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용정객잔(4)
“소림사?”
그것이 주은리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은리는 나이답지 않게 무척 귀여웠다.
왕이삼이 깨어 있었다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침을 삼켰을 장면.
그러나 서백은 그녀가 꺼낼 다음 말에 집중했다.
“소림사 주위는 망자가 들끓기 때문에 중원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악명이 높은데요?”
“상관없습니다. 소림사로 가기 위해 사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중도에서 멈출 수는 없죠.”
“그러셨군요.”
주은리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사행 얘기를 처음 듣는 사람 같은 반응.
서백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남궁세가가 용정객잔을 접선지로 선택한 것은 그냥 우연이었나?’
일단 주은리는 결백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오래 된 객잔을 운영하는 정체불명의 여인을 믿는 것은 왕이삼처럼 미인계에 빠지는 자나 저지르는 실수.
-명심해라. 중원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즐비한 곳이라는 것을.
서백이 스승의 말을 떠올리고 있을 때 주은리가 재차 물었다.
“소림사는 왜 가는 것입니까?”
“망자 창궐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는 흔쾌히 대답했다. 남궁세가와 줄이 닿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망자를 멸절한다는 대의명분은 모든 무림인이 동의할 얘기니까.
그러나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면 서백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망자 창궐을 어떻게 막을 거냐는 질문.
그 질문은 서백이 옷 속에 숨기고 있는 스승의 서책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서책의 존재는 소림사에서도 모른다.
소림사는 석가장의 인물이 올 거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서책의 유무는 서백 말고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즉 망자 멸절의 해법을 궁금해하는 자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주은리는 소림사행의 이유 말고 다른 것을 물었다.
“소림사에 간다는 얘기, 그거 비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서백의 심리를 역으로 꿰뚫는 질문.
역시 주은리는 평범한 객잔 주인이 아니었다.
“그럼 제가 들으면 안 되지 않나요?”
“상관없습니다. 소림사행을 막는 자들은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호호호, 그렇군요.”
그런데 입을 가리며 웃던 주은리의 얼굴에 미소가 싹 사라지며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서백은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서북.”
송현이 찢어진 부적을 발견한 목책이 동남쪽이었으니 서북은 그 반대 방위 쪽이었다.
문제는 방위가 아니었다.
“왕일과 왕이가 불청객들을 만났군요.”
말투는 똑같았지만 주은리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주은리는 마치 무언가 보이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꼭 인형이 입을 열어서 목소리를 내는 듯한 귀기(鬼氣)가 감돌았다.
서백은 주은리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술법인가?’
아니나 다를까 주은리의 손목에서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친 도포는 소매가 길고 풍성해서 술대작할 때도 손목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하늘하늘한 천 속에서 은은하게 붉은 색이 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부적 문신.’
망자가 된 제갈세가 가주와 싸울 때 그의 몸에는 맨살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냥 문신이 아니라 몸에다 새긴 부적.
당시 술법이 발동될 때 제갈세가 가주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피처럼 붉게 빛났다. 주은리의 소매에 비치는 빛 역시 같은 원리이리라.
어쨌든 지금은 불청객들의 정체가 중요했다.
“어떤 자들입니까?”
“말을 타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습니다. 왕일과 왕이를 향해 검을 겨눕니다.”
“그럼 둘을 구하러 가야겠군요.”
“아니.”
주은리가 작게 고개를 저었는데 그 동작이 지나치게 딱딱하고 규칙적이어서 목소리처럼 인형 같았다.
“왕일과 왕이는 이미 포위당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빨리 이동하죠.”
서백은 왕일과 왕이의 무공 수위로 볼 때 포위당했다고 쉽게 붙잡히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주은리가 재차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림인들의 숫자가 십, 이십, 삼십… 백 명이 넘습니다.”
“…….”
“왕일과 왕이가 대항해 봅니다만… 몇 초식 출수하지 못하고 붙잡혔습니다.”
그 말에 서백과 송현은 싸늘한 눈빛을 교환했다.
왕일과 왕이가 평범한 점소이와 숙수가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둘은 절정 수준은 아니더라도 도검수 왕이삼은 일대일로 상대하기 힘든 수준의 고수였다.
그런데 초식 몇 번 펼치지 못하고 붙잡혔다고?
단순히 상대편의 숫자가 많은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바로 일류를 넘는 수준의 고수가 불청객들 중에 있다는 뜻!
“그들이 왕일과 왕이를 붙잡은 뒤 다시 말에 올랐습니다.”
다음 순간 주은리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그녀의 두 눈이 인형처럼 허공을 응시하지 않고 생기를 띠었다. 술법이 발동되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의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용정객잔으로 오고 있어요.”
눈빛처럼 목소리 또한 원래 주은리로 돌아왔다.
“왕일과 왕이를 찍어 누른 자는 한 명이지만, 그 같은 고수가 불청객들 중 최소 다섯 명은 되어 보입니다.”
“…….”
안 그래도 싸늘하던 서백과 송현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백 명이 넘는 무림인들.
그런데 왕일과 왕이를 제압한 수준의 고수가 다섯 명 이상이라고?
당장 싸웠다가는 불리한 것을 넘어서 패배가 확실한 상황.
서백은 현재 상황을 냉철하게 따져봤다.
‘나와 송 선배는 저들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도 최소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터.’
이미 두 명의 인질이 붙잡힌 상황.
거기에 경신법이 뛰어나고 신묘한 술법을 쓰지만 무공 수준은 불분명한 주은리.
