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용정객잔(3)
무엇보다 왕이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런 고수들이 왜 외딴 곳에 객잔을 차렸는지였다.
명문정파와 사마외도는 여러모로 구분되지만, 무공으로 둘을 구분 지으라면 내공과 경공을 보면 된다.
사마외도, 즉 흑도 무리는 사람 죽이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괴이한 기병을 쓰거나 자기 몸을 해쳐가면서까지 사악한 무공을 익힌다.
흑도에서는 속성으로 무공을 익혀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흑도는 아니지만 왕이삼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속성으로 배운 실전 도법이 아니라면 입에 풀칠하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
실제로 도검수 출신이 이후 흑도로 전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면 내공과 경공은 다르다.
두 무공은 오랜 수련을 필요로 한다.
특히 좋은 스승과 무공비급이 받쳐 주지 않는 한 제아무리 하늘이 낳은 천재라고 해도 혼자서 수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좋은 스승과 무공비급이 있는 곳은?
바로 무림에서 말하는 명문정파!
흑도 무리가 아무리 살상 무공을 익히더라도 명문정파의 고수에게 결국 무릎 꿇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공과 경공.
명문정파의 고수는 고급 무공의 기초가 되는 바탕을 어릴 때부터 수련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본 객잔 일당의 경신법이 흑도 무리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가?
무공 수위는 일류 수준에 못 미치나 무림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눈썰미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 객잔 무리는 분명 명문정파 출신이었다.
바로 그게 왕이삼이 이해 안 되는 점이었다.
명문정파 출신이 외딴 곳에서 흑점으로 착각할 법한 객잔을 하고 있다고?
모르긴 해도 여인과 두 명의 부하에게는 필시 복잡하게 얽힌 과거가 있으리라.
왕일과 왕이가 객잔 밖으로 나가자 송현이 여인을 보며 말했다.
“정보가 어떻소? 은원보 네 개의 값어치를 하는 것 같소?”
“값싼 정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정보로 편복선생의 빚은 갚은 걸로 칩시다.”
“하아, 그럼 객잔이 큰 손해를 보는 셈인데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그 말에 왕이삼이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
“아니, 망자 막는 부적이 찢어진 걸 말해 줬으면 객잔을 통째로 구해 준 셈인데 고작 은원보 네 개도 퉁치지 못해서 지랄이냐!”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말뼈다귀도 못한 중늙은이가 강호의 일에 간섭하시는 건가요?”
“뭐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어른한테 못 하는 말이 없냐!”
“나이로 아녀자를 핍박하는 자가 올바로 된 어른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한 마디만 더 발설하면 그 입을 바느질로 꿰매 드리지요.”
왕이삼과 여인은 한 마디를 지지 않고 받아쳤다.
급기야 왕이삼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육두문자까지 쓰며 말싸움을 벌였다.
무림 밑바닥에서 구른 도검수 왕이삼의 육두문자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지저분했다.
그러나 여인도 만만치 않았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오싹 소름이 끼칠 만큼 적나라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용호상박!
둘의 대결이 백 합을 겨뤄도 승부가 나지 않자 서백이 나서서 중재했다.
“그만들 하시죠.”
서백의 목소리는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객잔 전체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여인은 말싸움을 멈추고 제법이라는 듯이 서백을 돌아봤다.
서백이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손해가 있더라도 먼 길 떠난 행객들의 사정을 봐서 관대히 넘겨주시죠?”
“하아, 사정이 그렇다면야 제가 좀 손해를 보는 걸로 하지요.”
서백의 말투가 지나치리만큼 공손하자 여인도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큰 자가 매번 이득을 취하니, 역시 무림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아수라장 같습니다.”
여인이 문자까지 쓰며 말했지만 어쩐지 그 내용이 흑도 무리가 허세 부릴 때 말하는 것처럼 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어이가 없게 만들었다.
왕이삼은 배알이 뒤틀렸지만 서백이 슬쩍 눈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화를 꾹 참았다.
송현이 다시 제안을 했다.
“본인은 정보를 주는 대신 세 가지를 양보해 달라고 청했소. 은원보 네 개는 정보로 퉁쳤으니 한 가지는 됐소.”
“좋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무엇인지요?”
“양춘면 세 그릇과 술 한 병이오.”
“네에?”
송현의 말이 전혀 뜻밖이자 여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줄곧 기품을 지키던 여인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자 경국지색의 미모가 폭발했다. 그걸 본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침을 꿀꺽 삼켰다.
“좋습니다. 왕이를 시켜서 양춘면은 곱배기로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무엇인지요?”
객잔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정보 대신 세 가지를 요구한 송현의 제안.
마지막 세 번째에 무언가 귀중한 것을 요구할 터이니 여인도 왕이삼도 모두 입을 다문 채 송현의 대답만 기다렸던 것이다.
이윽고 송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 객잔에 팔각, 정향, 생강 냄새가 배어 있어서 코를 찌르는군.”
대답을 기다리던 왕이삼은 송현의 말을 듣고 무심코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고 보니 객잔 전체에 진한 냄새가 배어 있었는데, 여인을 상대하느라 긴장하는 통에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냄새만 맡고 팔각, 정향, 생강을 구분했다고? 저게 사람 코야, 개 코야?’
“세 가지는 중원 요리를 할 때 빠지지 않는 향신료요. 하지만 특히 중원 사람들이 자주 만들고 즐겨먹는 요리가 있지. 홍소육.”
그 말에 왕이삼은 옳다구나 싶었다.
홍소육은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튀긴 다음 세 가지 향신료와 간장, 마늘 등을 넣고 오랜 시간 쪄 내는 요리다. 홍소육을 만들었다면 분명 객잔에 냄새가 남아 있으리라.
