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들과 함께하는 연예계 생활-54화 (54/124)

< 다른 장르는 단 한 곡도 없었다 >

전라북도 김제시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인근에 번화가는커녕 상가도 하나 없다.

있는 거라곤 밭과 정자, 그리고 마을회관과 허름한 집들뿐.

심지어 그 집마저도 몇 되지 않았다.

김별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앞에 있는 제작진들을 바라봤다.

나란히 서 있는 ‘일도 잘하는 밴드’의 출연진들 모두 피디의 입으로 시선이 향했다.

피디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오늘 어르신들 집에 각자 떨어져서 하루를 보내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을 먹은 뒤에 회관에 모여서 공연 준비를 하시면 돼요. 공연은 어르신들 저녁 식사 후에 시작할 겁니다.”

친절하지 않은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핵심은 다 담겨 있었다.

“우리가 각자 떨어져서 하루를 보낸다고요?”

김석희의 당황 섞인 물음에 피디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김별은 서연을 쳐다봤다.

예능에 의욕이 넘치는지, 김석희와 같이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피디님! 질문 있어요! 이러면 밴드의 의미가 없지 않아요? 그리고 어르신들한테도 민폐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어르신들께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해야겠죠?”

반항은 짧았다. 피디가 안내해준 대로, 한 명씩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을이 너무 작아서일까, 다들 옆집이거나 앞집이었다.

걸어서 몇 걸음 되지 않는.

김별이 들어온 곳 또한 붙어 있는 그 집들 중 하나였다.

끼이익- 녹이 슨 녹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척이나 몸이 작으신 할머니가 담담한 얼굴로 서 계셨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가수 김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려.”

할머니는 적당히 반겨주셨다.

기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듯 미묘한 미소.

그런데 어쩐지 속으로 무척이나 반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루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둘러보는데, 참 깔끔하기도 했다.

방송에 나온다고 깨끗하게 해두신 걸까?

“여짝이 화장실이니께, 맘대로 써.”

“네.”

“그리고 내가 낯가려.”

“예?”

“낯가린다고.”

“아, 네.”

낯가린다는 말을 대뜸 툭 던지셨다.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말씀하시는 게, 정말로 낯을 가리시는 것 같았다.

김별은 순간 걱정을 집어먹었다.

이럴 땐 자신이 살갑게 해야 하는데, 성격상 그게 쉽지 않아서.

‘서연이가 왔으면···.’

살갑고 잘 웃는 서연이가 왔으면 금방 친해졌을 텐데.

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짐을 풀며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집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방에 들어갔다 나오시더니, 무언가를 건네셨다.

“일할 때, 입어.”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알록달록한 몸빼바지,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상의였다.

사실 일할 때의 옷을 미리 준비해왔는데, 차마 낯을 가린다는 할머니께서 건네시는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별은 옷을 갈아입고 할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제 일해야 할 시간.

그런데.

“하하하! 너도야?”

“큭큭큭. 별아, 너도 잘 어울린다.”

다들 밭 위에 있다.

집은 다른데 마을이 좁다 보니 밭도 거의 붙어있다시피 나뉘어져 있었나 보다.

어쩌면, 이렇게 밭이 붙어 있는 집들에 멤버들을 나눈 것일 수도 있고.

서연이는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몸빼바지, 그리고 구수한 상의.

그래서 자신이 나타나자 다들 손으로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린 듯했다.

이미 한바탕 웃음이 번졌던 모양.

“할머니! 쟤보다 제가 더 잘 어울리죠? 이거 봐요.”

역시 서연이는 벌써 할머니에게 살갑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고, 할머니는 즐겁다는 듯 웃음을 흘리셨다.

“우리도 일해야지.”

“아, 네.”

할머니는 곧바로 일을 알려주셨다.

서연이처럼 하지 못하면 일이나 열심히 해서 도움이 되어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똑바로 뜨며 지켜봤다.

그렇게 난생 처음 밭일을 하게 됐다.

주위는 대화 소리와 웃음 소리가 피고 있는데, 이쪽은 적막만 흐른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 어쩐지 이쪽만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벌써부터 너무 힘이 들어 온몸이 쑤시는데, 할머니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처럼 멀쩡하셨다.

언뜻 보기엔 설렁설렁 하시는 것 같은데 작업 속도도 비교가 안 됐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께. 여 봐.”

“네.”

할머니는 다시 일을 알려주셨다.

그런데 아까 배운 거랑 뭐가 다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해야 돼.’

한 시간여가 더 흘렀다.

다큐를 찍는 건지 예능을 찍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정말 일만 열심히 했다.