마지막으로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는 도검수 하나…….
정면 대결이 승산이 없다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취할 수 있는 작전은…….
“일단 자리를 피하죠.”
“그래야겠군.”
서백의 말에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유명한 병법 중 하나인 삼십육계는 마지막 책략이 줄행랑, 즉 도망치는 것이다.
패배가 뻔한 싸움은 일단 자리를 피한 뒤 승산이 높은 상황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무작정 도망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병법의 중요한 원칙.
그러나 명문정파인은 자존심이 높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싸움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진다면 그자는 문파로부터 책망을 듣는 것을 넘어서 문책까지 받을 정도.
반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서백은 도주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
-상황이 안 좋으면 피해라.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림사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서백은 송현 역시 콧대 높은 명문정파와는 거리가 멀 거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송현도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한 것이었다.
결정은 내려졌으니 빠르게 행동해야 할 차례.
서백은 곯아떨어져 있는 왕이삼을 깨웠다.
“왕 선배님, 일어나십시오.”
“드르렁! 쿨쿨쿨…….”
왕이삼이 눈을 뜨지 않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왕 선배님, 적이 오고 있습니다. 당장 일어나야…….”
“크아악! 푸우우우…….”
여전히 왕이삼이 코를 골고 있을 때 송현이 옆으로 오더니 귓가에 대고 한 마디를 말했다.
“지금 안 마시면 술이 식소.”
그 말을 듣는 순간 탁자에 얼굴을 박은 채 코를 골던 왕이삼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크헉! 그럼 안 되지… 무신 관우도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왔는데 이 왕이삼이 어찌 술을 식힐쏘냐… 뭐하고 있냐? 술, 술 가져와……!”
서백과 송현은 살짝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서백, 밖의 상황을 살필 테니 부축해라.”
“네.”
송현과 주은리는 문을 열고 밖을 살핀 뒤 이상이 없자 객잔을 나갔다. 서백도 왕이삼의 팔을 어깨에 둘러서 부축하고 이동했다.
“후, 후배 아니냐? 술은?”
“계속 정신 못 차리시면 진흙탕에 처박고 그냥 갈 겁니다.”
“…….”
서백의 목소리가 싸늘하자 왕이삼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입을 다물었다.
서백은 휘청거리며 걷는 왕이삼을 부축하며 송현과 주은리의 뒤를 따라갔다.
일행의 이동 방향은 동남쪽.
왕일과 왕이를 붙잡은 무림인들이 나타난 곳이 서북쪽이니 그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해가 떨어진 지 한참 지났기 때문에 일행이 이동하는 모습이 들킬 리는 없었다.
선두를 가던 송현이 어느 곳에서 발을 멈췄다.
“여기에 숨는 게 좋겠소.”
송현이 가리킨 곳은 몸을 숨기거나 매복하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평평한 땅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반 장(丈) 정도가 깎아지른 절벽처럼 움푹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다시 평평한 땅이 이어졌다. 때문에 절벽처럼 깎인 곳에 몸을 숨긴다면 객잔 쪽에서는 제아무리 고수가 안광을 돋우고 살핀다고 해도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다.
일행은 아래로 내려가서 벽처럼 깎인 곳에 등을 대고 숨었다.
그때 주은리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무림인들이 객잔에 도착했습니다.”
재차 술법을 쓰기 시작한 것.
“무림인 다섯 명이 말에서 내려 용정객잔을 보고 있군요.”
아까 주은리는 무림인들 중 절정 수준의 고수를 다섯 명쯤 봤다고 얘기했다. 말에서 내린 자들이 아마도 그들이리라.
백여 명의 무림인들을 이끄는 다섯 명의 고수!
“다섯 명 중 둘은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습니다. 나머지 셋은 하나는 맨손, 하나는 도(刀), 하나는 창(槍)을 지니고 있군요.”
그 말을 듣고 서백은 생각했다.
‘서로 다른 문파군.’
두 명이 검을 찬 것을 제외하면 다섯 명의 병장기가 제각각 다르니, 같은 문파 소속이 아니라 출신이 다른 문파끼리 연합한 거라고 짐작되었던 것이다.
“무림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가 용정객잔인가?’”
그 말에 서백은 살짝 놀라서 눈썹을 찡그렸다.
주은리는 멀리 떨어진 곳의 상황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까지 듣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제갈세가도 본관 앞에 사자상을 두어서 방문객을 살피거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사자상은 기관장치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게 뻔했다.
지금 주은리가 펼치는 술법과는 하늘과 땅 차이.
또한 당시 서백과 송현은 사자상에 기관장치가 설치되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지금 무림인들은 주은리가 술법으로 보고 듣고 있는 것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구절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적들의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다고?
‘저 능력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승기를 잡을 수 있겠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서백도 주은리가 펼치는 술법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은리는 계속해서 무림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말했다.
“‘찾아라’ ‘존명!’ 다섯 명이 명령하자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말에서 내려 객잔으로 들어갑니다.”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서백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무림인이 나와서 다섯 명의 수좌에게 보고하는군요. ‘쥐새끼 한 마리 없습니다’ ‘그래?’”
객잔에서 누군가를 찾으라는 명령.
서백은 무림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남궁세가와 잔당들이군.’
무림맹에서 정보를 빼낸 뒤 소림사행을 하는 인물을 용정객잔으로 잡아오라고 흑도 무리에게 포상금을 건 남궁세가.
남궁세가가 다른 문파의 무림인들과 함께 용정객잔에 들이닥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