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긴 송곳니 오크’가 나오는 곳은 다누미네 계곡 상류였다.
<악에 잠식된 마법공방>을 털어먹기 위해 시살라와 함께 갔던 곳은 계곡 지형의 끝자락 부분이기에 위치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또,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하류 쪽과 달리 상류 쪽엔 그래도 조금이나마 물이 흐르고 있어 풀도 있고 나무도 있긴 했다.
하지만 생기가 좀 있다뿐이지 지형적으로는 이쪽이 훨씬 나빴다.
“이러니 아래쪽이 바짝 말랐지.”
도진은 갈라진 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누미네 계곡 상류는 무슨 이유에선지 어디는 가라앉고, 어디는 솟아오르고, 전체적으로 땅 이곳저곳이 갈라진 최악의 지형을 하고 있었다.
“하아…….”
이런 곳에서 몇 마리 젠되지도 않는 긴 송곳니 오크를 500마리나 잡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암담했다.
며칠이나 걸릴까? 사흘 안에 끝나면 기적일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어차피 해야 할 거 최대한 빨리 끝내 보자. 마음을 다잡은 도진이었으나 1시간도 안 돼서 주저앉아 쉬는 처지가 됐다.
5미터쯤 되는 가파른 벽을 꾸역꾸역 기어 올라갔다. 그랬더니 바로 다시 바닥이 푹 꺼져 있네? 7미터를 나무줄기를 잡고 부들거리며 내려와야 했다.
좀 평평한 지형이 이어지길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0미터 간격으로 벌어진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걸 보기 전에는. 덕분에 멀리 돌아가느라 또 벽타기를 신나게 해야 했다.
걸음만 옮기면 죄다 이딴 식이니 몬스터랑 싸워서 힘든 것보다 이동 자체에 소모되는 체력과 심력이 너무 컸다.
“…토할 거 같아.”
배를 탄 것도 아닌데 땅에 발을 대고 멀미를 하는 기분.
‘좀 더 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아네모네라도 소환해야겠어.’
아무리 연비가 좋아도 슈퍼카는 슈퍼카.
단순이 이동 수단으로 쓰기엔 아네모네는 과분한 탈것이었다.
바닥에 마나를 흘려 가며 이동하는 셈이 되겠지.
하지만 이 정도 험지면 이동 자체가 전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도진은 좀 더 견뎌 보다가 정 힘들 거 같은 순간에는 제한적으로나마 아네모네를 소환해 험지 주파를 할 궁리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조금만 더 쉬자. 진짜 이러다 뒤지겠다.”
휴식이 더 필요했다.
아무리 체력 스탯이 높다고 해도, 도진은 마법사였다.
* * *
도진이 다누미네 계속 상류의 끔찍한 지형과 씨름을 하고 있을 때.
계곡 바깥에는 꽤 많은 수의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리더는 도진과 악연으로 엮인 인물, 혈왕이었다.
“이쪽으로 들어간 게 확실하단 말이지?”
하베르칸 참사 이후 혈왕은 온 힘을 다해 도진을 찾아내려 했었다.
유혈 길드는 물론이고, 돈을 풀어 현상금까지 내걸었었다.
그러나 도진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LOST 이용자는 지나치게 많았고, 로스타니아는 광활했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 도진은 유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만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녔으니 추적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
‘드디어 찾았다, 이 개새끼.’
결국 혈왕은 도진을 찾는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이니 언제가 됐든 제른은 들르겠지, 하는 기약 없는 바람으로 제른에 감시 인력을 풀어 뒀던 것이다.
지난한 기다림을 인내하며 혈왕은 갖은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아야 했다.
친척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게 인간이라 했다.
그런데 혈왕은 그간 원수나 다름없는 도진의 승승장구하는 소식을 들어야 했으니 그의 속이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네가 낄낄거릴 수 있는 것도 오늘까지다. 오늘부터 너는 우리한테 쫓기는 사냥감이 되는 거야.’
혈왕은 이를 갈며 많은 준비를 했다.
자신과 유혈 길드가 얻은 호구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반대로 도진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는 빌빌거리는 사냥감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인기란 것도 다 이미지 싸움이다.
지금이야 독보적인 마법사 유저로서 날리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서 한번 삐끗하기 시작하면 빠르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게 인기란 괴물의 본모습.
‘딱 세 번만 죽이면 저놈도 끝장이지.’
유혈 길드의 원수 사냥. 아니, 버러지 처형식은 아주 멋지게 편집되어 사람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그러면 유혈 길드도 호구 이미지를 벗고, 악명이라고는 해도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 터.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사냥감이 그동안 너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덕을 볼 테니.
“길드장님, 지금 바로 진입할까요?”
사색 도중 말을 걸어온 길드원.
혈왕은 여전히 앞에다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대답했다.
“아니, 아직 아니다. 이번 사냥은 확실해야 한다. 그러기엔 우리 길드 인원만으로는 포위망을 완벽하게 짤 수 없어. 그 새끼들한테 연락해라. 사냥감을 발견했다고.”
“쪽바리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길드원이 ‘쪽바리’라 표현한 건 일본인이 대부분인 ‘낭인’ 길드를 뜻했다.
그들도 과거 도진에게 길드원이 썰린 탓에 이를 갈고 있던 터라 복수를 위해 유혈과 손을 잡은 상태였다.
잠시 후 길드원이 다시 보고를 해 왔다.
“2시간 안에 정예 타격대 위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2시간?”
인상을 찌푸리는 혈왕.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길드원을 한곳에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유혈 길드와 마찬가지로 제른 근방에 도진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굼벵이 같은 새끼들. 어쩔 수 없지. 일단 계곡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구멍을 틀어막고 기다리다가, 섬나라 원숭이 새끼들이 합류하면 사냥을 시작한다.”
