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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45화 (45/123)

45화 청의를 걸친 남자(1)

왕이삼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씨세가 가주 앞에서 왕가 요새 흉을 본다고? 쫓겨나고 싶어서 환장했군.”

서백도 그 말에 절반은 동의했다.

왕씨세가는 문파와 소속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세상이 어디 뜻대로 흘러가는가?

청의를 걸친 남자는 왕가 요새를 흉보는 한 마디 말을 꺼낸 것으로 무림인들의 공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청의인(靑衣人)을 탓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난리통에 이만한 요새가 어디 있다고?”

“배가 부른 거지. 망자 떼를 만나 봐야 저런 소리가 쑥 들어가는데.”

“망자를 막기에 부적합해? 지가 뭘 안다고!”

무림인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청의인을 봤다.

하지만 궁시렁 대면서도 정작 청의인 앞에 나서서 호통을 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청의인의 분위기가 자뭇 기묘했던 것이다.

그는 강호의 풍상을 오래 겪었는지 얼굴은 깡마르고 신체는 소맷자락 속에 뼈 윤곽이 드러나 보일 만큼 비쩍 말라 있었다.

마치 고목나무에 천을 걸쳐 놓은 것 같은 몰골.

반대로 그의 두 눈은 이상하리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무공을 오래 수련한 무림인 중에는 호랑이처럼 강맹한 안광을 뿜어내는 자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청의인의 눈빛은 한밤중의 호수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내공 고수와도 미묘하게 달랐다.

그의 눈빛은 남을 쏘아보지는 않았으나 남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 정도로 기이한 위력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러니 뒤에서는 궁시렁 대도 누구 하나 청의인 앞에 나서서 반대하지는 못했다.

결국 왕충이 천막 안에 흐르는 기이한 분위기를 깨고자 입을 열었다.

“왕가 요새가 망자를 막기에 부적합하다고 했소?”

“그렇소.”

“이유가 무엇인지 고견을 듣고 싶군.”

그 말에 표정이 굳어 있던 무림인들이 피식 웃으며 얼굴을 폈다.

무림인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혼자 잘난 척하더니 무슨 지적을 하는지 두고 보자!

그런데 무림인들의 예상과 달리 청의인은 입을 열자 청산유수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요새 방벽이 너무 낡았소. 역청을 칠하지 않은 생나무로 급조한 방벽이라 썩은 곳이 많아서 망자 떼가 들이닥치면 쉽게 무너질 것이오.”

“…….”

왕충은 그 말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무림인들은 왕충이 대답을 안 하는 것을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이 요새가 낡았다고? 그럼 어디가 안전한데?

-가주가 대답 안하는 것도 이해 가는군. 저런 억지소리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지!

무림인들은 청의인을 비웃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청의인의 말에 깜짝 놀란 자가 있었다.

바로 왕이삼이었다.

방금 청의인이 한 말은 요새에 처음 왔을 때 서백이 했던 말과 판박이처럼 똑같지 않은가?

왕이삼은 청의인과 서백을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대체 둘이 어떻게 똑같은 말을 하지?’

곧이어 왕충이 입을 열고 대답했다.

“고견 감사하오. 안 그래도 요새 방벽을 보수할 계획이었소.”

무림인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의인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으나 왕충은 왕씨세가 가주답게 기품을 지키며 대답한 것이다. 무림인들은 다시 한번 왕충의 인품을 칭송했다.

그런데 청의인의 지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인원 부족으로 방벽을 지키는 무사도 부족한 것 같은데 어떻게 보수를 한다는 말이오?”

“…….”

“무사들의 복장도 문제가 많소. 면으로 짠 옷 말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를 걸치는 게 좋을 거요.”

그 말에 왕충의 눈치를 보느라 침묵을 지키던 무림인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비바람 막는 피풍의를 무거운 짐승 가죽으로 만들어 입으라고?”

“그걸 입으면 무거워서 망자한테 도망이나 치겠냐?”

“와하하하!”

반면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재차 놀랐다.

