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망자 색출 작전(1)
문득 서백은 송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이 교환되자 송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둘 테니 좋을 대로 하라는 뜻.
서백은 검날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걸 본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서백이 망루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방주에 남은 자들은 어차피 흑도의 무리.
그들이 무사히 선착장으로 건너올 때까지 망루를 그대로 놔둔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다가 채도들이 건너오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 아닌가!
‘흑도 놈들은 아쉽겠지만 나부터 살고 볼 일이지.’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백이 검을 꽂지 않고 빙그르 돌리더니 그대로 내리는 것이었다.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저들을 구해 주려는 거냐?”
“네.”
“언제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모르는 흑도 놈들인데?”
“상관없습니다. 배신하면 그때 가서 상대해 주면 그만입니다.”
“쩝.”
살수들은 서백이 검을 한 차례 들었다가 내린 줄은 까맣게 모르고 채도들을 상대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뒤로 돌아서 돛대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그들은 돛대와 망루를 거쳐서 선착장에 착지했다.
살수들이 모두 넘어오자 서백이 수직으로 검을 들어서 망루의 연결 부분을 세 차례 찍었다.
쩍 쩍 쩍.
콰지직. 땅속에 박혀 있는 망루의 기둥이 파편을 튀기며 끊어졌다.
방주는 느리지만 계속 앞으로 나가고 있었고, 자연히 돛대와 망루가 얽힌 부분은 양쪽으로 당기는 셈이 되었다.
그러자 쪼개진 망루의 기둥이 서서히 뽑혀나갔다.
콰직. 우드드득.
곧 기둥이 완전히 뽑히면 선착장과 방주를 잇는 다리는 사라지고 말 터.
채도들이 환도를 들고 돛대로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채도들은 쓰러진 돛대에 서로 올라타려고 밀고 당기느라 하나둘 떨어져서 운하에 빠졌다.
풍덩. 키에에엑.
그런데도 채도들은 여전히 평지 달리듯 무작정 돛대에 올라탔다. 돛대는 먼저 서백이 건넜을 때보다 더욱 흔들리고 불안정해진 판.
결국 채도들은 몇 걸음 전진하지 못하고 운하로 추락하기를 반복했다.
서백은 그걸 보고 생각했다.
‘피를 흡수하면 일시적으로 용력이 높아지지만 무공 수위와는 관계없군.’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돛대와 망루.
하지만 일류 수준의 경신법을 갖췄다면 건너는 데 문제는 없었다. 설령 이류 수준이라고 해도 꼴사납게 기어서 건널 수는 있을 정도.
반면 채도들은 무작정 돛대를 타다가 망루와 얽힌 곳을 넘지 못하고 우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환도로 살수의 도검을 갈라 버릴 만큼 용력은 크게 상승한 채도들. 그러나 경신법이나 초식, 즉 무공 수준 자체가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의미.
앞으로 피를 흡수한 망자를 상대할 때는 정면대결을 피하면 문제가 없으리라.
‘귀중한 정보다.’
채도들이 좀처럼 선착장으로 건너오지 못하자 살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간신히 살았군.”
“잘했다, 꼬마야.”
그런데 다른 살수들과 달리 도화광은 날카롭게 안광을 돋운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꼬마야, 방금 우리가 오기 전에 망루를 무너뜨리려고 한 거 맞냐?”
그 말에 살수들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서백을 봤다.
서백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
“뭐라고? 우리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냐?”
“네. 제가 왜 상관해야 됩니까.”
“이놈이……!”
버럭 화를 내려던 도화광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목숨을 건졌으니 다리를 끊어서 적들이 오지 못하게 막는다. 뒤에 남은 자들의 목숨이야 알 바 아니다.
흑도에서는 허구한 날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같은 방주를 타고 온 참에 무정한 것 아니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자신들은 서백을 잡으러 방주에 탄 살수인 처지이니까…….
“무림에서는 각자도생입니다. 자기 목숨은 스스로 알아서 챙기십시오.”
“…….”
더없이 냉정한 말. 동시에 반박할 수 없는 말.
약관도 안 된 서백이 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수십 평생 은거하다가 강호출행한 고수가 꺼낸 말처럼 무게가 담겨 있었다.
서백과 살수들이 대치하고 있을 때, 송현이 고개짓을 하며 말했다.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소.”
서백이 기둥 하나를 쪼갰지만 망루가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던 것이다.
질긴 재질의 나무로 제작된 데다가 기둥이 땅속 깊숙이 박혀 있던 터라 망루는 다 쓰러져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땅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자 망루와 얽힌 돛대가 조금씩 방주를 뭍 쪽으로 끌어당겼다.
일직선으로 나가던 방주에 밧줄을 매단 격.
방주는 물살에서 조금씩 비껴가며 점점 반원을 그렸다. 그대로라면 선착장의 옆까지 올 터.
그런데 진짜 위기 상황은 따로 있었다.
혈귀처럼 서로 밀치며 무작정 돛대를 건너던 수로채의 채도들.
그들이 어느새 일렬로 하나씩 돛대를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돛대와 망루가 얽혀서 쉽게 건널 수 없는 부분에서는 채도들이 잔해를 붙잡고 엎드렸다. 그리고 뒤에서 다른 채도들이 동료들의 등을 밟고 다리를 건넜다.
흡사 망자들이 신체를 써서 다리를 놓은 것 같은 광경.
“저, 저게 말이 되나…….”
왕이삼이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는데 다른 살수들도 말은 안 했지만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용력만 높아진 게 아니라 지능까지 생긴 것인가?
대체 어떻게…….
송현이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이 말했다.
