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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에서 정상적으로 게임을 하기 위해 명심해야 할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범법자는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리제니안, 그러니까 플레이어는 ‘쟤들은 다른 세상 애들이니까’ 같은 느낌으로 대충 넘어가 주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범죄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이지, 진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게임 장르가 바뀌게 된다.
한 지역의 영주한테만 밉보여도 그쪽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해서 게임하기 피곤해지는데, 현상수배범쯤 되는 타이틀을 얻으면 어떻겠나.
몬스터 헌팅을 즐겨야 할 모험가가 아니라 바운티 헌터. 즉, 현상금 사냥꾼들한테 쫓기는 사냥감의 현실을 리얼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범죄자 컨셉 잡고 감옥 or 소용소 라이프를 즐기는 변태 게이머가 목표이거나, 아예 거물 범죄자를 목표로 한다면 모를까…….
굳이 정상적으로 게임하기 힘든 환경에 자처해서 뛰어들 필요는 없지 않나?
적어도 도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없었는데…….
“아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자의는 몰라도 타의는 다른 문제였다.
웬 미친놈이 성황청에 신고를 넣는 바람에 도진의 처지는 순식간에 ‘이적행위자’가 되어 버렸다.
현재 전면전 상태가 아니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리적, 현실적 문제로 인하여 모른 척하고 있을 뿐.
그림자 공국과 뱀파이어는 인류의 적이고, 성황청은 그중에서도 ‘뱀파이어’ 하면 심하게 발작을 일으키는 집단이었다.
“하… 이러면 내 계획이 다 망가지잖아.”
도진은 자신의 얘기로 가득한 인터넷 화면을 이리저리 전환하며 짜증을 냈다.
[연못에 던진 돌에 도진이 맞았다!]
[성황청은 어떤 곳일까? 도진이 잡히면 겪게 될 일!]
[중세시대 고문 및 마녀재판 방식을 알아보자!]
[도진 역대 최고 위기! 종교집단을 적으로 돌린 그의 최후 분석.]
얼마 전까지는 ‘도진’을 검색하면 죄다 부유대륙, 잊혀진 신전 등이 떴었는데.
이젠 뜨는 게 죄다 이 모양이었다.
역시 남의 불행은 달고 맛있는 법이다.
그걸 씹고 뜯으면 조회 수랑 돈이 굴러들어오기까지 하니 더 달겠지.
‘성황청 애들이랑 엮이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는데.’
순서를 따지자면, 도진은 멸망교단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부터 하려고 했었다.
작고 가깝게 보자면 뱀파이어의 저주 문제, 크고 멀게 보면 이 세계의 멸망에 관한 것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열쇠를 가진 건 멸망교단 쪽이지 창세교단 쪽이 아니기 때문이다.
별의 목소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상황인데 거길 가서 뭐 하나.
‘멸망교단은 지금까지도 소름 돋을 정도로 정체를 잘 숨겨 왔어. 그런 놈들이니 성황청과 제국이 조금만 움직이려 들면 더 깊숙하게 숨어 버리겠지.’
그래서 손에 쥔 카드 패가 충분할 때 터뜨리려 한 건데.
생각하면 할수록 더 머리가 아팠다.
‘당장 날 잡겠다고 몰려올 상황은 아니니 일단은 상황을 좀 지켜보면서 생각해 봐야지.’
* * *
창세교단 성황청 대회의장.
성녀를 비롯해 추기경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 이계인들을 이 세계에 불러오는 것을 저희가 반대한 것이 아닙니까!”
추기경 브만이 성녀 마리올라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정치적으로 그와 같은 진영에 속한 추기경들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마리올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별이시여…….’
벨라의 목소리가 함께할 때는 성녀를 향해 언성을 높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별의 의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성녀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의 영역.
어떻게 보면 성황보다도 더 존중을 받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건 옛일이 된 지 오래다.
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성녀’는 그저 정치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자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를 정치적으로 쓰기 위해 성녀의 자리에 앉힌 성황은 지금 삶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다른 세계에서 불러들인, 그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자들은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고요. 정말 벨라 님의 목소리를 들은 게 맞으신지 묻기도 했습니다.”