망자에게 물릴 때를 대비해서 짐승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를 걸치고 다니는 무림인.

바로 자신의 동행인 서백이 아닌가!

사천에서 의혈방도들이 비웃을 때도 왕이삼은 서백의 용의주도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서백의 망자 대비법을 청의인이 입 밖에 꺼낸 것이다.

왕이삼은 이제 해괴한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둘이 아는 사이인 거 아냐?’

왕이삼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귓속말로 물었다.

“후배, 저 청의인과 무슨 사이냐?”

“생전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서백의 대답은 평소처럼 무심했다.

무심하기로는 청의인도 만만치 않았다.

천막 안의 모든 무림인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왕가 요새의 결함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지금까지 수색대가 본 것은 망자가 아니라 혈귀에 불과하오.”

“혈귀?”

“그렇소. 망자와 혈귀는 같으면서도 분명 다르오.”

그 말에 웃음소리가 싹 사라졌다.

처음 들어 보는 청의인의 얘기가 왕충은 물론 무림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혈귀는 혼백이 없어서 산 사람을 보면 무작정 덤비지. 그러나 진짜 망자는 산 사람과 겉으로 봐서는 구분할 수 없소.”

“망자는 썩은 시체가 아닌가? 산 사람과 구분이 안 되는 망자가 있다고?”

“있소. 자신이 망자인 것을 숨기고 요새에 숨어 있는 망자가 있을지도 모르오. 요새 밖을 정찰하는 수색대 말고 요새 안도 망자 색출에 신경 써야 하오.”

그 말에 무림인들은 다시 한번 술렁였다.

먼저는 청의인을 비웃느라 그랬다면 지금은 그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자네, 저 얘기 들어 본 적 있나?”

“아니, 자네는?”

“나도 들어 본 적 없네.”

잠시 어리둥절하던 무림인들은 곧 충격에서 빠져나와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만큼 청의인의 말은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망자가 산 사람과 구분이 안 된다고?”

“망자가 아니라 강시를 착각한 것 아냐?”

“뭔 소리냐? 강시도 얼굴이 푸르뎅뎅해서 척 보면 알 수 있다. 네놈처럼 말이다!”

“와하하하!”

무림인들은 시끌벅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충이 손을 들어서 웃음을 멈추게 한 뒤 긴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자신하면 증거라도 보여 주시오.”

그 말에 무림인들은 소리 죽여서 비웃는 동시에 왕충의 자비로운 처사를 칭송했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소리라도 왕씨세가는 끝까지 경청하겠다는 태도가 아닌가!

그런데 미소를 머금고 있던 무림인들이 무엇을 봤는지 얼굴에서 웃음이 싹 지워졌다.

청의인의 눈빛이 기분 탓인지 무섭게 번쩍거렸던 것이다.

그 눈빛을 본 무림인들은 등줄기가 서늘하며 오금이 저렸다.

마치 어두운 산속에서 호랑이와 마주쳤을 때와 같은 느낌!

아니나 다를까 단상 위의 무림인들도 자기도 모르게 검잡이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청의인의 눈빛을 살기로 여기고 왕충을 호위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천막 안에 살얼음판처럼 긴장감이 감돌 때 청의인이 입을 열었다.

“증거는 있지만 보여 줄 수는 없소.”

눈빛과 달리 어딘가 무심하게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잔뜩 굳어 있던 무림인들은 긴장이 풀려서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변명이 저래? 증거가 있는데 보여 줄 수는 없다니?”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우리 집에 천하제일 무공비급 있다!”

“와하하하!”

지금까지 예의를 지키던 왕충도 피식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왕가 요새를 걱정해 주는 마음은 잘 알겠소. 요새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라고 명하지.”

“…….”

청의인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침묵했다.

그런데 무림인들이 청의인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지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천막 밖에서 무사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가주님…….”

왕충을 가주라고 부르는 걸 보면 왕씨세가의 무사인 듯했다.

무사는 바닥을 뒹굴었는지 전신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허리춤에는 도검 한 자루 없었다. 무림인이 도검을 갖고 다니지 않을 리 없으니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것이리라.

