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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6화 (16/123)

16화 촉도관의 풍파(2)

정수사태가 서백 일행 세 명과 한 번씩 눈빛을 마주친 뒤 말했다.

“지금 병력으로는 망자 떼로부터 촉도관을 지킬 수 없소.”

수백 명의 병사 대 수만 명의 망자 떼.

일당백의 싸움.

그런데 상대는 도검을 맞아도 죽지 않고 덤벼드는 시체들이니…….

정수사태의 말이 아니라도 벌판을 가득 메운 망자 떼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빈니가 세운 대책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소.”

정수사태가 몸을 돌려 전각을 내려갔다.

서백 일행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할 거냐?”

“일단 얘기부터 들어 보죠.”

일행은 정수사태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마당 한쪽에 있는 천막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천막은 북쪽 새외의 유목민들 것처럼 큼지막해서 사람 십여 명이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천막 입구에는 아미파 제자 둘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정수사태를 따라 천막에 들어서는 순간, 서백은 재빨리 천막 안의 상황을 살폈다.

중앙에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무림인들이 여섯 명, 오른쪽에는 녹의(綠衣)를 걸친 검객이 세 명 있었다.

무림인들 여섯은 사천당문에서 선두에 출발한 자들이었다. 반면 녹의인 셋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벽면에는 촉도관의 옥건(玉鍵)이 걸려 있었다.

옥으로 만든 열쇠인 옥건은 중원의 관문마다 있는 것으로, 관문 지휘자가 황제에게 받는 증표였다.

즉 무림맹의 신물인 무림패와 같은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녹의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인이 서백 일행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한낱 삼류 무림인들한테 손을 벌리다니, 사천의 수치로군.”

그는 짐짓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지만 목소리가 작지 않아서 천막 안의 인물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서백은 중년인의 말을 듣고 녹의인 세 명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청성파군.’

사천에는 내로라하는 명문정파가 세 곳 있다.

사천당문, 아미파, 청성파.

아미파는 불문에 속하기 때문에 타 문파의 무림인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반면 사천당문과 청성파는 소위 명문정파들이 그러듯이 콧대가 높고 오만했다.

사천의 수치.

사천당문이나 청성파가 할 법한 말.

무림인들을 고용해서 마차를 보낸 사천당문이 굳이 촉도관에 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청성파뿐.

서백이 녹의인들을 청성파로 짐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수사태가 말했다.

“여기 세 분은 청성파 장로인 무허자와 제자들이오. 이쪽은 사천당문의 마차를 촉도관으로 운송해 온 무림인들이오.”

정수사태가 양쪽을 소개하자 무림인들은 형식적으로나마 포권지례를 올렸지만 무허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대놓고 무시했다.

정수사태는 무허자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망자 떼가 촉도관을 돌파하면 사천에 망자가 창궐할 것이오. 아미파는 망자 척결을 위해 작전을 세웠소.”

그녀가 탁자로 가서 지도를 펼쳤다.

“아미파의 작전은 이것이오.”

무림인들은 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지도에 시선을 집중했다. 심드렁하던 무허자도 헛기침을 하더니 탁자 옆으로 왔다.

지도는 촉도관의 주변 지형을 그린 것이었다.

“알다시피 촉도관은 정면에 있는 길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요.”

정수사태가 지도 중앙에 수직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만 막으면 당분간 망자 떼를 막을 수 있소.”

그 말에 무허자가 반문하며 끼어들었다.

“고작 아미파 수십 명과 병사 수백 명이 무슨 수로 수만의 망자 떼를 막겠다는 건가?”

“무공이 아니라 병법을 쓸 것이오.”

“병법?”

“이번 작전에 사천당문이 폭약을 제공했소.”

“……!”

무허자를 비롯한 몇몇 무림인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서백 일행도 침을 삼키며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막상 얘기를 들으니 놀라웠던 것이다.

“현재 폭약을 실은 마차는 모두 일곱 대요. 일곱 대의 마차를 세 곳에 배치할 생각이오.”

정수사태가 검지를 들어 지도 세 군데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본성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각각 양옆의 암벽과 중앙의 외길 부분.

“먼저 피 냄새로 망자들을 최대한 끌어들인 뒤 좌우에서 암벽을 무너뜨려 움직임을 봉쇄할 것이오. 그다음 중앙에서 마차를 폭발시켜서 처치하는 거요.”

“망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게 가능할까?”

무허자가 끼어들며 물었다. 심드렁하던 그도 어느새 정수사태의 얘기에 빠져든 것이었다.

