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방주 탈출(5)
도화광이 영문을 몰라서 되물었다.
“돛대를 잘라?”
“네.”
“돛을 거두느니 아예 돛대를 잘라서 속도를 늦추자는 거냐?”
“아니, 방주 속도는 빠를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 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도화광이 서백의 말을 이해 못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다른 살수들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가늘게 뜬 눈으로 서백과 송현을 주시했다.
-저 두 놈이 꽤 영리하지만 지금은 도화광 말이 옳다.
-설령 돛대를 자른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터. 그 사이에 선착장을 지나쳐 버리지 않나?
-대체 두 놈이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혹시 탈출하기 전에 방주에서 우리랑 사생결단을 보겠다는 건가?
살수들이 그런 의심을 품은 것도 당연했다.
서백과 송현의 무공 수위로 볼 때, 자신들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눈치 채고도 남았을 터.
그러니 망자 떼가 갑판으로 올라오든 말든 차라리 방주를 못 쓰게 만들어서 사생결단을 내자고 결심할 만도 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막상 서백과 송현이 돛대를 자르겠다고 선언하자 살수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유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남의 목숨을 벌레 죽이듯이 빼앗는 게 직업인 살수. 하지만 살수들은 의외로 죽음을 꺼렸다.
청부살인은 오히려 쉽다. 어려운 것은 사람을 죽인 뒤에 자기 목숨도 구해서 무사히 탈출하는 것.
무작정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청부살인을 맡는다면 그게 무슨 살수인가? 그냥 자살행위지.
의외로 흑도 무리보다 명문정파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념을 지키려 하니까.
물론 그 신념이 정말 올바르고 공명정대한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런 상황이니 살수들은 서백과 송현이 방주를 망가뜨리고 자신들과 싸울 생각인 게 아닐까 의심이 든 것이었다.
그때 계단 밑에서 망자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키에에엑.
이어서 채도들이 갑판을 향해 꾸역꾸역 올라오기 시작했다.
계단과 가까운 곳에 있는 송현이 서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는 내가 맡겠다.”
“돛대는 맡겨 주십시오.”
송현은 계단 입구를 정면으로 막으며 섰다.
채도들이 한꺼번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 좁은 입구로 올라오느라 병목현상을 일으킬 때 하나씩 처치하려는 병법.
채도 하나가 갑판 위로 머리를 내민 순간 푸른 검기를 띤 송현의 검이 목을 베어 버렸다.
촤악. 꾸웩.
계속해서 송현은 제자리에 굳건히 선 채 검만 놀려서 채도들의 목과 사지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갑판에는 송현이 막고 있는 곳 말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계단에서도 채도들이 위로 올라왔다.
그걸 본 도화광이 침을 퉤 뱉으면서 검을 치켜들었다.
“빌어먹을.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일단 면피는 해야겠군.”
“동감이다.”
도화광과 살수들도 병장기를 휘두르며 채도들이 갑판에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
송현과 살수들이 시간을 벌어 주고 있으니 남은 것은 서백 차례.
서백은 방주가 빠른 속도로 선착장에 접근하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정확함이 생명이다.’
방주가 선착장을 통과하는 시점.
그 찰나의 순간이 작전의 성패를 가를 터.
서백이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자 옆에서 보고 있는 왕이삼은 초조함에 발을 굴렀다.
“후배, 대체 뭐를 할 생각이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돛대를 자를 겁니다.”
“아니, 멀쩡한 돛대를 왜 잘라? 방주를 박살 내려는 거냐?”
“돛대가 운하를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될 겁니다.”
“다리라고……?”
왕이삼은 서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될 듯 말 듯했다.
절벽 같은 곳을 건널 때 나무를 쓰러뜨려서 다리를 만들고 건너는 것은 왕이삼도 익히 아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방주에서 운하 건너편까지 다리로 대기에는 돛대의 길이가 애매했다.
무엇보다 방주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게 문제.