“도수 높은 백주에는 기름기 많은 홍소육이 제격이지. 세 번째 요구는 홍소육 삼 인분이오.”
은은하게 풍기는 홍소육 냄새에 침을 삼키던 왕이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으면서 천연덕스러운 제안.
아니나 다를까 잠시 멍하니 있던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알겠습니다. 홍소육도 한턱내는 걸로 하지요.”
송현의 제안이 의표를 찌르자 여인은 흔쾌히 수락했는데 그 미소마저 뭇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미소를 보며 왕이삼은 경국지색이 정말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어지럽혀서 망국에 이르게 하는 뛰어난 미색.
지금 여인의 미소가 딱 그랬다.
* * *
여인은 손수 양춘면 세 그릇을 내왔다. 이어서 술을 동이째 내온 다음 홍소육을 갖고 왔다.
홍소육은 향이 잘 배어 있고 오랜 시간 쪄내서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았다. 요리 품평에 까다로운 서백과 왕이삼이 한 마디 불평 없이 허겁지겁 홍소육을 입에 넣을 정도였다.
양춘면을 배불리 먹은 일행은 홍소육을 안주 삼아서 여인과 함께 술을 마셨다.
왕이삼은 경국지색의 여인과 술대작을 하게 되자 신바람이 나서 술그릇을 비웠다.
“이거 그윽한 향이 코를 찌르는 걸 보니 상품의 술이군! 그런데 소저 이름이…….”
“주은리라고 합니다.”
“주 소저도 한 잔 하시오, 와하하하!”
왕이삼은 술그릇을 비운 뒤 이름이 주은리라고 밝힌 여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여인은 사양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주은리는 신이 나서 술그릇을 비우는 왕이삼과 매번 술대작을 했다. 술동이가 바닥나자 주은리는 새 술동이를 가져왔다.
서백은 술 대신 차를 마시고 송현은 술그릇을 입에 댔다가 떼는 정도이니, 사실상 왕이삼과 주은리가 몽땅 마시고 있는 셈.
그런데 주은리의 주량이 장난 아니었다.
왕이삼은 점점 취기가 올라서 술그릇을 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주은리는 등을 꼿꼿이 편 자세로 앉아서 기품 있게 술그릇을 입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한 잔 더 하셔야죠?”
“그, 그래야지…….”
“쭉 비우세요.”
“으응…….”
주은리는 왕이삼에게 새 잔을 따라 준 뒤 단숨에 자신의 술그릇을 비웠다.
둘은 마치 비무를 하는 것처럼 술그릇을 비워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왕이삼이 흰 자위가 보이게 두 눈을 뒤집더니 술그릇에 코를 박으며 엎어졌다.
우당탕탕.
“어머, 보기와 달리 술이 약하시군요.”
그 말에 서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외모와 태도는 고관대작의 귀한 딸 같은 여인.
그런데 외딴 곳에서 객잔을 운영하는 것도 모자라 주량은 술고래 왕이삼을 거뜬히 이길 만큼 세다고?
주은리는 필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많은 여인이리라.
하지만 굳이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숨기고 있는 사정 같은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은가?
곧이어 왕이삼이 드르렁대며 곯아떨어졌다. 주은리와의 술대작은 그것으로 끝났다.
송현이 술그릇을 비우더니 말했다.
“종이에 그린 부적은 비바람에 금세 찢어질 것이오.”
“알아요. 원래 부적은 사슴 가죽에 그리는 게 두 번째로 좋은데 요즘은 구하기가 여의치 않군요.”
술대작이 끝나자 주은리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럼 부적 그리는 데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호랑이 가죽입니다. 하지만 호피(狐皮)는 부르는 게 값이니 부적으로 쓸 수 없지요. 미봉책으로 천에다 그려서 목책에 붙였는데 지금은 천도 동이 나서 말이에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망자 창궐 이후 중원은 극심한 식량 부족에 처해 있었다.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녹림의 무리처럼 남을 죽이거나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 일쑤였다.
또한 식량 말고도 부족한 게 있으니 바로 옷이었다.
피난통에는 천을 짤 수 없으니 사람들은 낡아서 다 해진 옷을 입거나 짐승 가죽을 걸치고 다녔다.
새 옷을 만들 천도 부족하니 부적에 쓸 천을 구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리라.
결국 지금 붙이는 부적은 임시방편이라는 말.
“휴우, 중원이 어찌될런지 말이에요.”
주은리가 한숨을 쉬며 술그릇을 비웠는데, 살짝 눈썹을 찡그리는 표정이 미묘하게 야릇해서 뭇 사내들의 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두 사내는 약관이 안 된 소년과 얼음장처럼 냉랭한 남자라서 그녀의 표정에 반응하지 않았다.
왕이삼이 깨어 있었다면 분명 가슴을 치면서 한탄했을 일.
“그런데 세 분은 어딜 가시는 겁니까? 여기서 북쪽은 망자가 창궐한 본원이니 거기서 왔을 리는 없고, 반대로 북쪽으로 올라갈 일도 없을 텐데요?”
그러자 서백이 송현과 슬쩍 눈빛을 교환한 다음 대답했다.
“소림사로 가고 있습니다.”
“…….”
서백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주은리가 말을 삼켰다.
실은 서백이 주은리에게 소림사행을 얘기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방주에 탄 흑도 무리는 남궁세가가 서백에게 건 포상금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이 서백을 붙잡아서 넘기기로 한 곳이 바로 이곳 용정객잔.
만약 주은리가 소림사행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녀 역시 서백 일행을 노리는 자들 중 하나이리라.
즉 서백은 일부러 소림사행을 언급해서 주은리의 반응을 떠본 것이었다.
만약 주은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면…….
‘베어 버린다.’
서백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곧이어 주은리가 입을 열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