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소림사로 가는 길(1)
청의인은 제갈세가를 떠나기 전에 포로로 붙잡았던 제갈세가의 무사들을 풀어 줬다.
“알아서 갈 길을 가시오.”
“…….”
무사들은 선뜻 가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혹시라도 등을 돌렸을 때 살인멸구를 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발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백 일행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서 가 버렸다. 서백 일행이 멀리 가 버린 뒤에야 안심한 무사들은 서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서백 일행의 앞에 제갈세가에 처음 왔을 때 마주했던 사자상이 나왔다.
왕이삼이 감회가 깊은지 중얼거렸다.
“처음 이 사자상을 볼 때만 해도 제갈세가는 우리가 싸울 엄두도 못 낼 엄청난 곳인 줄 알았는데 말야.”
“과거의 명성이 영원할 수는 없소.”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청의인이 대답했다.
그러자 왕이삼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참! 당신이 말한 합격진 명령. 좌우좌좌우좌우좌. 그거 정말 신통해서 무사 놈들이 꼼짝도 못하더군! 무슨 비법이라도 있소?”
그런데 청의인의 대답이 이상했다.
“없소.”
“없다고? 좌우좌좌우좌우좌… 그 순서가 어떤 원리로 되는 건지 뭐 그런 게 있을 것 아니오?”
“없소. 그냥 되는 대로 말한 거요.”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갈혁이 사람 심리를 이용해서 기문둔갑술을 쓰는 원리와 같소.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힘을 낼 수 있는 법. 당신은 그 순서를 비법이라고 믿었으니 무사들을 이길 수 있었던 거지.”
왕이삼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당장 이해 못 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가 번뜩 청의인의 말뜻을 깨닫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냥 아무렇게나 말한 거라고?”
“그렇소.”
청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백과 청의인은 앞으로 걸어갔지만 왕이삼은 둘을 따라가지 못한 채 입을 딱 벌리고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갑자기 왕이삼이 멀찍이 가고 있는 청의인의 등에 대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 이런 망할 놈이! 네놈을 내가 그냥 놔둘 줄 아냐? 아니지, 그러고 보니 네놈 이름도 모르고 있었잖아? 낡아빠진 청의 걸친 놈아! 대체 네놈 이름이 뭐냐?”
그러자 청의인이 고개를 스윽 돌리더니 무심하게 한 마디 했다.
“송현이오.”
* * *
제갈세가를 떠난 피난민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무리와 남쪽으로 향하는 무리.
북쪽에 있는 수도에서 망자가 창궐했으니 가능한 한 먼 곳으로 피난 가려는 것이었다.
피난민들은 틈만 나면 서백 일행을 칭송했다.
믿었던 왕씨세가한테 배신당해서 망자 떼에게 포위당했을 상황. 그때 서백 일행이 나서서 피난민들을 안전하게 이끌었으니 고마워하는 게 당연했다.
반면 서백 일행을 질투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피난민들 중에 섞여 있는 무림인들이 그랬다.
청의인 송현이 제갈세가에 맞서서 싸우자고 할 때 나 몰라라 하고 나서지 않았던 삼류 무림인들.
무공이 약하면 약한 대로 살면 그만인데 그런 자들은 자기 능력보다 많은 것을 탐했다.
강자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뒤에서 흉을 보는 자들은 항상 존재하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
융중에서 일주일 거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객잔.
제갈세가를 떠난 삼류 무림인들 세 명은 며칠 밤낮을 헤매다가 간신히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약자한테는 강한 성격답게 그들은 점소이를 보자 큰소리를 쳤다.
“점소이! 여기 백주 가져와!”
“아냐,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양춘면부터 갖고 와라!”
“제대로 국물 낸 거 아니면 네놈 아가리에 그릇째 처박을 줄 알아!”
아무리 점소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쁠 상황.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소이는 무림인들의 무례를 대하고도 씨익 웃으며 비굴하게 구는 것이었다.
