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소림사로 가는 길(2)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송현의 말이 맞았다.
장안, 낙양, 개봉.
모두 중원에서 인구가 많기로 손에 꼽히는 대도시들이다. 그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망자로 탈바꿈했다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리라.
왕이삼은 최근 십여 년간 강남과 사천 지방을 주로 돌아다녔다. 그 바람에 중원 중심지의 상황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그곳에 소림사가 있다는 것.
소림사는 하남 숭산의 소실봉에 있었다.
숭산. 바로 하남 땅의 한복판이 아닌가!
그걸 깨닫자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빌어먹을 땡초 놈들! 중원에 산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거기다 절을 지은 거야?”
그러자 송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요. 무림의 총본산 격인 소림사가 중원 중심지에 있는 것은 당연하지.”
“그건 그렇지만…….”
왕이삼은 말을 더듬으면서 슬쩍 서백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서백이 소림사행을 하지 않고 마음을 바꿀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기대는 물 건너갔다.
“접경지역을 통과하는 것은 무리겠군요.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
서백이 한 마디로 잘라 말하자 왕이삼은 반대는커녕 입도 뻥끗 못한 채 속으로 끙끙 앓았다.
“마침 본인이 아는 곳이 근방에 있군.”
“망자를 피해서 소림사로 갈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곳입니까?”
서백이 묻자 송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앞장을 섰다.
서백과 송현이 길을 가자 왕이삼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뒤를 따라갔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사형대에 오르는 죄수처럼 무거웠다.
‘에휴. 후배가 가지 말자고 해서 들을 녀석이 아니지.’
역시 포기하니 마음은 편했다.
보통 길을 떠나면 낮에 걷고 밤에 잠을 자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백 일행은 반대로 했다.
해가 중천에 뜨면 그늘진 곳을 찾아서 잠을 잤다. 그러다가 해가 떨어지면 일어나서 이동을 했다.
망자는 낮보다 밤에 활발히 움직이는 습성이 있다.
밤에 잠을 자다가 망자 떼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니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밤에 자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자면 되니까.
하지만 밤에 자려면 불을 피워야 되는 게 걸렸다.
“혈귀는 불빛에 반응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처음부터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 대규모의 망자 떼와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서백은 최대한 안전한 쪽을 택한 것이었다.
서백의 결정에 송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삼도 아무 말 없이 결정을 따랐다.
‘내가 말해 봤자 우문현답 훈계나 들을 게 뻔하지.’
정확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삼 일 밤낮을 이동하자 드디어 인가가 나왔다.
하지만 인적은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피난 가는 바람에 거리는 물론 집집마다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쪽으로.”
송현은 일행을 비좁은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더니 어느새 일행은 마을 반대편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런데도 송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발을 멈춘 곳은 으슥한 숲속에 난 공터였다.
마을은 인기척 한 번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공터에는 불빛이 밝혀져 있었다.
순간 왕이삼은 송현이 안내한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여긴 흑점이잖아?’
흑점(黑店). 흑도 무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모여서 정보나 인력을 사고파는 곳.
왕이삼도 과거에 흑점의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흑점의 일이라는 게 사람 목숨을 비겁하게 빼앗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왕이삼은 영 성미에 맞지 않아 그냥 도검수가 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흑점은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없다.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객잔이 주로 흑점인 경우가 많다. 그런 흑점에 들어가면 같은 흑도 무리가 아닌 이상 목이 어깨에 붙은 채 나오기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또는 지금처럼 마을 근처의 외딴 숲속에 열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흑점은 아무 때나 열리지 않았다.
흑도 무리가 서로 약속한 시각에 비밀리에 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삼 개월에 한 번? 경우에 따라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흑점도 있었다.
즉 송현이 지금 흑점을 찾아냈다는 것은 흑도 무리의 사정에 눈이 밝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자가 흑도 무리의 두목이라는 뜻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왕이삼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왕이삼은 서백에게 몰래 귓속말을 했다.
“후배, 여기가 어딘 줄 아냐?”
“흑점인 것 같군요.”
석가장이란 데서 처음 중원에 나왔으면서 서백은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럼 흑점이 어떤 곳인지도 알겠군. 저놈 믿을 수 있냐? 나는 왠지 꺼림칙한데.”
“망자 떼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배님이 뭐가 그리 무섭습니까.”
“흑점이라고, 흑점! 나는 인육만두 되기 싫다고!”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과 제 고기로 만두를 빚으려면 값을 많이 치러야 될 겁니다.”
서백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자 왕이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뒤를 따라갔다.
공터를 가로지르자 맞은편에 한 폐가가 있었는데 거기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폐가 마당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흑도 무리가 주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이 난리통에도 흑점 놈들은 영업을 하는구만.’
왕이삼은 기가 막히면서도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송현이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전신에 시커먼 흑포를 걸친 자 앞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상자를 구하고 있소.”
“어떤 모양이오?”
“네모.”
“네모난 상자라면 아직 쓸 만하오.”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소?”
“동쪽으로 네 발로 사흘, 두 발로 일주일 거리요.”
대화가 끝나자 송현은 흑의인에게 은자를 던져 준 뒤 몸을 돌렸다.
왕이삼은 둘의 대화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송현과 흑의인이 나눈 대화는 흑점에서 통용되는 속어인 흑화(黑話)였다. 왕이삼도 그건 잘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흑화라고 해도 둘의 대화는 무슨 뜻인지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이삼은 송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얘길 한 거요? 네모난 상자가 뭐요?”
그런데 잠자코 있던 서백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말했다.
“네모난 상자는 배군요!”
“그렇지.”
송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삼은 더욱 궁금해졌다.
“배라니 뭔 소리냐?”
“방주(方舟)라는 뜻입니다. 크기도 네모나고 속에 짐과 사람을 많이 실으니 상자인 셈이죠.”