다큐도 이렇게 재미없지는 않을 텐데.

문득 방송 분량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보다는 할머니께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다른 쪽은 다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라서, 더 불편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흐으음~”

할머니의 입에서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옛날 노래. 트로트. 들어본 적 있다.

제목이 분명.

“할머니, ‘빗속의 당신’ 좋아하세요?”

“이걸 알어? 우리 바깥 양반이 겁나게 좋아했어.”

할머니의 얼굴에 방긋 미소가 지어졌다.

서글픈 그리움보다는, 떠오른 할아버지 생각에 반가운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그럼, 제가 불러드릴까요?”

“가수람서. 가수가 불러주면 좋지.”

김별은 쭈그려 앉은 채,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노래를 불렀다.

트로트는 어렵다.

특히 이런 구성지며 서글픈 곡조는 함부로 건드리기도 쉽지 않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도 그렇지만 세기의 조절도 쉽지 않다.

그런데 결국 모든 건 감성이다.

계산을 하며 이쯤 꺾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곡에 담긴 감성에 스며들면 굳이 힘을 주어 부르지 않아도 듣는 사람의 귀에는 절로 좋게 들리기 마련.

가사를 외우지 않아 틀리기도 하고, 구간이 반복되는 곳도 있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닐 터.

그렇게 손을 쉬지 않으며 몇 소절을 내리 불렀다.

‘할머니가 좋아하실 만한 트로트가 또 뭐가 있을까?’

노래를 끝낸 김별.

또 어떤 노래를 좋아하시는지를 물으려 했는데.

주변에서 한꺼번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가수라 카더니 가수가 맞긴 맞구만.”

“그럼! 가수가 저렇게 노래를 잘해야지.”

“아따! 기깔나.”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다들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계셨다.

멤버들도, 어르신들도, 제작진들도.

김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함께 온 할머니께서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시며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고 계셨다.

김별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리고 그때.

서연이의 옆에 계신 할머니가 서연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가도 가수라매?”

씩 웃는 구서연.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저도 구수하게 한 곡 뽑아볼까요?”

“그려. 듣기 좋구만.”

서연이가 부르기 시작한 곡 또한 트로트.

이번엔 서글픈 노래가 아닌, 신나는 곡이었다.

방금 전 김별이 부른 것과는 정반대에 있는 느낌이지만, 분위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를 가만히 카메라에 담고 있던 촬영 감독은 화면을 바라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그림 죽여주네.’

피디를 바라보니, 그 또한 덩실덩실 좋아 죽으려 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소리와 냄새가 잠을 깨웠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채 눈만 깜빡이던 김별.

굳은 머리가 조금씩 풀어지더니, 이내 눈이 커지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역시 할머니가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것도 거의 다 준비가 끝난 상태로 보였다.

“하, 할머니, 저···!”

죄송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어찌할 줄 몰라 입부터 열었는데.

차마, 깨우시지 그러셨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앉아 있어.”

“아니에요. 저도 할게요.”

“앉아 있으라니께.”

“아, 아니에요. 저도-“

“그럼 상이나 펴.”

“아, 네!”

상을 펴고 수저를 놓고, 물과 컵을 놓고, 부엌에서 음식을 옮겼다.

나름 바쁘게 움직이려 했는데 일이 순식간에 끝났다.

김별은 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봤다.

반찬의 양이 두 명이서 먹기엔 넘치도록 많았다.

너무 과할 정도로.

이제 와 시계를 보니, 아침 여섯 시다.

어제 할머니는 열 시도 안 되어 잠을 청하셨다.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자신도 그 시간에 잠이 들었는데, 새삼 정말 일찍도 일어난 것 같았다.

할머니는 몇 시에 일어나셨을까?

아직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오지 않으셔서 멀뚱히 선 채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마루가 보이고, 그 너머로 자그마한 마당과 녹슨 철문,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온지 24시간도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정겨운 풍경이다.

부엌에서 나오신 할머니는 평상 앞에 앉으시며 멋쩍은 얼굴로 말하셨다.

“장이라도 볼 걸 그랬네.”

“아니에요, 할머니. 이미 진수성찬이에요.”

상 위에 올라온 반찬의 가짓수는 몇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죄다 풀이다. 할머니는 그게 못내 미안하신 모양.

김별은 한 숟갈을 크게 뜨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가득 집어먹었다.

먹는 거라면 자신 있다.

“내가 마련을 못했어.”

“아니에요. 너무 맛있어요.”

정작 할머니는 많이 드시지도 않으신다.