“네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이상한 것은 점소이뿐이 아니었다.
객잔 구석구석에 틀어박혀서 술을 마시고 있는 손님들이 고개는 그대로인 채 시선만 돌려서 삼류 무림인들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서백이었다면 엄청난 기척과 시선을 느끼고 긴장했을 터.
하지만 삼류 무림인들은 십여 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객잔이 떠나가도록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꼬마 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건방지기도 하지!”
“지가 무슨 무림명숙이라도 된 것처럼 나서는 거 봤지? 참 나!”
“망자 퇴치를 한답시고 소림사에 간다고? 아주 개나 소나 다 소림사야!”
점소이가 백주와 양춘면을 내오면서 무림인들과 운을 맞췄다.
“어디서 신진고수라도 만나신 모양입니다?”
“신진고수? 헹, 그 꼬마 놈이 신진고수면 이 몸은 절정고수다!”
“그런데 소림사는 무슨 얘긴가요?”
“꼬마 놈이 입만 열면 소림사 타령을 했지. 소림사에 긴히 전할 정보가 있다나?”
“그 정보만 있으면 망자를 퇴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고.”
“에이, 정보 하나로 망자가 퇴치되면 중원은 태평천하가 됐게요?”
“와하하하! 네놈 말이 맞다!”
점소이가 맞장구를 치자 무림인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무림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자신들이 들어간 객잔이 근방의 흑도와 사파 무리가 비밀리에 모이는 악명 높은 흑점(黑店)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객잔에서 무림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손님들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 주는 살수거나 명문정파가 손을 더럽히기 꺼려하는 악행을 대신 해 주는 흑도라는 사실이었다.
손님들, 아니, 살수들은 무림인들의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했다.
-귀중한 정보를 갖고 소림사로 가는 꼬마가 있다고?
그 꼬마를 인질로 잡는다면 엄청난 횡재를 하는 셈이 아닌가!
그런데 살수들 중에서도 몇 명은 더욱 비밀스러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한 달 전. 무림맹의 인물 중 하나가 중원의 흑도 무리에게 정보를 흘렸다.
-사천을 떠나 소림사로 정보를 가지고 오는 자가 있다. 그자를 붙잡아오면 큰 포상을 내리겠다.
즉 몇몇 살수들은 이미 무림인들이 얘기하는 인물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점소이가 백주를 따라주며 살살 꼬드기자 무림인들은 꼬마, 즉 서백의 외모와 행동거지 그리고 함께 다니는 청의인과 도검수에 대한 얘기를 떠들었다.
그때마다 살수들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정보를 이렇게 얻는군!
-이런 홍복이 다 있나!
-융중에서 소림사로 간다고? 곧장 가는 길은 망자 떼로 막혀서 돌아가야 되잖아?
-그럼 놈들이 갈 곳은 하나밖에 없군.
백주가 동이 날 때쯤 무림인들은 알고 있는 정보를 몽땅 누설했다.
곧이어 거나하게 취한 무림인들은 이 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살수들 중 하나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저대로 놔두면 중원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리겠군.”
“그럼 곤란하지. 정보는 희소해야 가치가 있으니까.”
그러자 점소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제가 놈들 입을 막아 드릴깝쇼?”
“좋지.”
팅. 살수가 은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기자 점소이가 받아서 챙겼다.
“근데 네놈 혼자서 괜찮겠냐?”
“걱정 마십쇼. 생선 토막내는 데 손님들이 나설 필요야 있겠습니까.”
점소이가 뒤춤에 꽂아 둔 식칼을 뽑아들며 씨익 웃었다.
점소이가 무림인들의 뒤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가자 처음 말을 꺼냈던 살수가 객잔을 한 번 돌아본 다음 말했다.
“제안 하나 하지.”
“뭐냐?”
“서백이라고 했나? 정해진 날짜까진 그 꼬마 놈은 건드리지 말자. 괜히 미리 나서다가 우리끼리 서로 죽일 필요는 없잖아? 어때?”
