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망자 색출 작전(3)
서백이 아무 말 없이 살수들을 돌아봤다.
당신들 차례이니 누가 먼저 하든 시작하라는 뜻.
가장 먼저 입을 연 자는 넷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이 들어 보이는 자였다.
“자고로 장유유서인 법이니 내가 먼저 하지. 십 년 전까지 하북팽가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강호를 떠돌고 있는 장수라고 하네.”
이어서 장수란 사내는 엄지로 등에 멘 병장기를 가리켰다. 만(卍) 자와 모양이 흡사하게 생긴 기형도였다.
“보시다시피 요즘은 도검수로 살고 있네. 늘그막에 굶주릴 수는 없으니 돈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고 있지.”
장수의 말에 가시가 있었다.
돈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한다.
즉 그는 자신이 포상금을 노리고 방주에 탄 살수라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서백이 그에게 물었다.
“별호가 무엇입니까?”
“별호?”
장수는 눈썹을 찡그렸다.
서백의 질문이 뜬금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별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정파의 인물이나 뽐내기 좋아하는 사파의 고수한테나 붙는 것이었다.
하북팽가에서 퇴출당한 뒤 흑도인이 된 장수에게 별호는 사치나 다름없었다.
설령 스스로 별호를 짓는다고 해도 강호의 어떤 이가 불러줄 것인가?
비웃음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별호 같은 건 없네.”
“알겠습니다.”
질문은 뜬금없었지만 서백이 더 캐묻지 않자 장수도 그냥 넘어갔다.
자기 차례가 끝나자 장수는 옆 사람을 돌아봤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이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자로, 장수와는 정반대로 넷 중에서 가장 젊은 자였다.
그는 서백처럼 포권지례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선배한테 실례했소. 장유유서면 내가 먼저 통성명을 했어야 되는 건데. 뭐 어쨌든 나는 왕표라고 하오.”
왕표는 특이하게도 허리춤 양쪽에 검 한 자루씩을 차고 있었다.
“뭐 나도 강호에서 도검을 팔고 있소. 별호는 남들이 흑풍쌍검이라고 붙여준 게 있는데 민망해서 나는 쓰지 않소. 쌍검이라고 하면 보통 이인(二人)이나 남녀 사제를 말하는데 나는 혼자 다니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소?”
왕표는 자기가 말하고도 웃긴지 킬킬거렸다.
그때 서백이 왕표에게 물었다.
“무과 시험에 응시하셨습니까?”
“무과? 그건 왜?”
“허리에 찬 두 검이 모양이 똑같으며 길이가 비교적 짧아서 든 생각입니다.”
서백이 왕표의 허리를 가리키자 모두 그의 검을 쳐다봤다.
“뭐 검이 길다고 해서 검법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잖냐?”
왕표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서백의 다음 말에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관에서 보는 무과 시험 중에 쌍수도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짦은 요도(腰刀) 두 개를 쓰는 무공인데, 차고 계신 쌍검이 꼭 요도를 닮았군요.”
“……!”
“그래서 쌍수도를 수련하고 무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시지 않았을까 짐작했을 뿐입니다. 아니시라면 그만이고요.”
“…….”
처음에는 쾌활하게 입을 열었던 왕표가 서백의 말이 끝나자 사나운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서백이 허리에 찬 쌍검만으로 왕표의 과거와 주력 무공을 속속들이 추리해 낸 것이다.
무림에서 자신의 수법이 탄로 나는 것은 선수를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사자인 왕표로서는 무엇보다 기분 나쁜 일.
아니나 다를까 다른 살수들은 내심 쾌재의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저놈 수법이 무과의 쌍수도라고?
-돈 주고도 사기 힘든 정보로군. 꼬마야, 잘했다.
-한 놈 탈락.
살수 셋의 경쟁자 명단에서 이제 왕표는 삭제되었다. 나중에 서백을 두고 서로 싸울 때 수법이 탄로 난 왕표가 가장 먼저 죽을 게 뻔하니까.