“암벽이 무너져서 뒤가 막힌 망자 떼에게 기름을 붓고 화공을 펼치면 가능할 거라 생각하오.”

“……!”

정수사태의 말에 무림인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암벽이 좌우로 길게 뻗은 촉도관의 지형상, 폭발로 뒤가 막히면 갈 곳이 없다.

거기에 불화살을 쏟아붓는다면?

망자 떼를 척결하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

“여러분이 할 일은 폭파 위치로 마차를 운송하는 것이오.”

그 말에 들떴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가라앉았다

촉도관 밖의 벌판에 수만의 망자 떼가 들끓고 있는데 무슨 수로 마차를 끌고 간다는 말인가?

무허자가 지도를 가리키며 반문했다.

“촉도관을 나가서 저기에 마차를 두고 오라고? 쥐새끼더러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는 소리군!”

그의 말은 아미파의 무리한 작전을 비웃는 것과 동시에 무명 무림인들을 쥐새끼에 비유하며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수사태의 다음 말에 무허자는 할 말을 잃었다.

“망자들에게 들키지 않을 방법이 있소.”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촉도관 지하에 밖으로 나가는 비밀통로가 있소.”

“……!”

모든 성채와 관문에 탈출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촉도관이 건설될 당시 중원 무림을 대표해서 참가한 문파가 바로 아미파였다. 이후 촉도관 비밀통로의 존재는 아미파 장문인이 차기 장문인에게 구전으로 전하고 있었다.

정수사태는 금기를 깨뜨리고 비밀을 공개한 것이었다.

그만큼 사태가 위급하다는 판단!

“비밀통로를 빠져나가면 이곳으로 나가게 되오. 거기에 낡은 관제묘가 하나 있소.”

정수사태가 지도 한 곳을 가리켰다.

“피 냄새로 망자 떼를 끌어들일 테니, 당신들은 망자 떼의 뒤쪽으로 나가는 셈이오.”

“…….”

“그러니 망자 떼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오. 마차를 두고 바로 귀환하면 되오.”

아미파의 비밀을 공개해서 명분을 챙긴 정수사태.

게다가 망자 떼를 피할 수 있도록 조치해서 실리까지 챙겼으니, 무림인들로서는 더 이상 반대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청성파 장문인 무생자께서 이번 일로 청성파의 최고 고수 세 명을 친히 선별했다고 말씀하셨소. 청성파가 마차 세 대를 중앙 외길로 가져가 주시오.”

정수사태가 합장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무허자는 입을 다물고 침음했다.

청성파 장문인이 친히 추천했다는 말.

이제 청성파의 장로인 무허자는 아무리 싫어도 거절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다른 분들은 두 개 조로 나뉘어서 마차를 옮겨 주시오. 작전은 오늘 밤 자정에 시작하겠소. 아미파 제자가 임시 처소로 안내해 드릴 것이오.”

정수사태는 반박할 여지를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회의를 끝냈다.

무허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포권지례를 한 뒤 몸을 돌렸다. 다른 무림인들도 하나씩 천막을 나갔다.

그런데 정수사태가 서백 일행을 불러 세웠다.

“세 분은 잠시 남아 주시오.”

무림인들이 모두 나가자 정수사태가 제자에게 말했다.

“가져오너라.”

제자가 가져온 것은 비단으로 짠 붉은 주머니였다.

정수사태가 주머니를 탁자에 기울이자 은원보 여덟 개가 나왔다.

“사천당문이 약조한 보수요. 미리 도착한 다른 분들께는 이미 지급을 끝냈소.”

“감사합니다.”

서백 일행은 정수사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왕이삼이 은원보를 챙겨서 혁낭에 넣을 때, 서백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한 가지. 저희 셋은 아직 아미파의 일을 맡겠다고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

그 말에 정수사태보다 왕이삼이 더욱 놀랐다. 화들짝 놀란 왕이삼은 하마터면 은원보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아미파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소?”

“보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번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정수사태의 부드러운 눈빛이 어느새 날카롭게 안광을 번뜩였다.

잔뼈가 굵은 왕이삼도 움찔할 만한 기백!

그러나 서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저는 촉도관을 넘어 중원으로 갈 계획입니다. 여기 두 분도 마찬가지고요. 안 그렇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

서백이 고개를 돌리자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암벽을 폭파하면 촉도관에서 나가는 길이 막힙니다. 망자 떼를 피 냄새로 유인할 것이니 망자를 피해서 지나갈 가능성은 아예 사라지겠죠. 길이 막히기 전에 저는 당장에라도 떠나야 됩니다.”