“나쁘지 않군.”
“나도 찬성이다.”
살수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얘기가 끝나자 살수들은 하나둘 객잔을 떠났다.
근방의 모든 살수와 흑도 무리가 서백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서백 일행은 융중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융중이 있는 호북은 소림사가 있는 하남과 경계가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 북으로만 가면 최소한 길을 잃을 염려 없이 소림사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장애가 서백 일행의 앞을 막았다.
사실 뜻밖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호북과 하남의 접경지역이 망자 떼 천지였던 것이다.
길을 가던 중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북쪽은 망자 천지이며 한번 발을 들이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북으로 간다고? 거기는 생지옥이오.”
“거기서 간신히 도망쳐 오는 길이오. 그쪽으로는 평생 소변도 안 볼 거요.”
“못 믿겠다면 직접 가 보든가. 망자가 되고 싶다면 말이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진절머리를 내는 걸 보면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 중에 제법 기품 있는 무림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자 역시 같은 얘기를 했다.
“지금 중원에서 망자가 가장 창궐한 곳이 호북과 하남의 접경이오. 여기서 북으로는 한 걸음도 더 가지 마시오. 망자 떼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니까.”
왕이삼이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망자는 우리도 많이 만났소. 망자 떼한테 들키지 않고 우회해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뇨?”
그러나 무림인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본 망자 떼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얼마나 되오?”
“글세. 촉도관에 들이닥친 망자 떼가 수천? 아니, 수만은 됐을 텐데.”
“여기 접경은 수만의 망자 떼가 곳곳에 퍼져 있소. 십여 개? 아니, 수십 개? 그 이상 될지도 모르오.”
“……!”
“소림사로 간다고 했소?”
“그렇소.”
“소림사는 망자 떼에 포위돼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라고 들었소. 괜한 헛수고 말고 목숨이 아까우면 남으로 가시오.”
무림인은 충고를 남긴 뒤 떠났다.
왕이삼이 땅에 침을 뱉으며 불평을 터뜨렸다.
“퉤! 다들 북으로 가지 말라고 짠 거야, 뭐야? 이거 무서워서 어디 소림사 가겠나!”
반면 서백은 여느 때처럼 침착하게 생각했다.
‘소림사행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망자 떼를 돌파하는 것은 무리겠군.’
서백이 청의인 송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송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중원 최초의 대제국 진나라의 수도는 장안이네. 한나라 때 낙양으로 수도가 옮겨졌다가 십상시의 난 때 권력을 움켜쥔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다시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지.”
“그랬었죠.”
“이후 송나라 때 중원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가 개봉으로 바뀌자 장안은 쇠락했지만 중원에서 손꼽히는 고도(古都)라는 점은 변함이 없네.”
“맞습니다.”
둘의 얘기를 듣던 왕이삼은 기가 막혀서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누가 중원의 역사와 지리를 물어봤소? 장안, 낙양, 개봉이 지금 왜 나오는 거요?”
그러자 송현이 예의 무심한 눈길로 왕이삼을 스윽 보더니 말했다.
“낙양과 개봉은 하남에 있소. 장안은 하남은 아니지만 바로 옆에 있지.”
“알고 있소. 중원 사람이라면 세 살배기 어린애도 다 아는 거니까.”
“그럼 그 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겠소?”
“어디로 가긴! 이 난리통에 피난을 가든가 망자가 됐든가 했겠지…….”
왕이삼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럼 접경지역에 있다는 망자들이 설마…….”
“세 도시에서 피난 가지 못한 자들이 모두 망자가 된 것이오. 중원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에서 망자가 창궐했으니 접경지역에 수십만이 넘는 망자 떼가 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하오.”
“……!”
왕이삼은 입을 딱 벌리고 경악했다.
그러다가 다시 무슨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잠깐만. 그럼 소림사는…….”
“그렇소.”
송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사가 있는 곳은 망자가 창궐한 도시들의 한복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