다른 살수들의 속셈을 왕표가 모를 리 없었다.
‘빌어먹을! 꼬마 놈이 다 망쳤군!’
장수는 별호가 없다고 하자 더 묻지 않고 넘어갔는데 자신은 서백한테 가진 재산을 탈탈 털린 기분.
당연히 왕표의 심정은 서백에 대한 증오심으로 활활 불탔다.
‘포상금 받는 일이 틀어지면 꼬마 놈은 내 손으로 죽여 버린다.’
왕표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서백은 고개를 돌려서 다음 살수에게 말했다.
“당신 차례입니다.”
그는 방주에 탄 모든 살수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 바로 도화광이었다.
“내 차례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도화광(桃花狂)이다. 이름은 나도 모른다.”
사실 도화광은 지금 일행 중에서 통성명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자였다.
여인처럼 진하게 연분홍색 화장을 하고 다니는 해괴한 사내.
게다가 그의 수법도 다들 알고 있었다.
방주에 처음 탈 때 채주가 자리가 없다고 하자 소매에서 튀어나온 검날로 사형제의 목을 베지 않았는가.
그는 허리춤에는 도검 한 자루 차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연분홍색 도포를 걸치고 있어서 양쪽 소매나 품속에 암기나 비검(飛劍)을 감추고 있을지 몰랐다.
어쨌든 도화광의 수법은 소매에 숨긴 검날을 쓰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일 터.
살수들은 자신의 독문무공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수법이 알려진 도화광은 스스로 불리한 조건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그 사실을 도화광도 잘 알고 있을 터.
즉 그는 수법 따위 알게 뭐냐는 심정이었다.
제아무리 수법을 알고 있다고 한들 하수가 고수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때문에 방주에 오르기도 전에 살겁을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도화광이 모를 리 없었다.
“다음 놈으로 넘어가라고. 내 수법은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야, 크크크.”
그런데 서백이 다음 차례로 넘기지 않고 도화광에게 물었다.
“이름을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하시기 싫으신 겁니까?”
“모른다고 했잖아.”
“빌어먹는 거지도 이름은 있는 법입니다.”
“…….”
서백이 끈질기게 캐묻자 도화광은 잠시 서백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말했다.
“내 아버지는 누군지 모른다. 내 어머니는 나를 낳고 다음 날 사창가에 버렸다. 도화라는 창부가 나를 길렀지. 다들 나를 도화자(桃花子)라고 불렀고 따로 이름은 없다.”
“…….”
무림인의 삶이 척박하고 기구한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나 도화광의 얘기는 그 이상이었다.
도화광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일행을 한 차례 훑어보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창부들은 아기 때부터 재미 삼아 내게 화장을 했고 그게 커서도 버릇이 됐다. 흑도에 몸을 담자 사람들이 나를 도화광이라고 부르더군.”
“끝입니까?”
“그래.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검으로 문답해 주지.”
검(劍)으로 문답.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계속 귀찮게 하면 검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뜻.
그런데 서백은 도화광을 무시하고 마지막 살수한테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다음. 마지막 분이군요.”
도화광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지만 서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네 번째 살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소삼락이오. 가진 건 이름 석 자뿐 대단한 고수가 아니라서 별호 같은 건 없소. 소속 문파나 일하던 곳도 딱히 없소. 소 돼지 잡는 일을 하다가 칼이 손에 맞아 도검수가 됐소. 그게 다요.”
소삼락은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얘기를 끝냈다.
사실이 그랬다.
소삼락은 사십대 중반의 사내였는데 고수의 풍모는 물론 살수 특유의 날카로움도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에는 수로채 채도들이 쓸 법한 평범한 환도 한 자루뿐. 아무리 뜯어봐도 소삼락한테서는 더 들을 만한 얘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서백이 그답지 않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밤에 방주 복도에서 마주쳤으면 왕 선배님인 줄 알았겠습니다.”