“브만 추기경! 성녀님께 이 무슨 무례란 말이오!”
“닥치시오! 이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란 말입니다! 성녀님께서 착각을 하셨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까!”
“이, 이, 어찌 그런 망발을! 신성을 모독하려는 것입니까!”
“신성모독? 지금 신성모독이라 했소? 그러면 어디 따져 봅시다. 정말 성녀님께서 오래토록 침묵하시던 위대한 창세성의 목소리를 들으셨다면! 그러면 창세성의 의지로 이 세계에 온 자들 중 악독한 뱀파이어 놈들과 내통하는 자가 나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브만의 일갈에 성녀를 옹호하던 추기경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성녀를 모독하는 게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였더니, 브만은 아예 창세성 벨라를 걸고 넘어진 것이다.
‘성녀가 한 말이 맞으면 별이 틀린 거네? 성녀는 별이 한 말을 옮긴 것뿐이라며?’ 하고 묻는데 바로 ‘예!’ 하고 대답할 성직자는 없었다.
마리올라 성녀는 눈을 감았다.
‘성황 예하…….’
사실 성녀는 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성황의 결정에 따라 거짓을 말했을 뿐.
그런데 성황은 지금 병환으로 오늘 내일 하는 중이다.
브만은 곧 공석이 될 성황 자리를 노리고 저러는 것이겠지.
그러면 나는…….
‘저자가 나를 살려 둘까?’
성녀는 종신직이다.
한번 성녀가 되면, 죽는 순간까지 성녀라는 옷을 벗지 못한다.
그러면 말 잘 듣는 새로운 부품을 성녀 자리에 끼워 넣기 위해서는…….
따뜻한 대회의장에 앉아 있음에도 마리올라는 한기를 느꼈다.
‘지금부터라도 바짝 엎드리는 수밖에 없어.’
어차피 성녀란 자리는 성황의, 성황파의 나팔수에 불과한 자리다.
성황이 바뀐다면 그자의 나팔수가 되어 살아가야 했다.
살아남을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저는 별의 의지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다만 벨라 님의 뜻은 너무 깊고 커다랗기에 한낱 인간인 저로서는 완전히 해석할 방도가 없습니다. 혹여 지금 문제가 된 그 리제니안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뜻을 전달하려 하시는 건 아니신지…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벨라 님도 틀리지 않으셨겠죠.
그걸 우리가 이해를 못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숨은 뜻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브만 추기경께서 맡아서 해 주신다면 정말 든든할 것 같아요.”
조사부터 별의 뜻을 해석하는 일까지 당신에게 넘기겠습니다.
사실상 항복 선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성황파에 속한 자들이 성녀를 부르며 눈을 크게 떴지만, 성녀는 침묵했다.
“…성녀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철저히 조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만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안으로 감췄다.
이제 브만이 조사 끝에 내리는 결론은 별의 뜻이 될 터였다.
* * *
조사를 시작한 성황청은 도진에 대해 알아보다가 모험가 길드를 거쳐 엘토마기아에 이르렀다.
원래부터 성황청은 마법사들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지라 브만은 옳다구나 하고 엘토마기아에 연락을 했다.
아무리 성황청이 힘을 많이 잃었다고는 해도, 한낱 마법사 집단 주제에 리제니안 하나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진 않을 것이다.
그런 판단으로 마법사 놈들에게 싫은 소리 좀 슬쩍 해 줄 생각이었다.
“예? 뱀파이어가 뭐라고요? 도진?”
연락을 받은 건 적색위 마법사였다.
피곤에 찌들어 졸던 그는 반짝이는 수정구에 대고 잠꼬대 비슷한 응대를 했다.
“예… 아, 그래서 어디서 연락을 주신 거였죠?”
고개를 흔들어 잠을 쫓은 마법사는 ‘성황청’이라는 말을 알아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네? 아, 죄송합니다.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용을 제대로 인지한 마법사는 땀을 뻘뻘 흘렸다.