서백의 입장은 분명했다.

그러자 정수사태가 다시 한번 설득했다.

“병사 수백 명이 있지만 지휘관이 도망치는 바람에 언제 오합지졸이 될지 몰라서 아미파 인원을 뺄 수 없는 상황이오. 이건 중원 무림의 안위가 걸린 일이오.”

“저도 중원 무림의 안위를 위해 중원으로 가야 합니다.”

서백의 대답이 말대꾸처럼 여겨졌는지 정수사태의 눈빛이 비수를 품은 듯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서백의 해명에 그녀의 눈빛이 풀렸다.

“저는 스승님의 서책을 소림사에 전해야 됩니다. 이 역시 망자 퇴치를 위해서입니다.”

“소림사라…….”

곧이어 정수사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무엇입니까?”

“촉도관의 뒤를 돌아 북쪽으로 가면 장강삼협의 상류가 나오는데 아미파가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둔 배가 한 척 있소. 그 배를 내어 주겠소.”

“……!”

장강삼협(長江三峽)은 사천에서 중원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로였다.

그러나 장강삼협으로 사천에 드나드는 자는 드물었다. 장강삼협의 상류는 폭이 좁고 물살이 거세서 웬만한 배는 버티지 못하고 뒤집히거나 난파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정수사태도 그걸 아는지 덧붙였다.

“튼튼한 배요. 장강삼협을 내려가는 데 문제없을 것이오.”

서백은 정수사태의 제안을 따져 봤다.

‘아미파가 준비한 배라면 믿을 수 있겠지.’

촉도관 밖의 벌판은 이미 망자 떼로 뒤덮였다. 설령 말을 타더라도 돌파가 쉽지 않은 상황

‘그에 반해 배를 타고 장강삼협을 통과하면 바로 중원 땅이 나온다.’

미리 생각해 둔 여정과는 다르지만 오히려 더 빨리 중원에 도착하게 되는 셈.

“좋습니다. 다른 두 분은 어떠십니까?”

“나? 나야 좋지. 아니, 저도 좋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왕이삼과 유소운도 서백의 뜻에 동의했다.

“아미타불. 시주들에게 감사드리오. 그럼 오늘 밤 자시에 작전을 시행할 터이니 이곳으로 오시오.”

정수사태가 합장을 하며 말했다.

서백 일행이 천막을 나오자 아미파 제자가 처소로 안내했다.

“그럼 쉬십시오.”

아미파 제자가 떠나려고 할 때 서백이 물었다.

“먼저 도착한 무림인 여섯 명 말고 또 온 자는 없습니까?”

“없는데요.”

짐작대로였다. 잔도가 폭발하자 구덩이 쪽으로 가겠다며 돌아간 세 명의 무림인. 촉도관에 오지 않은 세 무림인은 그대로 도망쳤으리라.

아미파 제자가 돌아가자 왕이삼이 서백에게 불평했다.

“다음부터 흥정할 때는 미리 좀 말해라! 아미파 장문인 말에 반대할 때 심장이 콩알만 해지는 줄 알았다!”

“알겠습니다.”

서백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사천당문과 아미파가 손을 잡는 날이 다 오는군.”

유소운의 말에 서백과 왕이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문과 아미파가 개와 고양이처럼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중원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왕이삼이 재차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 좋은데 왜 하필 또 자시야? 꼭 잠 잘 시간에 일을 하라고 하네.”

“하루 중에 자시가 가장 어두우니 작전을 펼치기에 좋죠.”

“무림 놈들은 잠도 안 자나? 에휴.”

셋은 처소에서 여장을 풀고 쉬었다.

아미파 제자가 가져온 저녁은 소박했다. 막 지은 뜨거운 밥에 간장에 조린 무 반찬이 전부.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셋은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배불리 밥을 먹었다.

자시가 되기 반 시진 전.

아미파 제자가 불러서 서백 일행은 정수사태의 천막으로 갔다. 곧이어 사천당문의 일을 맡았던 무림인 여섯 명과 청성파도 천막에 도착했다.

“모두 도착했으니 계획을 설명하겠소.”

정수사태가 천막 한 쪽에 쌓여 있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이 옮길 마차마다 저걸 실을 것이오.”

그녀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 작전은 시간제한이 있소. 정해진 시간에 늦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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