설령 돛대를 쓰러뜨려서 운하 가장자리에 걸친다고 해도 방주가 움직이느라 방향이 틀어져서 물속에 빠질 것이 아닌가?
그때 서백이 앞을 보며 말했다.
“저기 오는군요.”
왕이삼이 고개를 돌리자 전방에 거대한 규모의 선착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방주가 선착장을 통과하리라.
“선배님은 돛대 위로 올라가십시오.”
“뭐라고? 왜?”
“돛대 맨 꼭대기로 올라가 계시면 됩니다.”
왕이삼은 영문을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무작정 돛대를 올라갔다. 사천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서백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으니까.
운하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어서 갑판에서는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돛대 꼭대기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였다.
순간 왕이삼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저건…….”
그것은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이 서 있는 선착장의 망루였다.
방주의 돛대와 거의 같은 높이인 망루는 끝에 원형 모양의 널찍한 전망대가 있었다.
망자 창궐 이전 운하가 성황리일 때 수로채의 채도들이 전망대에 올라가 운하를 오가는 배들을 교통정리 했으리라.
망루를 본 순간 왕이삼은 서백의 작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후배! 돛대를 쓰러뜨려서 망루에 걸치려는 거냐?”
“바로 그렇습니다.”
방주가 선착장을 통과할 때 돛대를 쓰러뜨린다면 끝이 전망대에 걸리게 될 터.
그럼 돛대와 망루가 다리처럼 연결되는 셈이 아닌가!
실로 대담한 작전인 동시에 어이없을 만큼 황당무계한 작전이기도 했다.
돛대가 넘어가는 시각이 조금만 빠르거나 느리다면 돛대는 허공을 가른 채 빗나가고 말 테니까.
‘실패하면 끝장이잖아?’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며 역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후배라면 해 주겠지.’
서백과 송현. 둘의 능력은 왕가 요새에서부터 쭉 보아 오지 않았는가.
서백이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꽉 잡으십시오.”
문득 왕이삼은 송현이 검기로 방주의 두터운 바닥을 뚫던 게 생각났다.
‘후배보다 송현이 돛대 자르는 쪽이 낫지 않을까?’
방주의 돛대는 어른이 양팔로 안을 수 없을 만큼 지름이 두꺼웠다. 서백의 검이 아무리 대검이라고 해도 그런 돛대를 자를 수 있으리라곤 상상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왕이삼은 불안한 나머지 물었다.
“나도 내려가서 도울까?”
“선배님은 거기 계시는 게 돕는 겁니다.”
“뭐?”
왕이삼이 영문을 모르고 있을 때, 서백이 높이 치켜든 검을 비스듬히 내려쳤다.
오랜 세월 습기를 먹어서 질길 대로 질겨진 돛대.
그러나 서백의 검은 장작 패듯이 돛대를 쪼개며 박혔다.
쩌억.
그걸 본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송현보고 자르는 게 낫다고 했으면 본전도 못 찾을 뻔했군.’
송현이 무엇이든 베어 버리는 예리한 검기라면, 서백은 무엇이던 두 쪽으로 가르는 용력!
이윽고 방주가 망루 바로 옆으로 접근했다.
후우우우.
서백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내뱉었다.
사천의 서쪽 끄트머리 산속에 있던 석가장.
사시사철 춥고 눈이 내리기 때문에 서백과 사형제들은 매일 나무를 해야 했다.
스승은 도끼 대신 검으로 나무를 베고 장작을 패도록 명령했다. 그런 서백에게 돛대 쓰러뜨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듯이 쉬운 일.
서백은 검을 들어서 한 번은 위에서 비스듬히, 한 번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며 돛대를 찍었다.
쩍 쩍.
돛대 중앙이 쐐기 모양으로 패이며 파편이 튀었다.
‘지금이다.’
빡. 서백이 몸을 회전하며 뒷발차기로 돛대를 강타했다.
막 끊어질 것 같던 돛대는 옆으로 한 번 기우뚱하더니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급격하게 옆으로 쓰러졌다.
