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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치를 보던 크아앙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정말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는 건데요. 도진 님이나 테레사 님 시간 괜찮으실 때 합방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인터넷 방송을 업으로 삼는 사람끼리 만나서 나누는 ‘언제 한번 방송 같이해요~’는 길 가다 만난 동창끼리 하는 ‘언제 밥 한번 먹자’와 비슷한 공수표 같은 인사말이다.
하지만 지금 크아앙은 그런 기약 없는 약속으로서 합방 얘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꽉꽉 담겨 있었다.
“합방이요? 저야 좋죠!”
테레사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천성이 착하고 붙임성 좋은 그녀에게 이런 제안은 고민할 거리가 없는 제안이었다.
“정말요? 감사해요!”
하지만 도진은 아니었다.
도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약간 고민했다.
웬만한 경우라면 도진은 이런 합방 요청이 들어와도 고민 없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 현재도 정중히 거절 중이라고 봐야 했다.
회사로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요청이 실시간으로 정중히 거절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귀찮기는 한데 또 궁금하긴 하네. 재밌을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바로 거절하지 않고 고민을 하는 이유는 예전에 봤던 ‘밑바닥’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진이 게임 못 하는 사람을 보면 또 얼마나 봤겠는가.
상위권은 상위권끼리 마주치기 마련이라, 아예 기본이 안 되는 유저는 만날 일 자체가 없었다.
도진 입장에서 크아앙, 정확히는 전생에 보았던 그녀의 영상 속 장면은 컬쳐쇼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걸 실제로 직관할 수 있는 기회라니. 귀찮은 걸 감수할지 말지 고민할 정도는 되는 일이었다.
‘음, 합방하면 뭘 하고 싶은지나 물어볼까.’
도진은 대답을 보류하고, 잠깐 대화를 더 이어 나가 보기로 했다.
꽤나 간절해 보이니, 설득할 기회를 주는 셈 치고.
“합방… 이면 뭘 하나요? 전 실시간 방송도 거의 안 하고, 그냥 던전 공략할 때 찍은 영상만 올리는 편이라 감이 잘 안 잡히네요.”
테레사와 ‘고맙다’, ‘내가 더 고맙다’ 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도진을 신경 쓰던 크아앙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냥 인사치레로 ‘네, 언제 한번 같이하면 좋겠네요’ 정도만 나와도 어떻게든 비벼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뭘 할 거냐고 물어봐 주다니.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물으면서, 이미 크아앙은 테레사 옆에 착석하고 있었다.
“그냥 단순히 던전 같이 깨고 그런 건 아니죠?”
그런 재미없는 거면 바로 거절이란 뜻으로 묻는 도진.
이에 크아앙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러면 도진 님 혼자서 로봇 청소기처럼 던전 몬스터 싹 다 밀어버리고 끝날 텐데.”
크아앙은 바닥부터 꾸역꾸역 올라온 프로 방송인이었다.
이미 도진과 합방을 할 수 있게 되면 할 콘텐츠는 다 짜 놓은 상태였다.
언젠가 로또에 당첨되면 할 일을 상상하는 회사원처럼 짜 놓았던 계획이지만, 지금 로또 1등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게 부끄럽긴 한데… 제가 게임을 엄청 못해요.”
“알… 아,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
반사적으로 안다고 대답해 버릴 뻔한 도진은 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레벨은 어떻게 꾸역꾸역 올려서 120대까지 맞춰 놨는데, 레벨만 높아졌지 저 완전 바보거든요. 120레벨은 고사하고 100레벨대 던전을 가도 딜러로서 1인분을 못 해요. 레벨도 다 시청자들이나 지인 스트리머들이 올려준 거나 다름없고….”
“그럼 저랑 합방을 하면 오히려…….”
“그렇죠. 또 버스 탄다고 뭇매를 맞겠죠. 그러니까 도진 님은 절 코칭만 해 주시는 거예요. 모지리 마법사를 어엿한 1인분짜리 딜러로 만드는 도진의 도전!”
크아앙은 작은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흔하다면 흔한 콘텐츠죠. 하지만 이 정도 만남은 흔할 수가 없어요. 도진 님은 자타공인 마법사 클래스 정점이신데, 전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거든요.”
“…….”
“…….”
자기비하를 이런 식으로 써 먹다니.
맞장구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도진과 테레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도진 님한테 교육 받은 다음에 테레사 님이랑 파티해서 던전 공략. 테레사 님은 도진 님이랑 어려운 던전도 공략해 보셨으니까 도진 님이랑 파티했을 때랑 저랑 했을 때를 비교하는 콘텐츠도 진행하면… 진짜 이거 유튜브 영상 최소 5편은 나올 거예요.”
크아앙은 얘기하는 도중에 즉석에서 테레사와 진행할 콘텐츠까지 구상하여 브리핑했다.
“…재미는 있겠네요.”
“그죠, 그죠?”
아니, 영상은 모르겠고. 내가 재밌을 거 같다고.
안 그래도 당분간은 좀 쉬엄쉬엄 게임하기로 했으니 휴식하는 겸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가볍게 하는 콘텐츠인 만큼 길게 시간을 할애할 필요도 없을 거 같고.
“괜찮네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크아앙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 합방 해 주시는 거예요?”
“제가 해 주는 게 아니라 같이하는 거죠.”
“앗싸!”
크아앙이 만세 자세를 취하며 기뻐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으나 대부분 직원들이라 상관은 없었다.
많이 쪽팔릴 뿐.
방송인이라 그런지 리액션이 굉장했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제가 무조건 맞출게요.”
시간. 시간이라.
도진은 한번 결정하면 뒤로 미루는 걸 싫어했다.
