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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46화 (46/123)

46화 청의를 걸친 남자(2)

잠시 후 둘은 객잔에 들어가서 양춘면 두 그릇을 시켜 먹었다.

“어째 국물이 더 싱거워진 것 같습니다.”

“아침에 팔던 국물에다 물을 탔나 보군.”

둘은 불평을 하면서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양춘면을 먹어치웠다.

객잔을 나와서 소화를 시킬 겸 거리 구경을 하는데 곳곳에서 사람들이 왕씨세가를 칭송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수색대가 망자 떼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더군.”

“정말? 왕가 요새에 오길 잘했군.”

“내 말이! 여기선 두 발 뻗고 잘 수 있다니까.”

중앙 천막에서 회의했던 얘기가 빠른 속도로 요새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는 서백과 왕이삼은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아쉬운걸.”

“뭐가 말입니까?”

“무림인이면 문파와 소속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청의인의 조언은 무시하지 않았나.”

“같은 왕씨인데 왕씨세가에서 선배님을 눈여겨보지 않아서 섭섭하신 건 아니고요?”

“뭐 그런 것도 있고.”

서백이 농담했지만 왕이삼은 그답게 흔쾌히 인정했다.

“박대도 우대도 안 하는 게 오히려 낫습니다.”

“왜?”

“괜히 의뢰라도 맡았다간 소림사행이 더 늦어질 테니까요.”

“여정이 느려진 건 다 후배 탓이네.”

“변명은 안 하겠습니다.”

왕이삼이 공격했지만 서백도 흔쾌히 인정했다.

둘은 계속해서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유소운이 없어서 그런지 대화의 정겨움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잘 곳을 찾아 사라졌다. 인파로 복잡하던 거리는 썰물 빠진 것처럼 적막해졌다.

무엇보다 횃불이나 기름불을 밝힌 곳이 없어서 거리는 삽시간에 어두컴컴해졌다.

요새가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때문에 방벽 말고는 횃불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귀신 나올 것처럼 변했군.”

“더 볼 것도 없는데 잠이나 자러 가시죠.”

서백과 왕이삼은 어두운 거리를 걸어서 공동 숙소로 향했다.

천막 안에 들어가자 퀴퀴한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왕이삼이 코를 틀어쥐며 말했다.

“크윽! 이놈의 무림 놈들 목간 좀 하지.”

“선배님도 사천에서 똑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지금은 안 나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장강삼협을 통과하면서 수없이 물에 빠지는 바람에 서백과 왕이삼은 저절로 목간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공동 숙소는 낮에 왔을 때는 텅 비어 있었지만 해가 떨어지자 돗자리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차 있었다.

둘은 간신히 붙어 있는 돗자리 두 개를 찾아냈다.

“조금만 늦었으면 비도 못 피할 뻔했군.”

“그나마 다행이군요.”

둘은 머리맡에 짐을 놓은 뒤 돗자리에 두 발을 뻗고 누웠다.

“그나저나 내일은 뭐 할 계획인가?”

“뭘 하다뇨. 소림사로 출발해야죠.”

“이삼일 더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쩝. 내일 아침 양춘면이나 배터지게 먹어야겠군.”

“동감입니다.”

내일 다시 길을 떠나면 또 언제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잘 자게.”

말을 하자마자 왕이삼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억… 푸우우우…….

웬만한 일에는 눈 깜짝 안 하는 서백도 갑자기 터진 코 고는 소리에 살짝 놀랐다.

대낮에 객잔에서 터졌다면 무림인들이 소림사의 사자후라며 놀랐을 만한 굉음!

‘머리가 바닥에 닿으면 바로 잠이 드는 체질이시군.’

서백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한편, 요새 중앙에 있는 천막에는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왕씨세가 가주 왕충이 긴급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즉 지금 모여 있는 십여 명이 왕가 요새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림인들 앞에는 무사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하고 있었다.

낮에 회의할 때 엉망인 몰골로 달려와서 왕충에게 귓속말을 했던 무사였다.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수천, 아니, 수만일지도 모릅니다.”