마치 전쟁터에서 간신히 죽을 위기를 탈출한 전령 같은 모습.

“수색대는 어찌 되었느냐?”

왕충이 묻자 무사는 재빨리 좌우를 훑어보더니 왕충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무사가 보고를 끝내자 왕충은 여유롭게 턱수염을 만지면서 무림인들에게 말했다.

“수색대가 망자 떼를 발견했으나 왕가 요새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하니 안심해도 좋소.”

“와아아아!”

무림인들 사이에서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일 회의는 오늘처럼 신시에 하겠소. 그럼.”

“왕씨세가 천세!”

왕충이 해산령을 내리자 무림인들은 하나둘 천막을 나갔다. 그러면서 왕충과 왕씨세가를 칭송하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서백은 놓치지 않았다.

수색대 무사가 귓속말을 할 때 왕충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던 것을.

‘무사가 어떤 보고를 했을까?’

서백이 고민하고 있을 때 왕이삼이 말을 걸었다.

“왕씨세가 가주는 무림인이 아니라 품격 있는 무사 같군.”

“선배님이야말로 무림인다우시죠.”

“흐흐, 칭찬으로 듣겠네.”

그런데 왕이삼이 슬쩍 눈치를 보면서 귓속말을 했다.

“저 청의인 말야. 후배만큼 망자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 않아? 대체 어떤 놈이지?”

“저도 모릅니다. 직접 물어보시죠.”

“뭐? 나는 낯을 가려서 좀…….”

서백은 무심코 피식 웃었다.

어느 사람이든 쉽게 말을 걸고 접근하는 왕이삼이 낯을 가린다는 핑계를 댈 정도로 청의인은 확실히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다.

“왕충이 품격 있는 문사라면 청의인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둠의 책사 같잖아? 병사들이 죽든 말든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작전 펼치는 놈들 말야.”

“삼국연의 꽤나 읽으셨군요.”

서백은 왕이삼의 말을 웃어넘겼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지적이 상당히 그럴싸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책사.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는 청의인을 제대로 묘사한 말이었다.

서백도 청의인과 얘기를 해서 손해 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가 말을 걸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후배한테 양보하지.”

왕이삼은 그답게 자연스레 발뺌을 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던 왕이삼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엥? 없잖아?”

방금까지 천막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있던 청의인이 어디로 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쳇. 이상한 놈답게 없어지는 것도 기분 나쁘군.”

서백과 왕이삼은 무림인들 틈에 섞여서 천막을 나왔다.

“회의가 끝나서 그런가? 배가 출출하군.”

“뱃속에 개방 방도라도 들어 계신가 봅니다.”

“국물은 싱겁지만 양춘면이라도 한 그릇 더 먹으면 좋겠는데 돈이, 아니, 줄 물건이 없군.”

“하나 있긴 합니다.”

“뭐? 설마 그 대검을 국수랑 바꾸려는 건 아니겠지? 내 박도는 어림없네.”

“실은 멧돼지 가죽이 몇 개 더 있습니다.”

서백은 멧돼지 가죽을 벗길 때 왼쪽과 오른쪽, 또 등과 배 부분의 가죽을 따로 나눠서 네 부분으로 벗겨 놓았던 것이다.

“역시 후배는 용의주도하군! 얼른 가서 양춘면이나 한 그릇 더 먹자고!”

왕이삼이 신바람을 내며 앞장을 섰다.

그런데 서백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천막 안에 있던 청의인이었다.

‘고수다.’

천막 안에는 일이백 명 가량 되는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누구도 서백의 눈을 피해 기척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서백 역시 청의인이 사라지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은 청의인의 내공 수위가 서백과 동등하다는 뜻. 아니, 오히려 서백을 능가하는 수준일지도!

‘석가심결을 운용했어도 청의인을 놓쳤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석가심결을 운용했다면 천막 안에서 바늘 떨어지는 것도 감지했을 만큼 감각이 예민했을 테니까.

하지만 서백은 과연 청의인의 운신을 알아차렸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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