“명령자가 망자들을 조종하는 것이오.”
“명령자?”
“혈귀들을 사념(思念)으로 조종하는 망자를 명령자라고 부르오.”
도화광이 묻자 송현이 대답했다.
그러자 살수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문을 들은 적 있다. 망자 중에서 다른 망자를 정신 조종 하는 놈이 있다고 하더군.”
“…….”
살수 하나가 송현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다들 침을 삼키며 침묵했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도망가자!”
왕이삼이 소리쳤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일행은 몸을 돌려서 방주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선착장은 옆 마을과 붙어 있었다.
말이 마을이지 작은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규모.
안휘성과 운하를 잇는 선착장인 만큼 마을 거리에는 대로가 펼쳐져 있으며 그 옆으로 수많은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고,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했다.
을씨년스러운 거리. 망자 창궐로 사람들이 마을을 버리고 피난 간 것이었다. 아니면 망자가 되었든지…….
왕이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원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군.”
그때 선두에 있는 서백이 주먹을 쥐며 발을 멈췄다. 정지하라는 신호.
“후배, 왜 그러냐?”
“망자가 있습니다. 하나둘이 아니군요.”
“……!”
서백이 살수들에게 망자 피하는 법 세 가지를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화광이 피식 웃으며 서백의 말을 무시했다.
“숨을 참고 무표정을 해? 정말 그렇게 하면 망자가 몰라보냐?”
“네.”
“참 나, 망자 피하는 게 그리 쉬우면 중원에 왜 망자가 창궐했겠냐?”
“믿든 말든 좋을 대로 하십시오.”
서백 일행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숨을 멈추고 이동을 재개했다.
그러자 살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나둘 서백 일행을 따라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
그러나 말을 듣지 않다가 망자한테 걸리면 자기만 손해가 아닌가? 설령 서백의 말이 엉터리라고 해도 밑져야 본전인 셈.
다른 살수 셋이 서백 말을 따라하자 도화광도 고개를 젓더니 호흡을 멈췄다.
“쳇, 나만 안 할 수야 없지. 흐읍!”
왕이삼은 도화광이 괜한 허세를 부리다가 결국 서백 말을 듣는 것을 보자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가 무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백 일행 세 명과 살수 네 명.
모두 일곱 명은 서백의 지시에 따라 어둠에 잠긴 거리를 통과했다.
선두에 선 서백은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수신호를 보내며 이동했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주먹을 쥐어서 정지.
이상 없으면 검지와 중지를 앞으로 뻗어서 전진.
갈림길이 나오면 손가락을 틀어서 좌우 회전.
간단하지만 방향을 지시하는 데 적격인 수신호.
새벽이 되려면 한참 시간이 남아 있었다.
거리는 칠흑처럼 어두웠는데 곳곳에서 괴이한 그림자가 달빛에 드리워진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망자가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뜻!
서백은 석가심결 시전을 중지하고 있었다.
석가심결을 운용한다면 시야가 트여서 이동이 훨씬 수월하리라. 하지만 석가심결은 제한 시간이 있으니,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 두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석가심결이 없어도 발자국 소리와 기척을 통해 얼마든지 망자들을 피해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숙주의 선착장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해가 뜨지 않아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일행은 한참을 이동했지만 여전히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리를 이동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서백이 발을 멈췄다.
“이상하군요.”
서백이 입을 열자 왕이삼은 그 틈을 타서 숨을 쉴 겸 얼른 물었다.
“뭐가 말이냐?”
“같은 곳을 돌고 있습니다.”
서백이 일행 왼쪽에 있는 담벼락과 오른쪽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차 한 잔 마실 시간 전에 여기를 지나쳤는데 다시 돌아왔군요.”
“그렇군.”
송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왕이삼은 아무리 봐도 담벼락은 담벼락이고 건물은 건물일 뿐이었다. 그저 서백과 송현이 그렇게 말하니 그러려니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갈림길마다 망자가 번번이 앞을 막아서 방향을 틀다 보니 되돌아온 겁니다.”
그 말에 도화광이 비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오래 걸린다 싶더라니 길을 잃었군, 크크크.”
하지만 서백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럼 뭐냐?”
“사냥입니다.”
“뭐라고?”
“망자들이 우리를 한쪽으로 몰고 있습니다.”
“……!”
서백을 비웃던 도화광은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명령자군.”
“그런 것 같습니다.”
송현이 말하자 서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까 말한 명령자 얘기냐? 망자들을 정신 조종한다는.”
“그렇소. 명령자가 망자들을 조종해서 일행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소.”
“제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거듭 말하지만 믿든 말든 자유요.”
송현은 무심하게 말을 뱉은 뒤 도화광을 무시하고 서백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곳에 머무르면 발각된다. 계속 이동하자.”
“어디로요?”
“일단 이쪽으로.”
이번에는 송현이 앞장을 섰다.
일행은 그의 뒤를 따라 이동을 재개했다.
송현은 한참을 골목을 지나고 모퉁이를 돌다가 곧이어 걸음을 멈추더니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여기에서 작전을 새로 짜겠소.”
벽돌로 지은 집은 내부가 꽤 넓어서 망자 창궐 이전에 제법 부자가 살았던 곳 같았다.
또한 튼튼하게 지어진 집인지 창문이 아직 제대로 붙어 있었고, 일행이 방을 조사했지만 망자의 낌새는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망자를 따돌리는 작전을 구상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
“명령자가 망자 떼를 조종하고 있는 한 도시를 빠져나가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지금부터 명령자를 찾을 것이오.”
“뭐라고? 어떻게?”
“간단하오.”
도화광이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송현이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