“숫자를 세 보았느냐?”

“세 보진 않았지만 들판 전체를 뒤덮고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사의 말에 무림인들은 굳은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낮에는 명망 있는 문사처럼 기품을 지키던 왕충도 양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마치 밤이 되자 가면을 벗어 버린 것처럼.

“이쪽으로 오는 게 사실이냐?”

“네. 처음 발견한 게 삼 일 전입니다. 그런데…….”

무사가 일어서서 무림인들의 중앙에 놓인 탁자로 갔다. 탁자에는 커다란 지도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왕가 요새 근방이 상세히 그려진 지도였다.

무사가 검지로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삼 일 전에 발견한 곳이 여기입니다.”

그러자 탁자 옆에 서 있던 왕씨세가의 총관이 붓을 들어서 무사가 가리킨 곳에 점을 찍었다. 먹이 아니라 피처럼 붉은 염료였다.

“다음날 망자 떼가 이동한 곳이 여기…….”

무사가 두 번째로 가리킨 곳을 총관이 붓으로 붉은 점을 찍었다.

“그리고 오늘 망자 떼가 여기로 이동했습니다.”

총관이 세 번째 붉은 점을 찍었다. 그런 다음 세 개의 점을 이어서 직선을 그었다.

그러자 직선이 계속되는 끝에 왕가 요새가 정확히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게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망자 떼의 이동 방향이 왕가 요새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

“이유는 모르겠지만 망자 떼가 요새로 향하고 있습니다. 수색대의 다른 무사들은 그걸 확인하고자 망자 떼에게 접근했다가 희생…….”

“알았다.”

무사의 말이 길어지자 왕충이 손을 들어 막은 다음 옆에 있는 무림인에게 물었다. 얼굴에 길게 검상이 난 무림인이었다.

“망자 떼가 요새를 돌아갈 가능성은 없소?”

“불가능하오.”

무림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 뒤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동 방향이 암벽에 막힌다면 돌아갈 테지만 이 선은 요새 앞을 지나가고 있소.”

“때를 기다렸다가 절대적으로 침묵을 지킨다면 망자 떼가 모르고 지나칠 수는 없소?”

“가능은 하지. 요새 안의 모든 사람이 쥐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으면. 하지만…….”

“하지만?”

“망자 하나만 산 사람의 낌새를 알아차려도 모두 요새로 발길을 돌릴 것이오. 그 경우 수만 구의 망자 떼에게 요새 입구가 봉쇄될지 모르오”

“…….”

왕충은 고민에 빠졌다.

이전에도 왕가 요새에 망자 떼가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망자 떼의 숫자는 수십 구, 많아야 일이백에 불과했다.

반면 지금 요새로 향하는 망자 떼는 수천수만 구!

그때도 망자 떼를 막아 내느라 인원 피해가 심각했다. 목을 베어도 죽지 않고 덤벼드는 망자한테는 아무리 고강한 무공도 소용없었던 것이다.

방벽은 당시 입은 피해 때문에 곧 무너지려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원 부족으로 보수는 꿈도 못 꾸는 형편.

무림인이 양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요새에서 협곡을 빠져나가는 길은 북쪽과 남쪽 두 갈래요. 만약 남쪽 길을 망자 떼가 막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오.”

그 말에 모든 무림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북쪽은 망자 창궐이 시작된 수도로 향하는 길.

그러니 북쪽으로 피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망자 떼를 피할 수 있는 탈출로는 남쪽 길 하나뿐.

왕충이 무사에게 물었다.

“망자 떼의 속도는?”

“늦어도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요새에 올 겁니다. 아니, 빠르면 오늘 밤이라도…….”

오늘 밤에 망자 떼가 요새가 들이닥친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

왕충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무림인이 재차 입을 열어 조언했다.

“지금 바로 떠납시다.”

“요새는?”

“요새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오.”

“왕가 요새엔 수많은 무림인들과 피난민들이 있소. 그들에게 도망치라고 경고하려면 최소한 내일 아침에…….”

“그러다 오늘 밤에 망자 떼가 요새 앞을 막는다면 왕씨세가가 책임질 것이오?”

