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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깨고 나온 건 작은 늑대였다.
“늑대잖아……?”
설마 다그네의 영향을 받아서 늑대 정령이 태어난 건가?
그런데 다그네는 검은색 늑대였는데 이건 왜 은색이야?
알에서 나온 늑대를 보고 사소한 의문을 떠올린 순간.
새끼 늑대가 눈을 뜨더니, 도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
잘못 들었거나 비슷한 소리를 착각하거나 한 게 아니었다.
도진은 늑대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저 눈.
동공의 모양은 짐승의 그것으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익숙한 눈빛.
“설마…….”
새끼 늑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도진의 눈에 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마나 입자가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늑대는 힘겹게 걸어 도진의 발치에 털썩 엎어졌다.
도진의 발에 턱을 얹은 늑대는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도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늑대의 머리에 얹어졌다.
【…너무 오래 걸어서, 길을 잃은 줄 알았어. 그래도 제대로 왔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젠 알겠다.
조금 달라졌지만, 녀석의 목소리다.
정령의 알에 파수꾼의 영혼이 깃들어, 작은 늑대로 태어난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을까?
오랜 시간 다그네에게 영향을 받아 정령화가 된 걸지도 모른다.
이 숲을 떠돌며 그렇게 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최후의 순간, 이 공터를 가득 채운 정령의 기운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로스타니아에서 태어나는 정령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고생했어.”
지금 이 순간 이 녀석의 표정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 * *
깜빡 잠이 들었던 소녀는 눈을 뜨자마자 사방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혹여나 잠들기 전 보았던 게 꿈은 아닌가 확인을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모닥불이었다.
그리고 그 걸려 있는 커다란 솥.
익숙한 냄새.
잠시 냄새에 정신이 팔렸던 소녀는 다시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할 것을 찾았다.
모닥불 근처에 그가 없다.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킁킁.
늑대 정령이 되어 발달한 후각에 사람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소녀는 냄새를 맡자마자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달렸다.
화악 하고 트이는 시야.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최후를 맞이했던 공터.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진!】
도진이 돌아본다.
약간 놀란 눈이었다.
소녀는 그를 향해 달렸다.
도진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새끼 늑대를 받아들었다.
“일어났구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정령이 된 소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허허벌판에서 뭐 할 게 있다고…….
【어……?】
도진만을 보면서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변화가 그녀의 눈에 담겼다.
공터를 빼곡하게 채운 무덤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비석.
앞에 놓인 식기.
도진은 늑대 소녀를 한 팔에 끼우고는 몸을 숙여 식기를 챙겼다.
“네 걸 여기 두고 가서. 이거 말고는 내 거밖에 없거든.”
소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공터를 이렇게 만든 게 도진이고, 가장 예쁘게 꾸며진 무덤이 자기 것이라는 걸 소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스튜를 좋아하는 나의 친구.」
소녀는 비석에 적힌 글자를 뚫어지게 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도진이 자신을 기억했을 단어의 조합.
그것을 본 소녀는 몸을 뒤틀어 도진의 품에서 벗어났다.
【진.】
정령으로서의 본능이 속삭였다.
지금 하려는 일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고.
그러한 본능에게 소녀는 대답했다.
나는 이걸 위해 그 아득한 어둠을 되짚어 걸어왔노라고.
“……?”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의아해하는 도진에게 소녀가 말했다.
【새로이 태어나, 아직 이름 없는 내게 이름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나의 존재를 너에게.
【나의 존재는 너의 생과 함께하며, 너의 생이 끝나는 그때에 나의 시간도 끝날 거야.】
아득한 시간을 허락받은 정령이, 덧없이 짧은 수명을 각오해야 가능한 일.
정령 스스로 계약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종속과 지배를 받아들이는 주종으로서의 계약.
【나는 너의 시간을 살겠어.】
[정령 「 」이 완전한 종속을 원합니다.]
【그러니 나와 계약해 줘, 진.】
[계약하시겠습니까?]
도진을 바라보는 작은 늑대의 눈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감돌았다.
혹여나 거절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
해서, 도진은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잘 부탁해.”
이런 상황에, 저런 눈빛을 앞에 두고 다른 말을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이 녀석에게 줄 이름을 고민하는 게 낫지.
【정말? 정말이지?】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작은 늑대는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건 계약이 끝나려면 그 조건으로 내건 ‘이름’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다.
작은 늑대의 눈이 기대에 찬 눈으로 도진을 바라본다.
그 눈을 본 도진은 안도했다.
‘미리 정해 둬서 다행이다.’
이름이 없는 친구에게 줄 그럴싸한 이름을 이미 정해 뒀기 때문이었다.
잠들어 있던 녀석 옆에 피어 있던 작고 흰 꽃, 바람꽃의 다른 이름.
“아네모네.”
원래도 숲을 바람처럼 달리는 녀석이었으니, 퍽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아네모네……?】
“마음에 들어?”
도진의 물음에 작은 늑대, 아네모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정령 ‘아네모네’와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아네모네의 몸이 빛으로 흩어지며 도진에게 스며들었다.
[계약자의 레벨과 능력치에 맞춰 아네모네의 레벨과 능력치가 재설정됩니다.]
존재와 존재,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특별한 계약의 효과로 아네모네의 레벨과 능력치가 도진에 맞춰졌다.
