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추격대의 비밀(6)
딱딱딱딱.
천리형의 이빨이 심하게 부딪쳤다.
먼저 자충이 망자가 된 공포심에 이를 부딪쳤다면 지금 천리형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빙공이 그의 전신을 급속도로 얼어붙이고 있기 때문에 극한의 한기를 느꼈던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천리형은 땅을 박차며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빙공 진기 때문에 전신의 혈맥이 굳어 버린 것.
게다가 천리형의 쌍장은 강한 아교를 바른 것처럼 서백의 쌍장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점혈당한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지경.
천리형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건 서장의 빙공이 틀림없…….”
“또 서장 타령입니까? 저는 그저 석가심결의 내공진기를 쌍장에 조금 실은 것뿐입니다.”
서백의 대답에 천리형은 속으로 일갈했다.
-거짓말!
조금이라고? 빙공진기가 해일처럼 밀려와서 전신의 혈맥을 얼려 버리고 있는데 조금이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애간장이 타는 천리형과 달리 서백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아니, 무심한 것을 넘어서 하품을 참는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이 무척 따분하다는 표정.
천리형은 그제야 깨달았다. 서백은 자신은 이름 석자 내밀지 못할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제발 자비를…….”
“자비?”
“목숨만은 살려 주게…….”
한 지역을 지배하는 방파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남한테 고개를 숙여 본 적 없는 천리형.
그가 지금 약관도 안 된 소년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만약 철장방도 중의 한 명이 봤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놀랄 만한 장면!
“이제 당신은 단전이 얼어붙고 파괴돼서 평생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이 될 겁니다.”
“…….”
“그러니 제 동료들을 괴롭힌 복수는 이쯤 하는 걸로 하죠.”
“고, 고맙다…….”
흐읍. 서백이 숨을 토하며 쌍장을 회수했다.
짝. 지남철처럼 딱 붙어 있던 둘의 쌍장이 그제야 박수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털퍽. 해일처럼 밀려오던 내공진기가 사라지자 천리형은 전신의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전신의 혈맥이 빙공내기에 얼음처럼 굳어 버린 것이다.
서백은 천리형의 품을 뒤져서 철장방의 비급과 신물을 회수한 다음 말했다.
“혈귀는 많이 베어 봤으니 진짜 망자와 무공을 겨뤄보고 싶었습니다. 한데 별것 아니군요.”
“네놈… 망자와 싸우려고 일부러 나를…….”
“이제야 아셨습니까?”
그런데 천리형이 기겁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서백이 몸을 돌리더니 땅에 박아둔 검을 뽑아드는 것이 아닌가?
“잠깐… 방금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냐?”
“동료들의 복수가 충분하다고 했지 살려 드린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날 속였군!”
그 말에 서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형편없는 약자를 왜 속입니까? 빨리 죽여 드려도 모자랄 판에.”
“……!”
서백이 자신의 몸만큼 큰 대검을 들고 걸어오자 천리형은 공포에 질려서 두 눈이 시뻘겋게 핏줄이 섰다.
“내 비록 망자가 됐지만 중원에 나오지 않고 평생 숨어서 살겠다… 그러니 제발…….”
“망자 말을 믿으라고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약속하마… 반드시 지키겠으니 제발…….”
“안녕히 가십시오.”
“제바아알… 안 돼애애……!”
천리형이 경악하며 소리칠 때 질풍이 불어서 그의 머리카락을 사시나무처럼 휘날렸다.
휘이이잉.
다음 순간 무언가 뾰족한 금속으로 바윗덩이를 긁은 것처럼 불쾌한 소리가 터졌다.
까가가각.
서백의 검이 천리형의 목을 베어 버리는 소리였다.
사람 목인데 금속음이 터진 검성(劍聲).
엄청난 빙공의 위력이 천리형의 목을 진짜 얼음처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천리형의 시야에서 하늘과 땅이 옆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곧이어 천리형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철퍼덕.
아버지인 방주까지 죽음으로 내몰고 망자가 되어서 철장방은 물론 중원 무림의 패권을 노리던 천리형.
평생을 야심만만하게 살아 온 그가 약관도 안 된 소년의 검에 허무하게 죽는 순간이었다.