나중으로 미루면 그게 다 숙제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도진은 테레사를 보며 말했다.
“누나, 소소 누나랑 뭐 특별히 하기로 한 거 없지?”
“응? 어어, 그지? 딱히 정하고 만난 건 아니잖아.”
“음… 그럼 잠깐 게임 좀 하다가 저녁까지 먹고 들어갈까?”
“어? 그것도 괜찮긴 하겠다. 근데 너 설마…….”
묻는 테레사에게 웃어 보인 도진은 크아앙에게 말했다.
“크아앙 님, 괜찮으시면 지금 할까요? 어차피 위에서 방송도 가능하니까.”
“네? 지금이요?”
한번 하기로 결정한 도진의 추진력은 크아앙도 당황시킬 정도였다.
“그, 그래도 이왕 하는 김에 준비도 철저히 하고, 공지도 해서 홍보도 한 다음에 하는 게…….”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고 싶은 크아앙은 제대로 약속을 잡고 싶었다.
“그럼 나중에 제대로 하면 되죠. 오늘은 간단히 세팅 정도만 살펴보고. 어차피 저도 길게는 못 해요. 아, 크아앙 님이 다른 일정이 있으시면 어쩔 수 없긴 하겠네요.”
“잠깐만요!”
오늘도 하고, 본 방송은 나중에 또!
도진의 말에 크아앙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가 향한 곳에는 오영식이 있었다.
“크아앙 님, 꽤 대화가 길어진 거 같은데… 무슨 얘기 나누신 거예요?”
“저랑 합방 하신대요!”
“예?”
멀리서 봐도 크아앙이 기뻐하는 게 보여서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한다고 했다고?
“정말 죄송한데, 오늘 미팅 미루면 안 될까요? 전에 말씀드린 그 콘텐츠 있잖아요. 크아앙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그거 말씀드렸더니 지금 바로 제 세팅부터 봐 주신다고 하셔서요.”
크아앙의 말을 들은 오영식이 벌떡 일어났다.
“미팅이요? 그런 게 있었나요? 잠시만요.”
오영식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바로 방송 세팅해. LOST, 2명. 어어, 지금 올라갈 거야. 도진 님이랑 크아앙 님. 질문할 시간에 빨리 준비나 해. 급한 일이다, 알았지?”
지금 미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미팅이라고 해 봐야 어떤 콘텐츠가 좋을지, 뭘 할지, 그런 거 하려고 하는 미팅인데.
“지금 올라가시면 바로 방송 시작할 수 있게 세팅해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오영식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크아앙도 씩 웃으며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 * *
원래 오늘은 크아앙의 정기 휴방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방송이 켜지자 그녀의 고정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우르르 방송을 시청하러 몰려왔다.
-무슨 일임?
-휴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 먹는 방장이 웬일로 휴방일에 방송을 켰어?
-어쨌든 볼 방송 생겨서 개이득 ㅊㅊ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시청자들 앞에 크아앙이 나타났다.
“후후후.”
자신감 가득 찬 그녀의 웃음에 채팅창에 불이 났다.
-보니까 사고 친 건 아니네 ㅋㅋ
-어떻게 사람이 ‘후후후’ 단 세 글자로 사람을 빡치게 만들지
-뭔데. 뭔데 또 그러는데.
-뻔하지 뭐 ㅋㅋ 또 시답잖은 거 가져와서는 자랑하려고 하는 거겠지
평소였으면 한 번쯤 버럭해 줘야 할 타이밍.
그러나 크아앙은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말했다.
“제가 항상 말했죠? 언젠가 1인분 하는 딜러가 될 거라고. 그걸 위해서 제가 오늘 스페셜 게스트를 모셨어요. 보면 님들도 깜짝 놀랄걸?”
크아앙의 말에 시청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ㅋㅋㅋ 말이 되는 소릴 해!
-널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선생은 없어. 있다면 그건 신이겠지.
-방장님, 게임 못한다고 그만 놀릴 테니까 이제 그만 망상에서 벗어나 주세요…….
-야, 이 나쁜 새끼들아. 너희가 너무 놀리니까 애가 망가졌잖아.
-어이, 크 씨. 헛소리 그만하고 룰렛이나 켜.
시청자들의 반응을 크아앙은 철저히 무시했다.
“응, 어차피 게스트 보면 너희 다 놀라 자빠질 거야~”
크아앙은 자신감 있게 말하며 화면을 돌렸다.
거기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
-?
-?
-?
채팅창이 물음표로 도배됐다.
“안녕하세요, 도진입니다.”
도진이 인사하자 채팅창이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도칸련; 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고 진짜 신을 데려왔어!
-아니; 귀한 분이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엘 다;
-미친 ㅋㅋ 여기서 왜 진이 튀어나와? 미국 대통령이 튀어나와도 이거보단 덜 뜬금없겠다
맛깔나는 반응에 크아앙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내 말이 맞지? 님들 놀랄 거라고 그랬잖아요.”
시청자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귀한 분 모신 거니까 채팅 신경 써서 치세요. 선 넘으면 바로…….”
크아앙이 손날로 목을 그어 보였다.
-넵, 넵, 방장님!
-충성충성
-저희 원래 착하잖아요, 크아앙 님.
가증을 떠는 채팅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크아앙.
그런 그녀에게 도진이 말했다.
“일단 오늘은 가볍게 세팅만 보기로 했으니까 그것만 확인하죠.”
“아, 넵!”
두 사람은 LOST에 접속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장비 세팅만 살펴보는데 굳이 게임에 접속할 필요는 없었다.
크아앙은 방송을 켜기 전 미리 정리해서 찍어 둔 자신의 장비 세팅을 띄워서 도진에게 보여 줬다.
“…….”
그걸 보는 도진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