅 제과제빵기계공업 베이커리, 줄여서 화웅 빌딩 베이커리라고 불리는 빵집 1층이다. 새벽과 오전 사이에 빵은 전부 팔려버리지만, 오후에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꽤 찾아온다.
“소망 마라톤 대회 사고?”
가게에 비치된 거대한 LCD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뉴스를 보며 백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동네, 낯이 익은데.”
“아시는 곳이에요?”
“지난번에 삼촌과 함께 가본 적이 있어요.”
마라톤 대회 중간에 보급소에서 빵을 먹으며 멈추는 선수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뉴스 앵커는 진지한 표정으로 빵에서는 아무런 약물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빵 먹다가 멈추는 것 가지고 사고라고 할 것까지야.”
아르바이트생인 김가영이 중얼거렸다. 기나긴 공무원 수험 생활을 끝내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머리카락도 잘랐다. 귀밑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한 그녀가 생기있게 인사하는 것을 보러 오는 단골손님도 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