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풀기요? >
‘스타는 다시 무대로’의 야외 세트장.
해가 진 저녁이지만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아 현장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난 이전에 유진이를 신경 써주겠다고 마음먹은 대로 유진이가 촬영하는 날에 또 왔다.
물론 오늘은 정아의 촬영날이기도 하다.
우리 셋은 간이 의자에 앉아, 멍 때리듯 주변을 바라봤다.
세트장은 조명을 받아 환했으나, 하늘은 이와 대비되게 아주 새까맸다.
“오늘 다들 기대해. 안무 완벽하게 마스터했으니까.”
“언니, 봐요. 하다 보니까 괜찮죠?”
“···하다 보니까 괜찮냐는 말이 무슨 뜻이야? 정확하게 말해. 내 댄스가 좋다고 말하는 거면 살려줄 거고, 안무가 쉽다고 말하는 거면···.”
“다, 당연히 언니가 췄을 때 예쁘게 나온다는 뜻이죠.”
유진이가 만든 안무를 정아가 추는 씬.
지금 현장은 그 씬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그녀들의 대화를 듣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빠는 왜 웃어?”
정아가 물었다.
“많이 예민해졌네. 힘들었나 봐?”
“···아, 그러니까 별것도 아닌데 내가 예민하게 군다는 뜻이야? 그 안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도끼눈이 나를 향하고 있어서, 난 입을 다물었다.
유진이도 입을 다물며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도 저 도끼눈은 여전히 우릴 찍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듯 살피고 있었다.
유진이는 자리가 불편했는지 은근슬쩍 일어났다.
여기에 혼자 있는 건 나도 위험해서, 그녀를 붙잡기 위해 물었다.
“어디 가?”
“몸 좀 풀려고요. 저도 이따 댄스 씬 있잖아요. 촬영 준비하는 거예요. 잘 뽑혀야죠.”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고는 도망치듯 황급히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움직였다.
자재 뒤편으로 쏙 들어가는 유진이.
그런데 하필 멈춘 곳은 숨는 장소로는 부적절했다.
천인지, 얇은 커튼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뒤편에 조명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저녁 하늘 아래 유진이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쟤는 여기서 실루엣이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
몸을 푼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그녀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 실루엣을 바라봤다.
스트레칭이 다 끝났는지, 이젠 댄스를 춘다.
격렬하지 않게, 빠르지 않게.
얼핏 보면 현대무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발레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몸이 유려하고 부드럽게 너풀거린다.
제 딴에는 가볍게 춘다고 한 것 같긴 하다. 몸을 푸는 정도의 의미겠지.
그런데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저건 하나의 완성된 예술이었다.
“하!”
나처럼 실루엣을 보고 있던 정아의 입에서 의미 모를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 와중에도 유진이의 움직임은 계속됐다.
팔다리를 쭉쭉 뻗고, 꺾고, 웨이브를 타더니, 빙글 돌기도 한다.
급하지 않고 부드럽게.
보아하니 안무를 정해두고 추는 건 아니었으나, 평소에 안무를 워낙 많이 짠 덕인지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태가 나고 있었다.
‘쟤는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새삼 매니저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얼마나 몸이 근질거렸을까.
주변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정적에 휩싸였다.
소리는 없지만 분위기는 크게 출렁거렸는데.
모두의 시선은 실루엣을 향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움직이라고 말했다간, 자연스럽게 나오던 그녀의 움직임이 뚝 끊어질 수 있어서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심성균 감독은 넋을 놓은 듯 입을 벌리며 바라보더니, 순간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재빨리 몸을 움직여 카메라를 유진이 쪽을 향해 돌린다.
화면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눈은 울 것 같은데, 입은 웃고 있다.
“미치겠네···.”
옆에서 정아가 한숨 반 목소리 반으로 말했다.
촬영장에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해프닝을 일으키고 있는 당사자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겠지.
그래, 조금만 더 몰라라. 계속 보고 싶으니까.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 다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꿈쩍도 않고 실루엣에 정신을 빼앗겼다.
잠시 후.
실루엣은 움직임을 갑자기 뚝,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제야 이상함을 눈치 챈 모양인지, 그녀가 자재 사이에서 빠져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다들 비슷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겠지.
우리 모두는 아쉬움과 황홀함이 뒤섞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유진이는 영문을 몰라 눈치를 살폈다.
쭈구리 같은 자세로 내게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물었다.
“···왜 그래요? 제가 뭐 실수한 거예요?”
“맞아. 큰 실수했지.”
“···!”
그녀의 놀란 눈 너머로 심성균 감독님의 얼굴이 보였다.
눈동자 속에 이글이글 횃불이 피어났다.
그의 시선은 유진이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된 상태.
내 시선에 유진이가 몸을 돌렸다.
심성균 감독과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뒷걸음질을 쳤는데, 유진이의 몸이 내 몸에 의해 막혀버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선배! 저 어떡해요? 제가 뭘 한 건데요!”
위기감이 느껴지는 작은 목소리.
이번엔 정아의 입이 열렸다.
“재수없다, 진짜. 천재가 이래서 싫어. 너무 싫어. 짜증나.”
심성균 감독은 주변에 널려 있는 종이를 붙잡고 다급하게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유진이의 댄스에 영감을 받고 시나리오를 고치는 중이라는 것에 내 전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심성균 감독의 펜이 멈추더니, 콧김을 펑펑 내뿜으며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진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방금 그거, 다시 할 수 있는 거 맞죠? 제발 그렇다고 해요. 제발요.”
유진이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거리며 말했다.
“네, 네! 네.”
심감독은 손가락으로 유진이가 들어갔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뭘 말하는 건지는 알아요? 저기서 했던 거 말하는 거예요.”
