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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5화 (15/123)

15화 촉도관의 풍파(1)

현재 일행은 서백, 왕이삼, 유소운으로 모두 세 명.

반면 마차는 네 대가 되었다.

왕이삼은 마차들을 쳐다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차가 네 대로 늘었군. 죽을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어.”

“죽을 고생이 아니라 진짜 죽을 뻔하셨습니다.”

“그게 그거지. 어쨌든 안 죽었으면 됐잖아?”

그러다가 왕이삼은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마차가 네 대면 보수를 어떻게 나누지? 마차 네 대니까 은이 사백 냥이란 소린데.”

“일단 백 냥씩 나누고 그다음으로 삼십삼 냥씩 나누죠.”

“그럼 은 한 냥이 남는데?”

“대단한 발견 하셨습니다.”

“어떡하지? 한 냥을 세 조각으로 잘라야 하나? 은자는 대장간에 가져가도 정확히 나누기 힘들 텐데…….”

그 말에 서백과 유소운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 냥 선배님 드리겠습니다.”

“한 냥 그냥 당신이 가지시오.”

“정말? 다들 고맙네! 그럼 내 몫은 은 백삼십삼 냥에다 한 냥 더 보태서 백삼십사 냥이 되겠군!”

왕이삼이 신바람을 내자 서백과 유소운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런데 이 많은 폭약을 뭐하는 데 쓰려고 옮기는 걸까?”

그 말에 서백과 유소운도 마차들을 돌아봤다.

폭약이 가득 담긴 궤짝이 여덟 개씩 실려 있는 마차.

폭약의 위력은 대단했다. 숲길에서는 하늘 높이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며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서 길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나마 잔도는 사방이 암벽이라서 길이 끊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로 바윗덩이가 무너지는 바람에 무림인 하나가 죽고 왕이삼도 목숨을 잃을 뻔했다.

서백은 마차를 보며 생각했다.

‘마차 하나만 있어도 석가장은 통째로 날려 버릴 위력이다.’

그때 유소운이 입을 열었다.

“망자를 막기 위해서일 거요.”

“망자를? 왜?”

“촉도관을 넘을 때 봤소. 중원 쪽에서 촉도관을 향해 망자떼가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는 것을.”

그 말에 서백과 왕이삼은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전쟁터에서나 쓰일 법한 분량의 폭약.

그 말은 촉도관이 망자떼 때문에 전쟁 상황이나 마찬가지란 소리가 아닌가?

이어서 유소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덧붙였다.

“저건 아마도 벽력탄을 제조할 때 쓰는 폭약인 것 같소.”

“산서 벽력당의 벽력탄 말이냐?”

“그렇소.”

벽력탄은 한때 중원 무림에서 악명 높던 산서 벽력당에서 만든 폭뢰였다.

벽력당은 돈만 주면 아무에게나 벽력탄을 제공했다. 사파, 흑도, 심지어 살수에게까지. 벽력탄에 목숨을 잃는 자가 속출하자 벽력당을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이 돌았다.

그러던 차에 벽력당이 무모하게 화산파에게 도전했다.

화산파는 명분을 앞세워서 벽력당을 멸문시켰다. 이후 벽력당과 벽력탄은 중원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는데…….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벽력당이 멸문될 때 사천당문이 벽력탄 제조법을 입수했다고 들었소.”

“그럼 저 폭약이 설마…?”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벽력탄 근처 십 리는 얼씬도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서백이 한마디 했다.

“그럼 돌아가실 겁니까? 은 사백 냥을 셋이 아니라 둘이 나누면 셈이 편해지겠군요.”

“…그럴 수야 없지! 암, 무림인이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잘 선택하셨습니다.”

서백과 유소운은 슬쩍 시선을 교환하며 미소를 지었다.

서백 일행은 당나귀들의 발걸음에 맞춰서 느리게, 그러나 꾸준한 속도로 촉도관을 향해 나아갔다.

* * *

횃불조차 밝히지 못하고 걷는 밤이 두 번 지나갔다.

핏물이 숲속에 뿌려지지 않아서일까. 잔도를 떠난 뒤로는 다행히 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숲길을 끝없이 걷는 여정이 삼 일째 이어지던 날.