“아네모네.”
도진이 손을 내밀며 이름을 부르자 은빛 섬광과 함께 아네모네가 소환됐다.
레벨이 오르면서 정령으로서의 힘이 순식간에 성장한 아네모네는 덩치도 훨씬 커졌다.
작은 새끼 강아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았던 늑대는 이제 일반 늑대보다도 컸다.
네 발로 지면을 딛고 서 있는데도 머리가 도진의 얼굴 부근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변한 건 크기뿐.
아네모네는 소환되자마자 도진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개과 정령이 되더니 성격도 개를 닮아 가는 건가?’
커다랗게 변한 머리통을 쓸어 주며 하는 생각이었다.
하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이 녀석이 기분 좋아 보이니 그걸로 됐다.
그나저나 이제 숲을 떠나야 할 때다.
이제 숲에서 하는 노숙은 진절머리가 난다.
* * *
고생도 했고,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번 히든 퀘스트도 일단락지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아네모네가 죽고 끝났다면 무엇을 얻었든 마음에 얹힌 돌의 무게가 더 컸겠지만, 일단 살아나기는 했고.
성장 측면에서도 얻은 게 컸다.
‘마법사한테 부족한 점을 채우기 딱 적당한 정령을 얻었으니.’
도진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물리 공격 능력인데.
늑대 정령(물리) 아네모네는 특기가 물리적으로 적을 찢어발기는 거다.
도진이 마법을 쓰는 동안 호위를 해 줄 존재를 확보했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 밖에도 아네모네는 활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전력이 되어 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동료였다.
전체적으로 나름 기분 좋은 마무리가 됐다는 소리다.
“이제 좀 쉬자.”
도진은 오랜만에 돌아온 현실 침대에 뛰어들었다.
이게 천국이구나.
인게임 아바타 체력 회복을 위해 깡으로 차가운 땅바닥에서 노숙을 했던 처지다.
푹신하면서도 탄탄한 매트리스의 감촉에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사람은 주기적으로 밑바닥을 봐야 행복도가 올라가는구나.’
인생사 진리 중 하나를 새삼스레 깨달은 도진은 뒹굴뒹굴 구르며 침대의 감촉을 느꼈다.
그러자 머지않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진아…….”
그런 도진에게 천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실에서 들리는 건지 꿈에서 들리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아득한 소리였다.
“…된 거… 보내… 돼?”
뚝뚝 끊어져 들리는 말에 도진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알아서 하라고.
* * *
라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팀은 최근 매우 바빠졌다.
각종 홍보 영상은 물론이고, 최근 회사와 새롭게 계약한 연예인, 유튜버를 비롯한 크리에이터가 늘어서 일도 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바빠지고 있는 시기에 콘텐츠 팀장은 무려 사흘이나 다른 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이유는 길고 긴 영상 하나 때문이었다.
[도진 크리에이터 플레이 영상(풀)]
무려 영상 길이가 일주일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영상.
재료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파악을 해야 영상 전체적인 제작 방향을 정할 수 있는 법.
디테일한 연출을 위해서는 풀 영상을 다 봐야 했고, 거기에 들어간 시간은 배속으로 영상을 돌렸음에도 장장 사흘이나 걸렸다.
원래도 있던 다크서클이 더욱 짙어진 모습으로 팀장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주강희 실장이었다.
“실장님, 제 목숨도 걸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 무조건 대박납니다. 지금까지도 다 대박이었지만, 이번 건 진짜 진짭니다.”
“…그런 것보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완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이것부터…….”
팀장이 반쯤 풀린 눈으로 내민 것은 영상 제작에 관한 기획서였다.
말이 기획서지 이것저것 하고 싶으니 ‘돈 줘’로 함축할 수 있었다.
문제는 금액이 조금 셌다. 기획서 이곳저곳에서 눈치를 보며 금액을 조정한 부분이 눈에 띄었지만, 결과적으로 5억 원 안팎의 돈이 필요하다는 게 결론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콘텐츠 제작비용으로 5억이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큰돈도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꽤나 큰 규모로 뭔가를 벌여서 만드는 콘텐츠의 경우다.
이미 생산된 게임 플레이 영상을 자르고 편집해서 보는 재미를 극대화하기만 하면 되는 데다 5억을 태우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콘텐츠 팀장이 이렇게 흥분해서 헛소리에 가까운 기획서를 내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이번에 도진이 사고를 크게 쳤다는 소리일 터.
‘궁금해서라도 한번 확인은 해 봐야겠네.’
주강희는 안절부절못하는 팀장을 일단 내보내려 했다. 자신도 영상을 확인하고, 그때 결정하겠다고.
이에 이미 준비를 하고 온 상태였던 콘텐츠 팀장은 이번 영상의 명장면 몇 개를 주강희에게 보여 줬다.
그리고 약 15분 뒤.
콘텐츠 팀장은 밝은 표정으로 실장실을 나갔다.
‘이제 재계약할 시기도 얼마 안 남았으니 한번 제대로 보여 주긴 해야지. 너무 귀찮게 하면 또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하면 괜찮을 거야.’
모니터 속에 비치는 도진을 바라보는 주강희의 머릿속에선 이번 영상의 결과물과 연계할 여러 프로젝트가 파노라마처럼 재생되고 있었다.