“···몸풀기요?”
유진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대답하자.
곳곳에서 괴상한 소리들이 터졌다.
“···!”
“···!”
“와.”
“헐.”
“재수 없어.”
이번엔 정아에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 딴에는 분명 몸풀기가 맞긴 할 텐데··· 그래도 이건 선 넘었지.
그런데, 이 해프닝은 어떻게 보면 정아 덕분에 일어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유진이가 저곳에 숨을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난 정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위로해줬고.
정아는 화를 가라앉히려는지 크게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오빠, 나 이제 댄스 씬인데 어떡해?”
“···.”
“나 엄청 열심히 준비했다는 거, 오빠는 알지? 쟤는 저게 몸풀기래. 하하. 이게 말이 돼? 오빠,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하하.”
“침착해. 심호흡 잘하더니 왜 멈춰? 자, 다시 숨 크게 들이쉬고··· 내뱉고···. 너도 잘할 테니까 걱정 말고. 알겠지?”
“걱정이-“
“걱정 말라니까. 너 잘해. 알겠지?”
“···알았어.”
어쨌든 정아의 댄스 씬과 더불어, 우리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아직 제대로 씬을 찍지는 않았지만, 하이라이트가 되리란 것은 확실했다.
***
어제 촬영이 갑자기 추가되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끝났다.
덕분에 나는 잠을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나왔다.
그냥 출근하는 거라면 푹 자고 나와도 느지막이 되긴 했는데, 오늘은 별이의 헤비메탈 컨텐츠 촬영이 있었거든.
이건 빠질 수 없지.
“저 오늘도 아무것도 안 알려줘요?”
별이는 딱 달라붙는 찢어진 블랙진과 해골 티셔츠를 입은 채로 물었다.
난 그 해골과 잠시 눈을 맞추고는 대답했다.
“몰라야지. 그래야 재밌잖아.”
이미 한 번 촬영을 해봤었기에, 그녀는 이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은 출연진도 정해져 있었는데, 주변에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나타날 테니까.
“김송송송 씨, 기타 메셔야죠.”
“저 기타 못 치는··· 어?”
갑자기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예고 없이 카메라가 켜졌고, 별이는 이진국 감독이 건네주는 기타를 등에 멨다.
“철원의 천재 소녀, 김송송송 씨의 트로트 도전은 처참하게 실패해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실패요?”
대성공을 거두었던 시도를 한순간에 실패로 만들어버렸다.
“네, 아주 처참하게요. 소감이 어떤가요?”
“어···.”
그녀는 자신의 상의에 그려진 해골과 잠시 눈을 맞추더니,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장르를 잘못 골랐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인 건 저한테 뜨거운 락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좋습니다. 진성 락 스피릿을 가진 꿈 많은 철원 소녀군요.”
“그런 건가요?”
“예.”
“네.”
큭큭, 웃음이 나왔다.
적응이 꽤 빨라서 이제 콩트가 퍽 자연스러워졌다.
“김송송송 씨는 여기에 왜 나와 계신 건가요?”
“···.”
눈동자가 마구 떨리고 있다. 머리를 굴리는데 좀처럼 마땅한 대답이 생각이 안 나는 모양.
피디는 그런 그녀를 재촉했다.
“왜 나와 계신 거냐니까요?”
“···처음 와보는 곳이긴 한데.”
사실 여긴 김석희가 대표로 있는 엔터 회사 주변이었다.
별이는 이를 모르고 있었고.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스탭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별이처럼 어깨에 기타를 메고 있었는데, 옷차림은 별이와 달리 상큼발랄했다.
구서연, 그녀가 마치 행인인 양 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어? 선생님? 벌써 나와요?”
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런데 서연이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혹여, 제게 묻는 것입니까? 선생님이라뇨? 저는 자연과 꿈과 낭만,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연주하는 평범한 기타리스트입니다.”
매우 점잖은 어조였다. 그런데 점잖아도 너무 심하게 점잖아서 무슨 도인이나 스님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사실 내게도 마이크가 채워져 있었다.
이진국 감독의 요청에 의해 마음껏 껴들어도 된다는 지시도 받았고.
“서연아, 또 컨셉 이상하게 잡았잖아. 그리고 유일하게 정해져 있던 대산데, 거기에 막 갖다 붙이면 어떡해?”
“과객은 누구요?”
“에라이.”
오늘의 촬영도 시작부터 엉망진창이었다.
***
‘일도 잘하는 밴드’의 멤버들은 이렇게 매우 부자연스럽게 한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결국 밴드의 멤버가 모두 모였고, 그들은 부동산 큰손이자 취미로 치킨집 배달을 하고 있는 김석희의 연습실로 이동했다.
“여기가 내 연습실이란다? 배달비 모아서 겨우 마련한 데야.”
“부동산 큰손이라고 하지 않았소?”
“맞아. 이렇게 부동산이 하나 더 추가된 거지.”
“과연!”
다들 컨셉에 심취해 있었지만, 합주를 앞두고는 슬며시 진심이 나오고 있었다.
빨리 하고 싶은지 눈을 빛내며 악기를 만지작거린다.
별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예, 그러시지요. 물, 워터, 비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 우리가 함께 모이면 물결처럼-”
김성혁이 서연이의 말허리를 잘랐다.
“거 대충 하고 넘어갑시다, 구타리스트 선생님.”
“···구타리스트가 아니라 구서연 기타리스트입니다. 이상하게 줄이지 마시지요.”
아무튼 다들 애가 닳았는지, 합주는 바로 시작되었다.
“우리 곡은 나중에 하고, 처음엔 일단 아무렇게나 해보자고.”
즉흥연주, 잼이었다.
< 몸풀기요?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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