서백 일행은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새벽에 촉도관에 도착했다.

“드디어 다 왔군.”

“고생하셨습니다.”

사천당문의 장원을 떠난 지 고작 삼일 밤낮이 지났을 뿐.

그러나 일행은 몇 번씩 목숨의 위기를 넘겼다. 그런 만큼 촉도관에 도착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일행의 눈앞에 어느새 숲은 사라지고 바위산이 나타났다.

고개를 치켜들자 험준한 산맥이 병풍처럼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산맥 한가운데 촉도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백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심호흡을 했다.

‘여기가 사천의 관문, 촉도관이다.’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 서백의 가슴에 설명하기 힘든 호연지기가 솟았다.

옛부터 중원에는 유명한 관문이 많다.

호로관, 함곡관, 검문관, 산해관 등등.

중원의 중요 길목에는 꼭 관문이 자리하고 있다.

관문 주위는 험준한 산세로 둘러싸인 곳이 많아서 관문을 통하지 않으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즉 관문은 흉노 같은 기마 민족의 침입이나 황건적의 반란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망자가 창궐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들었다. 관문이 그 대표적인 장소.

관문은 이제 망자를 막는 것과 동시에, 망자를 피하기 위한 대피소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사천과 중원을 잇는 관문은 두 곳, 검문관과 촉도관.

북쪽에 있는 검문관은 이미 망자떼를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다행이 검문관을 지나자 망자떼의 진격 속도가 현격히 느려졌다. 검문관의 혹독한 추위가 한기를 꺼리는 망자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에 위치한 촉도관은 사정이 달랐다.

산세는 험하지만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을 만큼 따뜻한 촉도관 부근은 망자떼가 끊임없이 몰려왔다.

촉도관이 무너지면 사천은 금세 망자판이 될 터!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일행은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촉도관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었다. 당나귀들은 속도는 느리지만 힘이 세서 어렵지 않게 길을 올라갔다.

길은 점점 경사가 가팔라졌고, 양옆의 바위벽도 깎아지른 듯 험해졌다.

“촉도관에 오니 시 한 수가 떠오르는군.”

“선배님의 시가 아니라 이백의 시 촉도난(蜀道難)이 아닙니까?”

“허어, 누가 지었든 무슨 상관이냐? 시는 읊으며 즐기면 되는 것을.”

뜻밖에도 유소운이 끼어들었다.

“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

유소운이 이백의 시를 읊자 서백과 왕이삼이 깜짝 놀라 동시에 물었다.

“이백의 시를 아는가?”

“이백의 시를 아십니까?”

“한때 즐겨 읊었소.”

셋은 이백의 시를 읊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길을 중간밖에 가지 않았는데 경비를 서고 있는 무림인 네 명이 일행을 막았다.

“정지.”

백의를 걸치고 머리에 백건을 쓴 무림인들.

그들은 아미파의 속가제자였다. 불문에 속하는 아미파가 사치를 금하기 때문에 화려한 염색을 피해 흰 옷을 입은 것이었다.

“신분을 밝히시오.”

“사천당문의 의뢰를 맡아 촉도관으로 마차를 운송하는 중이오.”

아미파 제자 하나가 와서 마차와 궤짝에 새겨진 표식을 확인했다.

“사천당문의 표식이 맞다.”

그러자 네 명이 둘씩 좌우로 흩어져서 길을 열었다.

“올라가시오.”

그런데 일행이 지나갈 때 아미파 제자 넷은 검 자루에 손을 댄 채 날카로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백은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망자에게 물린 잇자국이 있는지 살피고 있군.’

서백 일행은 의복이 흙먼지에 더럽혀졌어도 핏자국이나 몸에 입은 상처는 없었다. 아미파 제자들은 일행을 제지하지 않고 가도록 놔두었다.

검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두 번을 더 거쳐야 했다.

두 번째는 두 명이 더 늘어난 여섯 명이, 세 번째는 거기서 두 명이 더 늘어난 여덟 명이 검문을 서고 있었던 것이다.

“검문이 너무 까다로운데. 뭘 세 번씩이나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그러지?”

왕이삼이 투덜거리며 불평했다.

세 번의 검문을 거친 뒤에야 일행은 촉도관의 성채에 당도했다.