“왕 선배?”
“여기 왕이삼 선배 말입니다.”
“…….”
소삼락은 서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서백과 왕이삼을 번갈아 봤다. 그러자 왕이삼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수염이 나처럼 덥수룩하니 밤에는 둘을 구분 못할 거라고 한 것이오! 와하하하!”
소삼락은 왕이삼처럼 수염과 구레나룻이 얼굴 절반을 가릴 정도로 덥수룩하게 나 있었다. 서백은 그걸 두고 농담을 한 것이었다.
“그 얘기였나? 꼬마 놈, 싱겁기는. 후후후.”
서백의 말이 농담인 걸 깨닫자 소삼락도 왕이삼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도 비슷한데 수염까지 덥수룩한 둘이 웃고 있으니 밤에 보면 헛갈릴 거라는 서백의 말이 그럴싸했다. 오죽하면 신경이 날카롭던 도화광마저 둘을 보고 피식 웃을 정도였다.
“통성명이 모두 끝났군요. 잘 들었습니다.”
서백이 일행을 돌아보며 포권지례를 올렸다.
소삼락의 덥수룩한 수염을 보며 웃고 있던 왕이삼은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이게 다야?’
왕이삼은 처음부터 통성명을 하자는 서백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흑도 무리가 신분을 속이려 들 경우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름까지 거짓말한 놈은 없는 것 같다만…….’
문제는 그게 다라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았지만 누가 명령자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판인데 서백이 통성명이 끝났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 왕이삼으로서는 대체 서백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후배도 송현 놈도 평소 머리를 그렇게 잘 굴리면서 오늘은 대체 왜 저런다냐…….’
흑도 네 명은 수십 명이 넘는 무림인들 중 방주에서 탈출한 유일한 자들이었다.
무공 수위는 물론, 서백 일행을 따라가야 살 수 있다고 재빨리 선택할 만큼 판단력도 뛰어나다는 뜻.
그런 자들을 앞에 놓고 통성명을 하는 것도 모자라 괴상한 질문이나 하고 앉았으니…….
왕이삼이 서백에게 불만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언제 망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이게 무슨 시간 낭비냐고!’
왕이삼이 답답해하고 있을 때, 서백이 말했다.
“아쉽게도 누가 명령자인지는 알기 힘들군요.”
그 말에 왕이삼은 속으로 버럭 외쳤다.
‘당연하지! 이름 갖고 망자라고 한다면 나는 안망자로 개명하겠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또? 통성명은 했으니 이번에는 뭘 물어 볼 건데?’
왕이삼은 분통이 터진 나머지 마음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그런데 서백의 다음 말을 듣자 그는 흡 하고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이 방법을 쓰면 일행 중에 숨어 있는 망자를 반드시 색출해 낼 수 있습니다.”
잠시 미소를 머금었던 서백의 표정이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망자를 상대할 때 서백이 보이곤 했던 그 눈빛.
침을 꿀꺽 삼킨 왕이삼은 토를 달 엄두도 못 낸 채 서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살수 네 명도 진지한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일행은 모두 일곱 명입니다. 한 명이 부족하지만 일곱 명이 각자 팔(八) 방위로 흩어지는 겁니다.”
“함께 뭉쳐도 망자를 상대하기 힘들 판에 뿔뿔이 흩어지자고? 무슨 개소리냐?”
도화광이 서백의 말이 어이없는지 반문했다.
“명령자는 혈귀들의 정신을 조종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얼 하라고 시킬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까?”
“맞다.”
서백이 묻자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또한 혈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본능적으로 명령자를 찾아서 주위로 모인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것도 맞다.”
“제 말은 그걸 이용하자는 겁니다.”
서백이 일행을 한 차례 훑어 본 다음 말했다.
“일행이 한 명씩 따로 떨어져 있으면 망자 떼가 누군가를 향해 몰려들 겁니다. 그자가 바로 명령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