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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2화 (12/123)

12화 천길 낭떠러지의 잔도(1)

서백과 왕이삼은 청년과 함께 길을 되돌아갔다.

왕이삼이 서백에게 물었다.

“다른 자들은 어떡하지?”

“사천당문이 다른 마차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따라오든 말든 알아서 하겠죠.”

“그렇군.”

“하지만 다른 길이 없으니 결국 뒤를 쫓아올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파인을 포함한 네 명도 딱히 방법이 없었는지 서백 일행을 따라왔다. 도저히 구덩이를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촉도관행 일행은 무림인 여덞 명과 마차 다섯 대가 되었다.

잠시 후. 촉도관행은 청년이 봐 둔 짐승길에 도착했다.

짐승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곳곳에 나뭇가지들이 자라 있어서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무림인들은 도검으로 나뭇가지를 쳐 내며 전진했고, 자연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왕이삼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청년에게 물었다.

“근데 이 길은 어떻게 안 거지? 혹시 엽사 출신이냐?”

엽사는 짐승을 잡아 고기나 가죽을 파는 직업이다.

산을 잘 타고 도검에 익숙한 엽사들. 그 때문에 무림인 중에는 드물지만 간혹 엽사 출신이 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냥은 좋아하지만 엽사는 아니오. 한 달 전에 중원에서 촉도관을 거쳐 사천에 왔소. 그런데 촉도관을 지나온 뒤 길을 잘못 들었소.”

“뭐라고? 그럼 짐승길을 알아 낸 게 설마 길을 잃어서…….”

“그렇소.”

“…….”

왕이삼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길을 잃고 헤맨 덕분에 짐승길을 찾아 낸 청년.

그 말은 촉도관행이 지금 길치의 안내를 받아서 길을 돌아가고 있단 말이 아닌가?

불안해진 왕이삼은 서백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길치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저자를 믿어도 될까?”

“따로 아는 길이 없으니 믿어 볼 수밖에요.”

“끄응…….”

서백의 대답을 들었지만 왕이삼은 좀처럼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촉도관행 마차들이 짐승길을 통과했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뜬 뒤였다.

청년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요.”

“이제야 다 왔군… 엥?”

왕이삼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년이 가리킨 곳은 천길 낭떠러지에 만든 길, 즉 잔도(棧道)였다.

한 걸음만 옆으로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벼랑. 그 깎아지른 험한 벼랑에 바위벽을 깎아서 만든 좁은 잔도가 구불구불 나 있었다.

왕이삼은 발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간담이 서늘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무림인이니까 망정이지 보통 사람은 밑을 보기만 해도 어지러움을 느낄 높이.

“지금 저기로 가자고 우릴 안내한 거냐?”

왕이삼이 묻자 청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길래 감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소.”

“…….”

왕이삼은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사파인도 어이가 없는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길로 마차를 끌고 가자고? 네놈 제 정신이냐?”

“못 갈 것도 없지 않소?”

“뭐야? 참나.”

청년이 워낙 넉살 좋게 대답하자 사파인마저 기가 막히는지 화도 못 냈다.

그때 서백이 등에 멘 검을 내려서 가로로 눕힌 뒤 마차 바퀴에 갖다 댔다.

“마차 바퀴의 폭은 여기부터 여기까지군요.”

양쪽 바퀴가 어느 정도 길이의 폭인지 잰 것이었다.

서백은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잔도와 수직이 되도록 검을 가로로 갖다 댔다.

“잔도는 여기부터 여기까지입니다. 마차 바퀴의 폭보다 잔도의 폭이 더 넓으니, 바퀴가 길 옆으로 빠지지는 않겠군요.”

“……!”

방금까지 청년에게 투덜대던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불만만 품고 있을 때 서백은 냉철하게 잔도의 폭을 계산하고 길을 건널 가능성을 따져본 것이다.

어른이 돼서 약관도 안 된 소년만 못하다니…….

서백은 계속해서 청년에게 잔도의 안전을 물었다.

“중간에 더 좁아지거나 길이 끊기는 곳은 없습니까?”

“내 기억으로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서백은 왕이삼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님, 가시죠.”

“응? 으응… 가야지…….”

서백은 당나귀 고삐를 쥐고 마차를 끌어서 잔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할 수 없지. 죽든 살든 가는 수밖에.”