“이제 끝났군.”
서백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천리형의 목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볼 수 있도록 검으로 망자의 목을 굴렸다.
방금 서백은 혈선충의 심맥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천리형의 목 아래쪽을 베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덜미 깊숙한 곳에 희끄무레한 거머리 같은 것이 파고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사람을 망자로 만드는 실체, 혈선충의 심맥!
서백은 검자루에 턱을 괸 채 조용히 혈선충의 심맥을 쳐다봤다. 마치 아이가 벌레를 구경하는 것처럼.
어느새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서백은 검을 들어 혈선충을 쿡쿡 찔러봤다.
혈선충은 반응하긴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얼어붙어서 동사(凍死)한 것이었다.
“성공했습니다, 스승님.”
서백은 석가심결의 빙공 수법이 성공한 것을 스승에게 알리듯이 중얼거렸다.
이제 망자와 싸울 비장의 수법이 하나 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빙공이 통하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했다.
일단 상대의 신체에 내공진기를 흘려보낼 기회가 있어야 한다.
혈선충의 심맥을 얼리려면 상대를 점혈하거나 장법을 펼쳐서 내공 공격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리형과 싸울 때처럼 서로 손바닥을 붙이고 내공 대결을 펼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제아무리 내공이 심후한 고수라도 일단 빙공 진기가 체내에 들어가면 혈맥이 얼어붙어서 내공 운용이 힘들어질 것이다.
물론 빙공이 천하무적은 아니었다. 상대하는 망자가 빙공 진기를 밀어낼 만큼 서백을 훨씬 능가하는 내공의 소유자라면?
혈선충의 심맥을 얼리기 전에 서백의 단전이 파괴돼서 먼저 쓰러지고 말 터!
또한 망자가 아닌 혈귀들, 즉 수많은 망자 떼를 상대할 때도 빙공은 그다지 쓸모가 없을 게 뻔했다.
빙공을 쓰려면 석가심결을 극성까지 끌어올려야 가능하다. 망자 떼를 상대로 빙공을 쓴다면 내공진기가 삽시간에 바닥날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할까.
어차피 망자 떼는 그냥 검으로 썰어 버리는 편이 나았다.
빙공은 진짜 망자, 즉 천리형 같이 망자가 된 무공 고수를 상대할 때를 위해 비밀로 숨겨 두는 편이 좋으리라.
서백은 스승이 강조하던 말을 떠올렸다.
-현재 명문정파에서 석가심결에 맞설 수 있는 내가무공의 고수는 모두 여섯 명이다.
스승은 여섯 명의 문파와 별호, 이름을 말했다.
-소림사 방장 무혜.
-무당파 일대제자 진하군.
-화산파 장로 명월자.
-곤륜파 수석장로 청허진인.
-아미파 장문인 정수사태.
-제갈세가 일공자 제갈성.
스승은 여섯 명을 열거한 뒤 다음 말을 덧붙였다.
-무림은 은거 고수가 즐비한 곳이다. 외부에 알려진 고수가 하나라면 사람들이 모르는 고수가 그 두 배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스승의 말대로라면 현 중원 무림에 알려진 고수 외에도 서백만 한 내공을 지닌 은거 고수가 족히 열두 명은 더 있다는 뜻!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고 추측에 불과했다.
어쨌든 최소 열 명은 석가심결과 맞먹는 내공 고수가 존재한다는 얘기였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 중 누군가 망자가 되었다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말고 빙공으로 목숨을 끊어라!
매서운 서릿발 같은 스승의 호령.
중원 무림은 빙공을 금지했으며 만약 쓰는 문파가 나올 경우 멸문시킨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스승은 망자를 상대할 때는 무림의 법도를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강조했다.
무림의 법도는 물론 강호의 정리조차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중원 땅에 들어서자마자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빙공이 망자에게 통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만만찮은 무공인 철장비뢰공을 석가심결이 압도했다는 점!
그 두 가지를 안 것만으로도 철장산 근처까지 오느라 시간을 들인 가치가 있었다.
서백은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천리형과 철장방도들의 목을 보며 말했다.
“제법 도움이 됐으니 장례는 치러 주지.”