험준한 산봉우리 사이에 서 있는 으리으리한 성채!

“입이 딱 벌어지는군.”

“동감입니다.”

성채의 문은 웬만한 건물만큼 거대했다. 곧이어 문의 귀퉁이에서 쪽문이 열렸다.

쿠르르르.

말이 쪽문이지 마차 한 대는 거뜬히 드나들 크기.

일행은 아미파 제자들의 감시를 받으며 쪽문을 통과해서 촉도관으로 들어갔다.

촉도관 안은 성채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그 중앙에 넓은 마당이 있는 구조였다.

마당에는 장창을 든 병사들과 등에 활과 활통을 멘 궁수들 수백 명이 진열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

“여기서 기다리시오.”

일행을 안내한 아미파 제자가 그렇게 말한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

서백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광장 한 쪽에 있는 마차들을 발견했다. 마차는 모두 세 대였다.

‘짐작대로군.’

사천당문에서 출발한 마차는 모두 열 대.

그중 두 대는 숲길에서, 한 대는 잔도에서 폭발했다. 촉도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먼저 온 세 대와 서백 일행의 네 대를 합쳐서 도합 일곱 대였다.

그때 아미파 제자가 비구니 한 명과 함께 돌아왔다.

“웬 비구니가…….”

왕이삼이 무심코 중얼거리는 찰나, 서백이 팔꿈치로 재빨리 그의 가슴을 쳤다.

퍽.

“쿨럭… 너 이 녀석, 갑자기 왜…….”

서백은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면서 비구니를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사천당문의 의뢰를 맡아 촉도관에 온 서백이 아미파 장문인을 뵙습니다.”

헉! 왕이삼은 그제야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한 것을 깨닫고 이마에 진땀을 흘렸다.

“유소운이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왕이삼입니다.”

비구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합장했다.

“수고하셨소. 먼저 마차 세 대가 도착했는데 네 대가 더 왔으니 아미파는 시주들에게 큰 빚을 진 셈이오.”

비구니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이었지만 외모와 목소리는 삼십대로 보일 만큼 젊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눈빛에는 한 자루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겨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현 아미파 장문인 정수사태(靜修師太).

정수사태가 서백 일행을 안내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정수사태는 서백 일행을 이끌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어서 돌계단을 밟고 성채의 전각으로 올라갔다.

방금 들어온 문의 반대편에 위치한 전각.

전각에 오르자 멀리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중원 땅이었다.

서백은 벌판을 바라보며 감회에 빠졌다.

‘스승님, 드디어 중원 땅에 왔습니다.’

아직 사천을 떠나지 않았으니 소림사까지 가려면 머나먼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촉도관의 성채는 중앙에 본성이 있고 좌우로 각각 네 개의 탑이 있는 형태였다. 본성과 탑 사이는 장성(長城)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병사들은 장성 위에 난 길로 이동했다.

본성 밑에 자리한 정문은 두터운 나무판과 철갑을 몇 겹씩 겹쳐 만들어서 공성전의 충차도 끄떡없이 막아 냈다.

정문 아래로는 벌판을 향해 외길이 뻗어 있었다.

길 양옆은 깊은 해자는 아니지만 뾰족한 돌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그 위로 돌격했다간 말이나 사람의 발목이 부러지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양옆에는 사람이 기어오르기 힘든 깎아지른 바위산이 자리했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하지만 서백 일행의 감탄은 금세 쑥 들어가고 말았다.

멀리 보이는 벌판이 이미 망자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저게 다 망자라고……?”

족히 수만 명에 육박하는 망자떼!

혼백을 잃은 망자들은 정처 없는 걸음으로 비틀거렸다. 그러나 속도는 느려도 조금씩 촉도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삼일, 아니, 당장 내일이라도 촉도관의 정문은 망자떼로 뒤덮일 것이오.”

정수사태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촉도관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 해서 빈니는 한 가지 대책을 세웠소.”

순간 서백은 깨달았다.

정수사태가 굳이 무명의 무림인들을 손수 전각으로 안내한 이유.

‘아미파도 무림인들의 손을 빌리려 하는군.’

서백의 예측은 정확했다.

“아미파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도움을 청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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