돛대 꼭대기에 있던 왕이삼은 그제야 서백이 왜 위로 올라가 있으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돛대가 쓰러질 때 끝에 무게추 역할을 해서 더욱 빨리 쓰러지도록 한 것이다.
왕이삼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돛대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으아아아! 후배, 이 자식아!”
왕이삼 덕분에… 아니, 서백이 정확하게 시각을 계산했기 때문에 돛대는 망루 전망대의 중간에 걸치면서 쓰러졌다.
쾅. 우르르르.
돛대 끝에 원형 전망대가 정확히 걸렸다.
그 바람에 돛대와 망루가 서로 얽히면서 붙어 버렸고, 급기야 운하 쪽을 향해 망루가 쓰러졌다.
그러자 돛대와 망루가 서로를 향해 쓰러지면서 방주와 운하 바깥을 이어 줬다.
그야말로 다리가 생긴 셈!
서백은 그걸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잘 되었군.’
그러나 미소는 잠시, 금세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온 서백은 돛대와 망루가 만든 징검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편 돛대가 망루와 부딪치는 충격으로 왕이삼은 꽉 붙잡고 있던 양팔이 풀렸다.
“으아아아……!”
왕이삼이 망루 잔해와 함께 운하를 향해 떨어질 때, 어느새 돛대 위를 달려온 서백이 추락하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턱.
“후, 후배냐?”
“수고하셨습니다.”
“…….”
원래 왕이삼이었다면 무게추 역할을 하라는 것인 줄 알았다면 꼴사납다고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백의 말은 달랐다.
서백의 말은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좋다.
상상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적을 쓰러뜨리거나 작전을 성공시키니까.
게다가 위험해진 동료를 챙기는 것도 절대 빼먹지 않고서.
전쟁터라면 병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든든한 지휘관일 터!
“송 선배님!”
작전을 완수한 서백이 송현을 불렀다.
송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채도들을 상대하며 뒤로 후퇴했다.
반면 도화광과 살수들은 서백과 송현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쓰러진 돛대가 망루와 얽혀서 다리처럼 연결된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하! 완전 미친놈들이잖아?”
흑도에서 제법 검 좀 쓴다고 알려진 살수들인 만큼 그들은 수도 없이 명문정파의 고수를 상대해 봤다.
그중에는 서백만큼 용력이 뛰어난 신진고수도 있었고, 송현만큼 검법이 표홀한 검객도 있었다.
그러나 저 둘만큼 손발이 척척 맞는 이 인은 한 번도 상대해 본 적 없었다.
-저 두 놈 중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생포해서 용정객잔으로 끌고 갈 수 있을까?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살수들도 이제 포상금을 받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채도들은 꾸역꾸역 몰려왔다.
아무리 검으로 베고 찔러도 쓰러지지 않는 망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나마 갑판 입구를 막아서 병목현상을 만든 다음 상대했기 때문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송현은 맨 앞에서 덤비는 채도의 허리를 검으로 양단했다. 그리고 채도의 상체를 바닥에 떨어뜨려 입구가 일시적으로 막히게 한 다음 돛대 쪽으로 몸을 날렸다.
살수들도 채도들에게 한바탕 칼질을 한 뒤 몸을 돌려서 달렸다.
방주가 점점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얽힌 돛대와 망루는 절벽에 걸쳐진 그물다리보다 더욱 심하게 흔들리며 요동쳤다.
그러나 송현은 평지 걷는 것처럼 돛대를 건넜다.
송현이 몸을 날려서 망루가 서 있던 선착장에 착지하자 서백은 검을 수직으로 들었다.
그대로 검을 망루 잔해에 꽂으면 간신히 얽혀 있던 돛대와 망루가 무너져 내릴 터.
그럼 망자로 탈바꿈한 채도들은 선착장으로 건너올 수 없으리라.
도화광과 살수들도 물론.
흑도 무리에게 강호의 정리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서백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