저것만 드시고 어떻게 또 그렇게 힘든 일을 하실 수 있을까, 걱정을 넘어 신기할 정도였다.

“많이 먹어.”

“네.”

“과일이라도 사놨어야 했는디.”

할머니는 이미 수저를 놓으셨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할머니는 신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셨다.

의아한 김별은 바깥에 문에 시선을 둔 채로 음식을 씹고 있었는데.

잠시 뒤, 할머니는 손에 사과 세 개를 들고 나타나셨다.

“할머니?”

“과일 먹어. 깎아줄게.”

“제가 깎을게요.”

“앉아 있어!”

할머니의 작은 호통에 김별은 다시 조용히 앉았다.

“···네.”

옆집에서 얻어오신 모양이다.

이미 배가 좀 부른데, 할머니는 과일까지 먹으라고 하셨다.

“잘 먹겠습니다.”

할머니는 사과에 손을 대지도 않으셨다.

김별은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이쁘게 깎인 사과를 한 조각씩 입에 넣었고.

할머니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우리 딸이 임신했을 때 그렇게 사과를 찾았는디··· 그때 사과를 못 구혔어. 겨우 사과 하나 갖고 서럽게 울더랑께.”

“아.”

김별은 한 조각을 더 베어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주··· 오세요?”

“오지 말라 하지. 바쁜데 뭐더러 와.”

시선을 피하며 말씀하시는 할머니.

김별이 끝내 사과를 다 먹자, 할머니가 그릇을 손에 쥐고 치우려 하셨다.

“제가 치울게요, 할머니!”

김별은 이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며 할머니를 가만히 앉아서 쉬게 했고.

기어코 설거지까지 혼자 마쳤다.

이젠 떠날 시간이 되었다.

회관에 모여 공연 준비를 해야 했으니.

짐을 싸는 속도는 느릿느릿 거북이 같았다.

할머니도 재촉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굳이 말을 건네지도 않으신다.

김별은 자신이라도 무슨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서연이라면 이럴 때도 많은 대화를 나눴을 텐데.

천천히 준비를 마친 별은 캐리어를 끌고 마루에 올랐다.

“어여 가.”

“네, 할머니.”

“몸 아프지 말고, 밥 잘 먹고, 건강 조심하고! 노래 잘혀.”

“저 바로 안 올라가요. 회관 갔다가 이따 다시 공연할 거예요.”

“어여 가. 아프지 말고. 건강이 최고여.”

“할머니도 건강 잘 챙기세요.”

“내 걱정은 하덜덜 말어. 암시렁토 않혀.”

녹슨 철문 밖까지 나와 배웅해주시는 할머니.

이따 또 볼 텐데 바로 떠나보내는 듯했다.

천천히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할머니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다.

스탭을 따라 회관으로 걸어가는 길. 김별은 모퉁이를 돌았다.

이제 뒤를 돌아봐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왠지 울컥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를 찍는 촬영 감독의 얼굴은 씩 웃고 있었다.

***

이종락은 눈앞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을 한 눈에 담았다.

자신과 함께 하루를 보낸 할아버지도 계시고, 지나가다가 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계시고, 옆에서 같이 밭일을 했던 어르신들도 계셨다.

마을 회관에 모이신 어르신들. 고작 하루 있었을 뿐인데 벌써 친숙하다.

‘설마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김별, 구서연과 이런 노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의견이 일치했다.

오늘의 공연 셋리스트는 모두 트로트.

다른 장르는 단 한 곡도 없었다.

심지어 김별과 구서연의 개인 곡도 없었고, 77Max의 곡도 없었고, 김석희가 작곡한 곡도 없었다.

오로지 트로트.

이에 만족한다는 듯, 지금 멤버들의 얼굴엔 어린 손주 같이 풀어진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자! 그럼 한 곡 뽑아보겠습니다! 첫 곡은 ‘빗속의 당신’입니다!”

어제 밭일을 했던 피로가 아직 다 가시지도 않았다.

팔이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어디 안 쑤시는 데가 없다.

하지만 탁! 탁! 탁! 탁! 스틱을 부딪히는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박력이 넘쳤다.

보컬 김별, 기타 구서연, 키보드 김석희, 베이스 김성혁, 그리고 드럼 이종락.

음악이 시작되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박수를 치며 호응해 주셨다.

자신과 함께 지냈던 할아버지의 시선은 줄곧 자신에게만 향해 있다.

‘재밌네 진짜. 하길 잘했어.’

분명 몸은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데, 몸에 힘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 다른 장르는 단 한 곡도 없었다 > 끝

ⓒ 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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