왕이삼은 푹 한숨을 쉰 뒤 서백의 뒤를 따라 마차를 몰고 잔도로 진입했다. 그다음으로 청년이 자기 조의 무림인과 함께 마차를 몰았다.

열 장쯤 앞으로 나아갔을 때, 서백이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잔도 폭이 넓진 않지만 마차가 건너기엔 충분합니다. 당나귀도 무서워하지 않고 잘 따라오는군요.”

“……!”

뒤에 남아 있는 사파인과 무림인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백의 말뜻은 분명했다. 당나귀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당신들은 겁을 집어먹고 있냐는 뜻.

목에 검이 들어와도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무림인들.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무림인이 아니리라.

사파인과 무림인들은 흉흉한 눈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저 꼬마 놈도 건너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 없지!

곧이어 남아 있던 무림인들도 각자 자기 조의 마차를 끌고 잔도로 진입했다.

한 발만 헛디뎌도 끝없이 추락하는 좁은 잔도를 다섯 대의 마차가 줄을 이어 건너기 시작했다.

* * *

사천의 동쪽은 중원과 맞닿아 있지만 하늘을 찌르는 암벽 산맥이 병풍처럼 길을 막고 있다. 그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잔도를 만들어서 중원과 사천에 통로를 연결했다.

지금 촉도관행이 지나가는 잔도도 그중 하나였다.

과거에는 험한 잔도를 통하지 않으면 사천 땅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촉도관이 생긴 후 사정이 나아졌다. 촉도관만 지나면 바로 사천 땅이 나오니까.

간혹 지금 같은 잔도를 이용하는 자들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 촉도관을 통과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중원 무림이 쫓는 도망자거나, 명문정파의 눈을 피해 다니는 살수가 그들.

촉도관이 생기는 바람에 사람 발길이 끊긴 잔도들은 숱하게 많았다. 눈앞의 잔도 역시 언제 사람이 다녔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낡아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간담이 서늘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 길!

저기로 떨어진다면 일류, 아니, 절정 수준의 경공을 펼치더라도 살아날 방법이 없을 터.

무림인들은 밑을 보지 않고 앞에 가는 마차만 따라갔다.

반면 서백은 평지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뒤에서 따라가는 왕이삼은 서백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겁도 없나?’

그런데 서백처럼 거침없이 걷는 자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청년이었다.

‘하여간에 요즘 젊은 놈들은 겁대가리가 없다니까.’

왕이삼은 속으로 푸념을 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서백과 청년은 담대할 뿐 아니라 경공에도 자신이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계속 걷다보니 처음보다는 두려움이 가시고 발이 익숙해졌다.

왕이삼은 심심한 김에 궁금하던 걸 물었다.

“근데 마차가 왜 폭발한 거 같냐?”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 망자한테 휘두른 도검이 궤짝을 쪼개는 바람에 불꽃이 튀었을 겁니다.”

서백의 말에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데 뒤에서 청년이 말을 걸었다.

“어제 비가 내렸는지 공기가 습하군. 이런 날씨는 도검을 내려쳐도 불꽃이 잘 튀지 않을 텐데?”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째 가능성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지?”

“망자를 베다가 불씨가 생긴 겁니다.”

그 말에 청년과 왕이삼은 물론 뒤에 따라오는 무림인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망자를 베다가 불씨가 생겼다고?

생전 들어 보지 못한 금시초문의 말.

하지만 서백의 설명을 계속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망자는 오랫동안 산 사람의 피를 마시지 못하면 몸이 말라비틀어져서 고목나무처럼 변합니다.”

“알고 있다. 꼭 미이라처럼 변하지.”

“망자를 베다가 뼈까지 베었을 겁니다. 사람 뼈에는 인(燐) 성분이 들어 있죠. 인은 공기 중에 노출되면 불이 붙기 쉽습니다.”

“……!”

“고목나무처럼 마른 망자의 뼈이니 습기 찬 날씨와는 상관없었을 겁니다.”

서백의 추리는 명쾌했다.

무림인들은 무거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세 가지 주의 사항을 내건 사천당문. 하지만 그토록 철저히 대비했음에도 폭약은 불씨가 붙고 말았다.

앞으로 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일.