말만 들으면 엘토마기아 마법사 하나가 뱀파이어랑 내통을 했다고 신고가 들어왔다는 거 같은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마법사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오늘의 잡일 당번 적색위 마법사는 더 높은 분을 불러오겠다며 상대의 신분을 물었다.
[“…추기경 브만일세. 참고로 세 번째 이 이야기를 하는 거 같군.”]
“죄, 죄송합니다. 제가 일주일째 잠을 못 자서. 아니,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네. 지금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사 놈들 쩔쩔매게 만들 기회를 즐기기 위해 직접 나선 브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란 것들은…….
적색위 마법사가 허겁지겁 다른 수정구를 활성화시키려는 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픽 쓰러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구나.”
‘도진’이란 단어를 듣고 영역에서 나온 시온이었다.
브만은 갑자기 등장한 여자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다짜고짜 하대를 하니 당황할 수밖에.
[“성황청 추기경 브만이오.”]
‘나 말단 사제 아니고 추기경이에요’라는 뜻으로 한 말.
물론 시온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볼까.”
[“…….”]
브만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통신 수정구 앞에 앉아 있는 놈이 졸고 있다가 헛소리를 찍찍하질 않나.
새로 나타난 년은 반말이나 찍찍하질 않나.
엘토마기아, 엘토마기아 해도 결국 마법사 나부랭이들 집단인 걸 티내는 건가?
그래도 브만은 꾹꾹 참으며 해야 할 말을 했다.
나 추기경인데 대우 안 해 주냐고 꽥꽥대는 건 모양이 너무 안 좋았다.
‘흥, 그래 봐야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다.’
엘토마기아가 아무리 제멋대로인 집단이라 해도 뱀파이어와 내통한 놈이 있는 상황이란 걸 알게 되면-
“뱀파이어? 아아… 그 이야기였나. 그래서 성황청의 추기경 브만 씨께서는 뭘 하려고 엘토마기아에 연락을 했지?”
당황을 해야 하는데……?
당황은 브만이 해야 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소? 지금 엘토마기아 소속의 마법사가 뱀파이어와 내통 혐의로 신고를 당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신고를 한 녀석도 참 할 일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런 사소한 일로 혀를 놀리는 걸 보니.”
[“사소한 일이라니! 물론 정확히 조사를 해 봐야 아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면 이는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뱀파이어랑 관계가 있는 거?
사실이다.
벌써 걔들이랑 섞였던데.
특히 눈이.
근데 그게 뭐.
“큰 문제라. 그러면 뭘 어찌 하고 싶다는 것이냐.”
[“우리 측에서 철저히 조사를 할 수 있게 그를 성황청으로 보내시오! 솔직히 이번 일로 엘토마기아에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엘토마기아 입장에서도 리제니안의 일탈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을 테니. 하지만 지금 발언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감히 뱀파이어와 내통하는 일이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을 하다니!”]
브만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 한 말을 엘토마기아의 공식적인 입장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엘토마기아를 대표해서 말하는 거냐고 하면 물러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집단을 대표해서 책임을 진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거든.
그걸 잘 알기에, 브만은 상대가 바짝 엎드릴 걸 기대했다.
“그럼. 당연한 일 아니냐.”
또 아니었다.
[“…당신, 아니 네 이름을 기억해야겠구나. 시끄럽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만, 이런 식이라면 우리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삼는 수밖에 없겠어.”]
“시온.”
브만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시온 그레이스다.”
상상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순간 말을 잃은 브만.
그에게 시온이 말했다.
“조사를 해도 우리가 한다. 그러니 성황청에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시온 님, 지금 자존심을 부릴 상황이 아닙니다. 엘토마기아 소속 마법사라 해도 그는 리제니안입니다. 기껏 그런 자 때문에…….”]
“정정해 줄 게 있구나. 단순히 소속 마법사도 아니고, ‘기껏’은 더더욱 아니다. 도진, 그 아이는 내 제자이거든.”
도진이 보았다면 일 좀 그만 키우라며 비명을 지를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