“…….”

“말이 나와서 말이지, 요새에 있는 놈들이 어디 무림인이오? 하다못해 빌어먹는 거지들도 개방을 만드는데, 놈들은 왕씨세가에 빌붙어서 행세하려는 삼류 무림인들뿐 아니오?”

그 말에 다른 십여 명의 무림인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씩 했다.

“맞소. 지금 요새에 있는 놈들은 고수는 눈 씻고 봐도 없고 죄다 삼류들뿐이오.”

“저들 중 누구 하나 왕가 요새에 도움을 준 놈이 있었소? 나는 본 적 없군.”

“지금까지 요새가 지켜 줬으니 왕씨세가는 할 일을 다 한 것이오.”

무림인들은 서로 갑론을박을 펼치며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눴다.

왕충은 난처한 표정으로 긴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턱수염 아래에 숨어 있는 입술은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씨익 웃고 있었다.

곧이어 왕충이 무림인들을 향해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좋소. 왕씨세가는 모두의 뜻을 따르겠소.”

* * *

잘 때 누가 업어가도 모를 것처럼 생긴 왕이삼은 의외로 예민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그는 소변 마려운 것을 참지 못했다.

물을 많이 마신 날이면 한밤중에 반드시 일어나서 시원하게 방광을 비워야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어느 순간 왕이삼은 번쩍 두 눈이 뜨였다.

“빌어먹을. 낮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그는 껄끄러운 돗자리에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뒤 공동 숙소를 나갔다.

측간을 찾기 귀찮은 왕이삼은 공동 숙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마침 나무 벽이 나오자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일을 보기 시작했다.

쉬이이이… 히이이잉…….

기분 탓인지 소변 소리에 짐승 울음소리가 섞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저건 말 울음소리인데…….”

뭔가 이상했지만 왕이삼은 정신이 몽롱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바지를 올리는데 소변을 본 곳이 요새 방벽이 아닌가?

나무를 엮어서 세운 방벽은 왕이삼의 소변으로 주위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사들에게 들킨다면 빼도 박도 못하고 망신을 당할 위기!

‘빨리 튀자.’

왕이삼은 얼른 몸을 돌려서 어둠 속에 숨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물자 부족 때문에 횃불을 밝히지 않는다고 하지만 요새 방벽이 어둡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방벽에 횃불을 밝히지 않으면 무사들이 어떻게 경비를 선단 말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내밀던 왕이삼은 방벽을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방벽에는 경비를 서는 무사들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없었던 것이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왕이삼은 좌우로 길게 늘어선 방벽을 훑었다. 틀림없었다. 낮에는 부족한 인원을 최대한 짜 내서 경비를 서던 방벽이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방벽에 설치된 이중문이 두 개 다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중문이 죄다 열려 있다고? 그럼…….’

망자는 어떻게 막고 있는 거지?

그제야 왕이삼은 눈앞의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요새는 망자 떼의 습격에 무방비한 상태라는 것을!

‘큰일이다… 빨리 후배를 불러야…….’

그런데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활짝 열린 이중문에 인영 하나가 기대선 채 왕이삼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사들, 활짝 열려 있는 이중문, 이상하리만큼 적막한 요새 방벽, 그리고 싸늘한 눈빛의 인영까지.

‘귀, 귀신?’

평소 왕이삼은 귀신 얘기를 들을 때 직접 눈으로 안 보면 믿지 않는다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정말 귀신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몸을 돌려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나와서 왕이삼의 어깨를 잡았다.

툭.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왕이삼은 어깨를 잡은 자가 서백인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명을 멈췄다.

“후배! 왜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나!”

“선배님의 귀곡성에 놀란 건 접니다. 그나저나 비명은 왜 지르신 겁니까?”

“저기 귀신이 있어서…….”

“어디요?”

서백이 왕이삼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군. 방금까지 분명 있었는데…….”

“본인 말이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말했다.

바로 이중문에 서 있던 싸늘한 눈빛의 인영이었다.

왕이삼은 다시 한번 요새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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