“…쳇, 그렇군.”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왕이삼은 혀를 찼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잠깐! 설마 또 배를 타자는 거냐? 장강삼협에서 배는 아주 지긋지긋하게 탔는데.”
사천에서 중원 땅으로 넘어올 때 장강삼협을 거치며 물에 빠져 죽을 위기를 넘겼던 왕이삼. 그가 배라면 질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강삼협은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군.”
“그렇다니까! 내 다시는 물에 안 들어가기로 맹세했소!”
“이번에는 물에 들어갈 일 없을 거요. 장강삼협에 비하면 물살은 호수처럼 천천히 흐를 테니까.”
“헹, 중원에 그런 강이 있나?”
“있소. 운하요.”
“……!”
그제야 왕이삼은 송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중원 땅은 황하와 장강이라는 두 개의 큰 강이 흐르기 때문에 동서(東西)로 오가는 것은 쉬우나 남북(南北)으로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던 중 수나라 때 대운하가 건설돼서 중원의 남북을 연결했다.
수나라는 대운하 공사에 너무 힘을 쏟은 탓에 멸망했지만 이후 대운하는 중원의 젖줄이 되어서 남북의 교통로가 되었다.
송현이 네모난 상자, 즉 방주를 찾은 것도 대운하가 이 난리통에도 운영되는지를 물은 것이었다.
방주는 속도가 느려서 평범한 강에서는 운항할 수 없으나 운하라면 상관없었다. 네모나서 짐과 사람을 많이 실을 수 있으니 딱 운하에 적합한 배였다.
“장강 지류에서 방주를 타면 대운하가 시작되는 양주를 거쳐서 북상할 수 있소. 대운하는 낙양까지 이어지니 망자 떼를 피해 소림사로 가려면 그 길뿐이오.”
그 말을 듣고 중원 지리에 밝은 왕이삼은 뱃길을 곰곰이 머릿속에 그려 봤다.
그러다가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잠깐! 그렇게 가면 중원을 반 바퀴 빙 돌아가는 셈인데?”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쩝…….”
송현의 한 마디에 왕이삼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최선의 길은 아니지만 차선책은 됩니다. 방주를 타고 대운하로 이동하면 걷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를 테니까요.”
그건 사실이었다.
왕이삼도 다시 생각해 보니 걸어서 호북과 하남을 지나는 것과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 크게 시간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왕이삼은 송현과 서백의 논리에 설득당했다.
“좋소. 맹세는 했지만 배가 아니라 방주니 괜찮겠지. 근데 아까 네 발, 두 발 하던 말은 무슨 뜻이오?”
왕이삼은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는데 이번에는 송현이 아니라 서백이 먼저 대답했다.
“그건 선착장이 말을 타면 사흘 거리, 걸어가면 일주일 거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
네 발은 말, 두 발은 도보.
흑화의 뜻은 깨달았지만 왕이삼은 서백한테 또 졌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왕이삼이 풀이 죽어 있자 서백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방주를 타면 최소 보름 이상은 늦어지겠지만 망자 떼는 피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옛말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쳇, 또 우문현답이군.”
왕이삼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낙천적인 그답게 어느새 화가 풀려 있었다.
서백 일행은 흑점에서 말 세 필을 사서 길을 떠났다.
돈 지불은 은원보를 갖고 있는 왕이삼이 했다.
어차피 서백과 함께 내는 셈이었지만 그는 자기 돈을 내는 것처럼 아까워했다.
“이게 어떻게 번 돈인데.”
“그 돈 다 선배님 것 아닙니다. 제 돈과 소운 형님 몫도 있습니다.”
“안다고 알아. 그냥 아까워서 하는 말이야.”
그때 앞을 가던 송현이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방금 소운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어떤 자요?”
“서른쯤 된 나이에 밝은 청의를 걸쳤으며 얼굴이 여인처럼 하얗고 곱상하신 분입니다.”
서백이 대답하자 왕이삼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 녀석 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쐈는데.”
그 말에 송현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성이 유가, 이름은 소운. 유소운 아니오?”
“맞습니다. 아시는 사이입니까?”
“그렇소.”
“소운 형님은 무림맹의 일로 사람을 찾아 운남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천에서 저희와 만났습니다. 혹시 운남에서 찾던 분이…….”
“내가 맞을 것이오.”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 말에 평소 담담하던 서백도 입을 살짝 벌리며 왕이삼을 돌아봤다. 물론 왕이삼은 입이 찢어져라 딱 벌리며 경악하고 있었다.
“뭐야 그럼? 그 녀석 또 길이 어긋난 거야?”
“어긋나다니, 무슨 뜻이오?”
“그 녀석 우리랑 함께 소림사에 가다가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며 따로 갔소.”
“언제?”
“제갈세가에 가기 전인데… 으악! 제갈세가에 같이 갔으면 당신이랑 만났을 거 아냐? 그 길치 놈!”
“길치라는 걸 보니 소운이 확실하군.”
송현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니 누굴 찾으러 갔지?”
“세상 이치를 깨우친 선생을 찾으신다면서 왕가령으로 갔습니다.”
“그랬군. 근데 선생은 거기 없을 텐데.”
“그렇습니까?”
“선생 고향이 왕가령은 맞지만 선생은 낙향하지 않고 다른 곳에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그 말에 서백과 왕이삼은 재차 서로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길치 놈, 쓸데없이 중원을 한 바퀴 도는군.”
“사람은 하나도 못 찾으시면서 말이죠.”
서백과 왕이삼이 기가 막혀서 멍하니 있을 때 송현이 무심한 한 마디를 던진 뒤 말을 몰아서 앞으로 달려갔다.
“소운도 소림사로 올 테니 모두 다시 만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