천리형의 목은 얼어붙어서 숨졌지만 자충과 방도의 목은 혈선충 다발을 문어발처럼 뻗어서 몸통으로 기어가는 중이었다.
서백이 다가가자 목들이 두 눈알을 뒤집으며 괴성을 토했다.
케에에엑!
서백은 검으로 목을 찍어서 망자들이 입을 다물게 했다. 이어서 천리형과 방도들의 목과 몸통을 한군데로 모았다.
그런 다음 기름을 뿌리고 화섭자로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꾸웨에엑…….
불에 거머리를 넣으면 몸통이 뒤틀리고 오그라들며 죽는다. 망자들의 목에서 나온 혈선충도 똑같은 모습으로 꿈틀대며 죽어 갔다.
곧이어 망자들은 새까만 숯덩어리가 되었다.
망자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서백은 횅하니 몸을 돌려서 자리를 떠났다.
* * *
유소운과 왕이삼은 철장방의 눈에 띄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쉬고 있었다.
왕이삼이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서백 녀석, 괜찮을까?”
“괜찮을걸. 아직도 녀석을 못 믿소?”
왕이삼과 달리 유소운은 아무 걱정 없이 태연한 말투였다.
“그래도 저쪽은 쪽수가 여덟이나 되는데…….”
“무림에서는 쪽수가 중요하지 않소. 여덟을 합친 것보다 하나가 강하다면 그뿐이지.”
그러자 함께 있는 손일서도 한 마디 했다.
“맞소! 그 형은 무공이 뛰어나니 철장방을 욕보인 자들쯤은 문제없을 것이오!”
손일서의 말을 듣자 유소운은 슬쩍 웃음이 나왔다.
어리지만 당찬 손일서. 유년 시절 유약하기만 하던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훗날 좋은 방주가 되리라.
젊은 연인, 양산과 축영도 그런 손일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유소운이 무슨 기척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유붕자원방래 불역열호로군(有朋自遠方來 不亦說乎).”
“유붕… 그건 또 무슨 흰소리냐?”
“논어다. 친우가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란 뜻이지.”
“허구한날 문자 타령이군.”
“아니, 저기 막 친우가 도착했는데?”
유소운이 검지로 뒤를 가리켰다.
유소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왕이삼이 고개를 돌리자 숲속에서 서백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왕이삼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너 이 녀석! 왜 이제야 오는 거냐?”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걱정되게…….”
그런데 서백이 왕이삼을 그냥 놔두고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뻘쭘해진 왕이삼은 말을 삼키고 멍하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서백은 유소운 앞에 멈춰서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꼴 좋군요. 저 하나 없다고 그런 놈들한테 당하셨습니까?”
서백 말대로 유소운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천리형 일당이 암습했을 때 그나마 제대로 대항했던 자는 유소운이 유일했다. 왕이삼과 양산은 방도들이 등 뒤에서 검을 들이대는 바람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두 손을 들었던 것이다.
유소운은 여섯 명을 상대로 우위를 빼앗기지 않았으나 인질이 잡힌 상황이니 결국 항복해야 했다.
천리형 일당은 본보기 삼아서 저항이 거칠었던 유소운에게 몰매를 퍼부었다.
때문에 지금 유소운의 얼굴은 곳곳에 피멍이 시퍼렇게 들고 공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유소운이 그답게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쪽은 쪽수가 여덟이었다고.”
“그래봤자 네 배밖에 더 되지 않습니까?”
유소운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으나 서백의 추궁은 얼음처럼 차디찼다.
“그 잘난 활 솜씨는 국 끓여 드신 겁니까?”
보다 못한 왕이삼이 끼어들어서 서백을 말렸다.
“저기 서백 후배, 활 쏠 시간도 없었어. 나랑 철장방 무사가 인질로 잡혀서 말야.”
항상 개와 고양이처럼 말다툼을 하던 왕이삼이 유소운을 편들어 주는 장면은 평소라면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러나 서백은 냉랭하게 말했다.
“이래서야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 후배는 두 분에게 실망했습니다.”
말을 마친 서백은 횅하니 고개를 돌렸다.
왕이삼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입만 뻐끔뻐끔 벌리고 있는 반면, 유소운은 그런 서백의 등을 바라보며 아픈 입꼬리를 올려서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