“예, 바로 애들 배치시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혈왕은 두근대는 심장을 느꼈다.
그간의 설움과 분노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통쾌한 복수에 대한 기대감이 그의 심장박동을 거칠게 만들었다.
‘왠지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날이 될 거 같은 기분이 드는군.’
빌어먹을 새끼는 저 밑으로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나는 저 위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다.
날 호구라 욕했던 멍청이들에게 진짜 유혈이 어떤 길드인지, 혈왕이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줄 기회.
혈왕은 검병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 * *
드디어 도진에게 원함을 품은 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다누미네 계곡을 빠져나올 길목을 철저히 틀어막은 그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거머쥔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유혈 길드장 혈왕이 옆에 선 낭인 길드장 노부나가에게 물었다.
센고쿠 시대 다이묘의 성을 따 가상현실의 이름으로 삼은 노부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놈이 우리에게 칼을 겨눈 순간 이미 준비를 마쳤소. 죽여야 할 적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
“…….”
무게 잡고 말하는 노부나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혈왕은 자신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럼 포위망을 형성할 인원은 각 길드에서 공평하게 50명씩 차출하는 걸로 합시다.”
“그렇게 되면 계곡 안으로 투입할 척살대의 수가 많이 줄어들지 않겠소?”
“그쪽과 우리, 두 길드가 동원한 인원을 합하면 250명. 그중 100을 제외해도 머릿수가 150. 마법사 나부랭이 하나 몰아서 사냥하기엔 차고 넘치는 숫자요. 놈이 도주할 구멍만 막으면 독 안에 든 생쥐 새끼를 잡아 죽이는 건 일도 아닌 게 되지.”
노부나가는 잠시 생각하는 눈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좋소. 비교적 레벨이 낮은 길드원을 밖에 남기고, 최정예만 뽑아 척살대를 꾸리면 되겠지.”
두 길드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빠르게 작전 계획이 수립됐다.
주먹구구식이기는 하나 혈왕이나 노부나가 모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총인원 250명이 투입되어 사람 하나 잡아 죽이는 일인데 어려울 게 있겠는가.
“진입 시작.”
혈왕은 통쾌한 복수극을 시작했다.
* * *
다누미네 계곡엔 몬스터가 꽤 있었다.
초보자 사냥감을 대표하는 슬라임 종류도 있고, 짐승들도 있고, 코볼트나 고블린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주변에 물이 있는 곳이 계곡 상류 쪽밖에 없다 보니 물을 찾아 온갖 몬스터가 몰려와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 것이다.
슬픈 점은 도진이 잡아야 할 긴 송곳니 오크는 많고 많은 몬스터 중에 아주 일부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누미네 계곡에 생성되는 몬스터 전체 개체수를 100이라고 한다면, 긴 송곳니 오크는 그중 2~4를 차지하는 정도.
즉, 몬스터 100마리를 마주쳐야 겨우 2마리에서 4마리의 퀘스트 몬스터를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힘들고 지루해 죽겠네.”
지루하면 몸이라도 편해야지.
이 빌어먹을 계곡은 지형으로 사람 피를 말리는 곳이었다.
제른이라는 대도시 근처에 있으면서 초보자가 잡기 딱 좋은 몬스터가 사는데도 인기가 바닥을 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오!”
죽은 동태보다 더 퀭한 눈으로 걷던 도진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생기가 돌았다.
졸졸 흐르는 물가에서 목을 축이는 오크 두 마리가 보인 것이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가 동시에!
신이 난 도진은 바로 오크 두 마리를 사이좋게 저승으로 보내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앗!”
오크 뒤쪽 비탈에서 뭔가가 휙 튀어나왔다.
하나도 아닌 셋이.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조준점을 수정했다.
‘아, 좆 됐다.’
뒤늦게 튀어나온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서, 그게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임을 깨달은 도진은 다급히 외쳤다.
“조심해요!”
최대한 빠르게 경고했으나 애석하게도 소용은 없었다. 도진이 쏜 「화염창」은 순식간에 표적과의 거리를 좁혀 착탄했다.
완벽한 조준이었고, 깔끔한 명중이었다.
‘시발.’
졸지에 사람한테 선공을 갈긴 입장이 된 도진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어?”
뭔가 이상했다.
‘저 새낀 왜 활로 날 겨누고 있는 거야?’
생각과 동시에 오랜 시간 쌓인 전투 경험이 경종을 울렸다.
살기다.
도진의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파박.
두 발의 화살이 도진이 있던 자리에 꽂혔다.
팍.
몸을 굴린 뒤 고개를 쳐든 도진은 생각했다.
‘뭔지 몰라도 다행이다!’
그사이 화염창에 얻어맞은 놈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 마법을 맞고 일어서? 같은 생각을 하는 도진에게 거뭇거뭇 그을린 놈이 씹어 내뱉듯 소리쳤다.
“똥 같은 새끼(糞野郎)! 오늘은 꼭 팔다리를 잘라 개 먹이로 던져 주마!”
어? 어디서 본 놈인데?
오버쿡 된 스테이크 꼴이지만,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 그때 폐철광에 있던 머저리 새끼잖아?’
낭인인지 부랑잔지 하는 이상한 애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아 있던 놈이다.
도진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야, 반갑다. 살다 보니까 복수한다고 찾아온 새끼들이 반가울 때가 다 있네.”
다행이다. 난 또 내가 뺑소니 사고라도 낸 줄 알았잖아.
그래, 반가웠고. 그럼 잘 가라.
시위에 화살을 거는 둘과 검을 부여잡고 씩씩대는 이름 모를 머저리(가토)를 보며 도진은 조용히 속삭였다.
“아네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