만약 이 잔도에서 마차가 폭발할 경우… 뼛조각 하나 찾지 못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사천당문 놈들 치고 보수가 꽤 후하다고 생각했더니 후한 게 아니라 후려치기였군, 하하하!”

사파인이 그답게 비아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안 했지만 이번만큼은 무림인들 모두 사파인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자네 얘기를 들으니 그분 생각이 나는군. 그분이 꼭 자네처럼 추리가 대단하셨지.”

청년이 뜬금없는 말을 하자 서백이 물었다.

“누구 말씀입니까? 스승님?”

“스승은 아니고. 실은 그분을 찾으러 사천에 왔다네.”

청년이 말하길, 망자가 창궐하자 무림맹이 그에게 임무를 맡겼는데, 운남으로 낙향한 무사를 초빙해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셨습니까?”

“아니, 운남에 가보니 그분은 며칠 전에 전갈을 받고 이미 떠났다고 하더군.”

“길이 어긋났군요.”

“그래.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나도 중원으로 돌아가는 참이네. 덕분에 운남과 사천 구경을 원 없이 하고 말야.”

청년은 씨익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둘의 대화를 들은 왕이삼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운남까지 갔다가 헛수고하고 돌아가는 거잖아?’

왕이삼은 청년을 믿고 잔도를 건너는 게 잘하는 짓인지 불안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서백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

“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개를 내민 왕이삼은 흠칫 놀랐다. 잔도 절벽 쪽의 가장자리 바윗돌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닌가?

마치 이가 빠진 도검 같은 모습.

길을 가는 게 무림인뿐이라면 별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마차였다. 마차의 바퀴 폭과 잔도의 폭은 거의 일치했다. 즉 그대로 지나가다간 오른쪽 바퀴가 무너진 부분에 걸리고 말 터.

평지였다면 여럿이서 마차를 들어서 옮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한 발 옆으로 나가면 천길 낭떠러지니까. 게다가 지금 가는 길이 하필 경사가 진 오르막길이었다.

청년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 말에 왕이삼은 속으로 열불을 터뜨렸다.

‘촉도관 길도 헤매는 길치가 어련할까!’

그때 서백이 등에 멘 검을 내리더니 무너진 곳에 수직으로 댔다.

서백이 뭘 하는지 몰라서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뒤에서 사파인이 끼어들었다.

“호오, 검을 받침 삼아 건너자는 거냐?”

“네.”

그 말에 무림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백의 검은 어른 손바닥을 두 개 합친 것만큼 폭이 넓다. 마차 바퀴가 그 위를 지나가는 데 충분했다.

“그러다 검이 부러지면 마차랑 함께 절벽으로 떨어질 텐데?”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없는 것 같군.”

사파인이 씨익 웃더니 갑자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럼 내가 먼저 건너지!”

타타타탓. 사파인은 수직으로 난 절벽을 타고 마차 몇 대를 가볍게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마차만 아니면 이런 잔도는 눈 감고도 건넜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엄청난 경공!

“뭐하냐? 얼른 마차를 보내라.”

사파인이 건너편에서 손을 내밀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그도 일행이 곤란에 처하자 팔을 걷고 나선 것이었다.

어쨌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서백은 당나귀 고삐를 사파인에게 건넨 다음 바퀴가 검 위를 똑바로 지나가도록 마차를 몰았다.

사파인은 길 건너에서 고삐를 잡아당겼다.

곧이어 마차 한 대가 무사히 검 위를 지나갔다.

“이렇게 쉬운 걸 괜히 걱정했군!”

왕이삼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계속해서 서백은 사파인과 호흡을 맞춰서 마차를 이동시켰다. 마차는 별 탈 없이 한 대씩 검 위를 건너갔다.

마지막 다섯 번째 마차가 건널 때, 사파인이 말했다.

“마차가 위를 지나가도 부러지기는커녕 이 하나 빠지지 않다니 보기 드문 명검이군. 그 검과 비교하자면 내 검은 잡검이지. 하지만…….”

서백은 그의 말에서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러나 손 쓸 새도 없었다.

사파인이 검을 뽑아 당나귀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촤아아악.

“당나귀 베는 것쯤이야 문제없지, 하하하하!”

무게를 지탱하던 당나귀들이 죽자 마차가 균형을 잃고 서백을 향해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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